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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신사참배에 대한 재평가: 한경직과 주기철

 

2005, ‘크리스챤투데이 한국 기독교 120년을 기념하여 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한경직(37%), 주기철(21.8) 목사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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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1, 2위를 차지한 목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 임과 동시에 많은 이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 있지만, 목사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한경직 목사(이하 목사)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인 영락교회를 개척한 설립자이자, ‘청빈겸손 상징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도 꼽힌다. “나는 우리 자손들에게 남길 유산은 하나도 없다.” 말로 시작되는 육성 유언은 돈과 권력으로 부패한 한국 기독교에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라고 평가되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많은 미담들도 존재한다. 사역 초기, 보육원을 설립을 필두로 전쟁 피난민을 돌보고, 선명회( 월드비전) 조직하여 전쟁 미앙인과 고아,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다. 시대적으로 힘들고 어려웠던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은 인정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무색하리 만큼 어두운 과거가 목사에게도 존재했다. ‘신사참배문제다. 그런데, 단순히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것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경직 목사에 대한 재평가: 신사참배를 숨겨왔던 시간들

 

목사는 1992, 템플턴 상을 수상했다. 템플턴 상은 미국 태생의 영국인 템플턴’(Sir John Templeton, 1912-2008) 재단을 설립하고 자본을 투자하여 제정된 상으로, 노벨상에 없는 종교 부분에 대하여 시상을 한다. 흔히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목사의 템플턴 수상은 굉장히 영예였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긍지와 자부심으로 느낀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목사가 템플턴 상을 수상하게 주된 이유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가장 대형교회를 설립했고 많은 개척교회와 교육기관 양성 복음화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락교회는 6 성도, 세계 500여개의 교회 개척, 미국 LA 위치한 나성영락교회 5 성도를 이루고 있었으니 교세가 엄청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목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에까지 다녀왔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목사의 템플턴 수상에 대해 보도한 미국의 언론은 목사의 업적과 함께 일제의 강요에 굴하지 않았던, 그래서 감옥에까지 끌려갔던 인물로 소개했다.

 

“In 1941, Han was briefly imprisoned by Japanese authorities because he refused to worship the Japanese emperor at a Shinto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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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국기독교와 역사> 창간호(1991)에는 이만열 교수와 한경직 목사의 대담을 담고 있다. 당시 목사는 교수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됐는고 하니, 신사참배를 찬성할 목사가 누가 있겠어요? 반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신의주에서도 특별히 반대하는 목사와 장로들을 사람들이 조사해 갖고서는 여섯을 전부 잡아 넣었어요. 나도 잡혀 들어가 있었지요. 그렇게 하고서는 신사참배 가결을 했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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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 장로들과 함께 신의주 경찰서의 유치장에 20일간 갇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언론의 보도와 목사의 증언, 조선장로회 총회의 회록을 종합해 보면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신사참배가 가결될 당시, 1938 9, 조선예수교장로회 27 총회에서 일제는 무력을 동원하여 신사참배에 가담할 것을 강요했고, 총회가 열렸던 신의주 2교회에서신사참배안이 가결되었다. 당시 신의주 2교회의 담임목사였던 목사는 의산 노회의 총대로 총회에 참석하여 성경봉독으로 로마서 13:1-7절을 봉독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신사참배 가결에 동참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교수와의 대담에서 목사는 자신이 잡혀 들어간 사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여기서 번째 의문점이 발생한다. , 자신이 직접 총회에 참여했음에도 자신은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신사참배가 결의가 되었다고 증언 했을까?

 

물론, 목사가 신사참배 일제와 장로교회가 함께 하는 사업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되어 교회를 떠나 해방직전까지 자신이 운영하던 보린원(보육원)에서 지냈던 것은 사실이다. 언론의 보도에도 보여지듯,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여 감옥에 것은 1941년이다. 따라서, 신사참배가 결의되던 총회에 참석하여 찬성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신사참배 결의가 자신이 감옥에 있을 결의가 되었다고 했는지 의문이다.

 

한가지는, 1992 6 18, 63빌딩 코스모스 홀에서 열린 한경직 원로목사 템플턴 수상 축하예배에서나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신사참배도 사람입니다.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자리에 있게 하셨는지 없습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사실, 목사가 템플턴 상을 수상하기 전인1991년까지만 하더라도,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목사 스스로도 증언 했듯이 그가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번째 의문점이 발생한다. 전까지 목사는, 신사참배 결의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제정된 것처럼 말해 왔는데, 왜 70여년 가까이 신사참배를 했다는 것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다가 89세의 나이에, 그것도 템플턴 상을 수상하고 이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고백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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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지 의문점으로 인해 목사가청빈겸손 목회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왔던 목회자가 아니냐고 평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27 총회에서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자진 폐교했는데, 해방과 전쟁 후인 1954,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목사가 숭실대를 재건하는 일에 앞장섰다든지,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 협력하고, 군부정권 입장을 취한 일들은 아름다웠다고만 하는 평가와는 다른 뒷모습이었다. 다른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이 동의한신사참배가결안으로 인해 폐교된 학교의 재건에 앞장 것을 단순히 선한 의지였다고만 바라볼 있는 문제인지 의문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고취시키는 다름 아닌 신사참배에 대한 목사의 입장이다. 목사 서거후, 그를 기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운영중인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신사참배에 대한 목사의 입장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 결정(신사참배)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환상 가운데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문구에서 보여지듯이 목사는 신사참배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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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이러한 입장은, 과거 신사참배를 가담한 이들에게자숙 권고했던 이들에게 강력히 반대했던 조선장로회 27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의 발언과 뜻을 같이 한다. 다음은 목사의 발언의 일부이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고생은 마찬가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은둔생활을 사람의 수고 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압에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높이 평가돼야 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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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가담했던 일은 결코 자랑이 없고,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가 없는 부분이다. 특히, “신사에서 신에게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반대된다.” 입장을 표명하고 옥중 살이 끝에 목숨을 다한 목회자들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면 결코 스스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말로 합리화 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목사는 오랜 기간 신사참배에 대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밝혀진 후에도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을 체험했다는 말로 매듭을 지어버렸다.

 

영화밀양 통해 우리 사회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용서 관한 부분이었다. 자식을 죽인 이를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던신애’(전도연 ) 유괴 살인범으로부터 들었던 것이 말이 다름 아닌, 하나님을 만나 믿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지은 잘못을 내가 용서 있었나? 이처럼,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한경직 목사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순교자, 주기철잊혀져 있던

 

한국의 장로교회에는 가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故한경직 목사와 다르게 인생의 족적이 너무나도 명백한 분도 있었다. 장로교회의 소속이었던 故주기철 목사(이하 목사). 투철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겸손과 박애정신을 지닌 목사는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한 이유로 네 차례 투옥되었다. 번째는 1938 2월이었고, 번째는 같은 (1938) 8, 조선장로회 27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을 앞두고 반대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으로 투옥되었고, 번째로는 이듬해인 1939 8월에, 마지막으로 번째로는 1940 5 최후로 검속 투옥되어 1944 4 21,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평양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는 옥중에서인간의 얽히고 설긴 인정의 줄에 나를 얽어 매지 말라 자신을 설득하려는 주변인들에게 당부하며, 끝까지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당시 일제의 경찰은 평양노회장인 최지화 목사를 불러 목사를 파면하라 권고했는데, 마지막으로 설득을 하기 위해 목사를 찾아가사면만 하면 자신도 편하고 노회도 편할 터인데 생각을 돌려보면 어떻겠소?”라고 묻는  목사에게, 목사는당신이 도대체 양심이 있느냐?”라고 답했을 정도로 신실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목사의 투옥 과정을 보면서도 있듯이, 그는기개’(氣槪) 있고 총명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투철하고 윤리 의식도 바른 인물로 지도자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목사는 오히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결국 1939 목사직을 면직당했고, 존경은 커녕 오랜 기간 한국교회에서 잊혀져 있다가 1997년이 되서야 목사직이 복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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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평양노회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학적 복적을 선포했고, 2015년에는 총신대학교가 목사직 복권 평양신학교 복적을 선포했지만, 광복후 교회 재건사업을 진행하며 70 가까이 지나는 기간동안 한국교회가 목사를 위해 일은 없었다. 한경직과 주기철로 대비되는 지난 70여년간의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역사는 정의가 바로 서는 길에 발을 디딛고 있었다기 보다는 '노회도 편하고 나도 편한'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해방이 , 심사참배 가결에 가담했던 이들이 교계에 끝까지 남아 교세를 확장하고 기득권으로 자리매김 , 정작 끝까지 신앙과 믿음을 지켰던 이들은 외면당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정치와 결탁하여 쉬운 방법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지경을 넓혀왔다. 교회는 점점 대형화되어 갔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의 지도자인 대형교회 목사는 막강한 권한을 누리게 되었다. 아쉽게도 중심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초대형교회의 설립자인 故한경직 목사가 있다.

 

 

 

값싼 은혜로도 허용될 없는 최소한의마지노선

 

우리 사회에 친일에 대한 문제가 끊이지 않는 처럼, 한국교회에도 이와 같은신사참배 대한 문제를 떠안고 있다.

 

과거는 그렇지만 그래도 있는데…” vs “제대로 평가 받아야…”

 

물러설 없는 양각의 혈전은 광복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사회나 교회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성장을 이루었으니”, “그래도 지금의 대한민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으니”, 전자에 속한다면, “최소한 결코 허용될 없는 것이 있다라는 입장이 후자이다. 인류사에서도 밝혀졌지만, 묵인하고 넘어갈 있는 일이 있지만, 그럼에도 절대 용납될 없는 일도 있다. 아마도, 우리 나라에는 친일에 대한 문제가마지노선 아닐까.

 

다행히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은 우리 나라는 친일에 새로운 여론 형성을 맞이하고 있다. 중에서도 가장 움직임은 이상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인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과 별개로 친일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10 전만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혔던 것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교회도 친일에 대한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지만 사회와는 다르게 아직까지 교계에서는 친일 행적, 특히 신사참배에 대해서 크게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계 기득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 조차도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 행위에 대해서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걸로 됐다 한국교회 특유의값싼 용서’ 문화가 자리잡게 것은 친일/신사참배에 대한 태도와도 관련이 깊다. 그러나, 본인이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해서 덮고 넘어가기에는, 신사참배 문제가, 신앙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기는 종교인으로서 적당히 덮고 넘기길 있는 부분은 아니다. 값싼 은혜로도 허용될 없는 최소한의마지노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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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결론: 숨길 없는

 

목사를 비롯해 친일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이 교계에서 칭송받고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면, 예수를 팔고 후회했던 가룟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재고되어야야 한다. 만약 가룟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가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 말했다면 어땠을까?

 

가룟 유다도 많은 사람들  예수의 12제자에 속해 있었다. 물론, 예수를 팔아 이익을 거두려고 했었던 부분은 잘못한 부분이지만, 그도 이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되돌리려 했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배신의 아이콘으로 묘사한 성경의 저자들의 의도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짐작할 있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도 존경해 마지않는 한경직 목사는 이러한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물론, 사정은 있었다. 그러나 목사의 신사참배는 단순히 신사참배를 했던 사실에 있지 않다. 숨기고 오랜 기간 침묵해 왔다는 것이다.

 

현재, 신사참배를 허락하고 각종 친일 행위에 가담했던 목회자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과 후계자들이 여전히 교계에서 지도자로 추앙 받고 있다. 이들 목회자들은 대부분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항변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한국교회에서의 정의는 무너지고 이미 신뢰는 바닥을 치닫게 되었다. 스스로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능력으로 자신의 과오를 용서하고 다시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상실하게 것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사참배는, 신상 앞에서 절하면 되는 행위였지만, 그렇게 쉽게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교회는 끊임없이 타협의 장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목사를 비롯하여 교계의 지도자들이 군사정권에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반공에 협조하여 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해 왔던 일들이 과연 한국교회가 올바른 방향을 갖고 걸어왔다고 있을까.

 

한국교회는 단추부터 잘못 맞춰졌다.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진단하는 현재주의가 옳음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의 친일 행적과 신사참배에 관한 책임 여부에 대해서는  말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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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지 제안하자면, 그동안 한국교회는 시류에 맞춰 흐르는  사회와 발을 같이 했다. 군부독재부터 경제개발, 민주주의 운동 . 그러나 이제는 시대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시대를 이끌어 가야 한다. 시작점은 친일과 신사참배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과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다. 

 

조선장로회의 친일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31 총회 회록은 일본어로 기록되었으며, 68년이 지난 2010 번역 총회 인준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사실 전까지만 하더라도 장로교회의 친일행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도 일본어로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회 인준을 거치지 않아 공식 자료로서 입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 링크)

 

하지만, 이에 대한 사정을 소상히 밝히고, 신사참배에 가담하고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도 책임을 만한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 교회 안에 정의가 바로 서고, 이상의 어떠한 불법도 합법으로 둔갑되지 못할 것이다. 친일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에 재평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