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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살던 시대는 의심하지 않는 시대였다. 개신교와 카톨릭은 의심 없이 서로를 악마라고 믿었다. 국제적인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은 유럽의 총기와 화포를 크게 발전시켰다. 스페인에서는 마녀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연일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탔다.

 

맹목적인 확신은 사실 의심에서 나온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불안을 덮기 위해 확신하고, 확신을 확신하기 위해 불같은 증오를 내뿜는다.

 

철학은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의심은 정직함의 측면에서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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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의 데카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담판을 지었다. 자신은 법조인으로 먹고 살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 홀로 학문 연구에만 매진하다 죽겠다고 선언했다. 폭탄발언이었다. 이제 군 경력도 쌓고 왔겠다, 건실한 법조인이 돼서 데카르트 가문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는가 싶었더니, 평생 혼자 놀겠다니. 이럴 거면 보수적인 신학대와 법대를 차례로 보낸 보람이 없었다.

 

데카르트는 자기 몫의 유산 상속분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혹은 고성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오래 숙성된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데카르트는 집안의 돈을 챙겨 유럽의 학문이 모여드는 파리로 향했다. 철학, 수학, 물리학 연구를 시작했고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리는 데카르트의 취향에는 너무 화려하고 붕 뜬 도시였다. 병약하고 예민한 사람은 주변의 어수선함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게다가 파리는 사교계라는 게 있어, 아는 척 하고 아는 척 당하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고독하게 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골랐다.

 

외국이고, 소박하면서도 문명적인 소비생활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답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신중하게 고른 국가는 네덜란드였다.

 

“여기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유에 전념할 수 있으리라.”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의 분위기에 높은 점수를 매겼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보다 자기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이 많은 위대한 민족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근면하고 착실했으며 욕망에도 정직해 저축을 중요시했다. 칼뱅주의의 영향이다. 멋쟁이들이 깃털을 세우고 레이더를 켜고 다니는 파리와는 반대였으니, 데카르트의 입맛에 딱 맞았다.

 

놀 때 확실히 놀았듯, 숨을 때는 확실히 숨어야 했다. 데카르트는 중간이란 게 없는 사람이다. 그가 어느 정도로 폐쇄적이었는가 하면, 편지 수신인을 가명으로 해 놓아서 아는 사람들하고만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고 반박을 재반박했다. 기꺼이 심부름을 해줄 사람 몇만 남긴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사를 반복하며 주소지를 바꾸었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10시간 취침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자는 게 10시간이고 뒹굴뒹굴하는 시간은 따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는 날백수다. 하루는 친구가 정오 즈음에 그를 방문해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자네 어디 아픈가?"

 

"아프긴. 지금 일하는 중이네."

 

생각만으로 일할 수 있다니, 과연 철학은 그의 체질에 딱 맞는 직업이었다.

 

돈을 벌어 나쁠 게 없으니 의사 생활도 했다. 데카르트는 의사로 잘 나갔다. 그의 진료는 용하기로 소문났다. 그런데 그의 처방 신조는 확고했다.

 

<잠이 최고다>

 

데카르트는 환자에게 일단 누워서 잠을 자고 푹 쉬라는 처방을 남발했다. 이걸로 용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게 의외로 잘 먹혔다. 유럽인들이 칭찬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근면함을 알 수 있어 재미있다. 거꾸로 네덜란드 이웃들에게 데카르트는 별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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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다고 해서 사랑과 연애가 없었던 건 아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헬레나 얀스 반 데 스트롬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났다. 방콕 철학자답게 문 밖에 나가서 여자를 만나진 않았다. 헬레나는 그가 고용한 가정부였다.

 

두 사람은 종교가 달라 결혼은 하지 못했다. 데카르트는 카톨릭, 얀스는 개신교도였다. 대신 반 동거 생활을 하는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재미있게도 맞벌이 부부였다. 얀스는 데카르트가 이사를 갈 때마다 따라와 새로운 동네에서 하녀로 취직했다. 종교가 다른 남자의 집에 주부로서 하루종일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시대였다.

 

데카르트의 나이 서른 아홉,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데카르트는 첫사랑인 프랑수아즈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느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딸바보였다. 데카르트의 편지를 추적해보면 그가 딸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놀아주는 시간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사생아라서, 겉으로는 조카인 셈 쳐야 했지만 말이다.

 

당대 유럽에서 교육의 메카는 아무래도 파리였다. 데카르트는 딸의 교육을 위해서 그 싫어하는 파리에 가려고 했다. 이사 준비까지 마쳤는데 프란시느는 그만 성홍열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5살에 사망했다.

 

데카르트는 인생에서 가장 슬픈 사건이 딸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몇날 며칠을 쓰러져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후 데카르트는 의학을 버리게 된다. 딸도 살리지 못했는데 누구를 치료한단 말인가? 몇 년 후 헬레나와도 결별했다. 딸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헬레나는 재혼했고, 데카르트는 이후 평생 독신을 고집했다.

 

딸 프란시느가 아직 두 살 때, 그는 드디어 자신의 철학을 정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발표가 임박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신성모독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모든 저작은 마녀로 간주되어 불태워졌다. 충격을 받은 데카르트는 그다운 결정을 했다.

 

"그렇다면 과학을 포기한다!"

 

데카르트는 느긋하고 안전한 생활이 최고인 사람이었다. 손님이 드나드는 것도 번잡한데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변명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철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데카르트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그 어떤 의심의 공격을 받더라도 굳건히 남는 철학적 진리를 발굴해내고자 했다. 그래서 철학에 선험적인 '우주의 언어'인 수학의 방식을 적용했다. 하지만 당장 발표하는 일은 포기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느긋하게 말했다.

 

“나의 바람은 그저 조용하게 사는 것 뿐일세.”

 

“세상은 나의 생각을 내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걸세.”

 

원래 뭐가 있다고 해놓고 비밀이라고 하면 애간장이 타는 법. 궁금증이 폭발한 친구의 반응은?

 

“그렇다면 내가 빨리 죽여줄까?”

 

책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친구들의 '뽐뿌질'과 격려에 데카르트는 마음을 돌렸다.

 

'그렇다면 뭐, 책을 내 볼까?'

 

1637년이었다. 라틴어로 통용되던 당대의 학계에서는 파격적이게도 프랑스어로 된 책이 발표되었다. 편견이 없었던 데카르트는 스스로 카톨릭이면서도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개신교의 유행을 채택한 것이다. 책의 제목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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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

 

이를 과감하게 확 줄여서 <방법서설>이라고 한다. 이 책은 가히 핵폭탄이었으며, 이로써 서양 정신사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