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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거리에 넘쳐나는 ‘안마방’이나 ‘룸사롱’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우리민족은 원래 음란한 걸까?”

 

욕망의 분출이라고 해야 할까? 2010년 여성가족부의 성매매 실태조사에서는 성매매 업소가 4만 293곳, 성매매 여성은 14만 5600명으로 조사됐다. 성매매 산업의 경제 규모는 6조 8604억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2007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2007년 성매매 실태조사’에 비하면 줄어든 규모지만(2007년 성매매 시장의 거래 액수는 14조를 웃돈다), 체감할 순 없다.

 

우리 역사에서 성매매는 일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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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성매매

 

우리 역사에서 ‘성매매’의 뿌리는 의외로 깊다.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만 하더라도 기녀 ‘천관녀(天官女)’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애마의 목을 친 것만 봐도 이 시기에도 기녀가 존재했다. 이 당시 기녀가 어떤 출신인지, 기녀란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복전쟁’ 와중에 포로로 잡힌 여성들이 기녀로 전락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전쟁이 있다면,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는 바늘 가는 곳에 따라 가는 실처럼 한 묶음으로 움직였다. 특히나 ‘정복전쟁’의 경우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고려시절의 경우에도 관기(官妓)와 사기(私妓)로 나눠서 기생들을 관리했는데, 무신정권의 마지막을 불태웠던 최충헌의 경우 집안에 따로 기생을 두었고, 이 기생들을 동원해 갖가지 퍼포먼스를 벌였다고 한다.

 

삼국시대 때보다 노비의 수가 크게 증가한 고려시절은 기생을 체계화시킨 시대이기도 하다(즉, 노비의 숫자가 많아지자 덩달아 국가소유의 공노비도 늘어나게 된다. 공노비의 증가가 기생의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관아의 관비 중 예쁘장한 여성들, 재주 있는 여성들은 여악(女樂)이나 무악(舞樂)으로 차출해 훈련시키고, 국가 행사 때 이들을 동원했던 기록이 있다.

 

고려 때 체계화된 관기제도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진다.

 

관기(官妓)를 거칠게 풀어 보자면,

 

“국가 소속의 공무원 창녀”

 

라고 할 수도 있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예(禮)와 도(道)를 말하는 조선이 고려시절의 관기제도를 유지했다는 것(아니, 더 확대 발전시켰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변명’이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기생을 유지시킨 이유로 내세운 건 역시나 ‘군대’였다.

 

"옛날에 변진(邊鎭)에 창기(娼妓)를 두어 군사들의 아내 없는 사람들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지금도 변진과 주군(州郡)에 또한 관기를 두어 행객을 접대하게 하는데, 더군다나 도내의 경원·회령·경성 등의 읍은 본국의 큰 진영으로 북쪽 변방에 있는데, 수자리 사는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 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용(日用)의 잗단 일도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기녀를 두어 사졸들을 접대하게 함이 거의 사의(事宜)에 합할 것이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1436년) 12월 17일의 기록 중 발췌

 

세종대왕이 함길도 감사에게 지시한 내용이다. 기녀를 두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접대하란 소리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이었던 세종대왕의 말이다. 이 기록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세종대왕이 군 사기진작용 위안부 모집을 지시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가치관을 현대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건 옳지 않다. 중요한 건 당시에도 창녀가 있었고, 이를 국가가 관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게 장악원(掌樂院)이다. 이곳은 국가의 행사에 필요한 기녀들을 뽑아서 교육하는 곳이다. 좋게 보자면, 국립예술단의 성격이지만 한 겹 벗겨보면 국가가 ‘창녀’를 뽑아 훈련을 시켰다고 볼 수 있다(예술교육을 받은 창녀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장악원에 문제가 생긴다. 공노비의 숫자가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기녀의 숫자도 늘어나게 됐다. 기녀의 숫자가 늘어나니 이들을 다시 분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기녀는 세 계층으로 나뉘어 진다. 바로 일패, 이패, 삼패다. 이를 하나씩 설명해 보면,

 

1> 일패(一牌)는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기생’들이다. 사대부를 상대로 연회에서 춤도 추고, 접객도 하는 무리. 사극에서처럼 성매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이들도 알게 모르게 몸을 팔았다.

 

2> 이패(二牌)는 은근자(殷勤者)라 불리는데, 말 그대로 은밀하게 매춘을 하는 기생들이었다. 기생이긴 기생이지만, 좀 수준이 떨어지는 부류였다.

 

3> 삼패(三牌)는 탑앙모리라고 불리었는데, 매춘을 주업으로 하는 기생들이었다. 재미난 대목은 삼패는 일패와 이패가 부르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즉, 잡가만 부를 수 있었다.

 

조선의 기생 제도를 보면, 기본적으로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신다.’란 개념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웠고, 술자리가 끝난 뒤 2차를 가는 경우였다. 춘향전을 보면 초라한 행색의 이몽룡을 보고, 기생이 엉터리 권주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걸 떠올리면 된다.

 

“들이세요. 들이세요, 이 술 한잔 들이세요. 이 술 한 잔 움키시면 하오리다. 난장 맞아 결딴나지.”

 

지금으로 치자면, 노래방 도우미라고 해야 할까? 어찌됐든 조선은 ‘창녀’를 양성했다.

 

그렇다면, 이건 전국적인 현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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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팔도에 기녀가 넘쳐났다.

 

조선시대 기녀를 지역별로 나누자면, 경기(京妓)와 지방기로 나눌 수 있다. 경기. 즉, 서울에 있는 관기들은 모두 장악원 소속인데, 이들 정원은 100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가 행사’에 동원되던 존재였기에 ‘성매매’ 쪽 보다는 ‘예능인’으로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물론, 고위층의 요구가 있으면 당연히 몸을 팔아야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연예인 성매매나 텐프로급 여인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지방기는 어떨까? 지방기의 경우는 경기와는 정 반대였다. 예능인으로의 활동보다는 ‘성매매’ 쪽에 주안점을 뒀던 이들이다. 경기의 경우에는 ‘예능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지방기의 경우는 빼도 박도 못하고, ‘지방 공무원 창녀’가 되는 경우였다.

 

그 숫자는 경기를 압도했다. 보통 한 관청마다 15~30명 정도의 기녀들이 있었는데, 전국의 관청 숫자마다 이 정도의 기녀가 있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됐을까? 요즘으로 치자면, 도청 소재지, 시청, 구청 등등에 창녀들이 배치돼 있다는 소리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상대하는 건 일반인이 아니라 ‘국가공무원’이었다는 점이다. 지방 관청으로 파견 나온 공무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거다. 지방기들은 가급적이면 ‘높은 관원’들에게 몸을 팔기 위해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행수기녀에게 뇌물을 써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여기까지가 ‘국가 공무원’으로 분류되던 관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은 어떻게 ‘성욕’을 해결했을까?

 

몸 파는 여자는 많았다. 건리개의 처방에 따라 약값으로 세목 1필과 중목 1필을 주겠다고 한즉, 건리개가 대답하기를 "선달님이 본가를 떠나온지 2000리 밖이어서 약값을 구하기 어려우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 부북일기(赴北日記) 1645년 1월 2일의 기록 중 발췌

 

부북일기는 군관출신인 아버지와 아들이 쓴 일기다. 함경도 국경으로 배치 받은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의 기록을 썼는데, 아버지는 1605년, 아들은 1645년 함경도로 배치 받아 가서 국경수비를 하는 과정을 상세히 적은 일기다. 이렇게만 보면, 비장한 내용일 거 같지만 그 내용의 20% 이상은 ‘섹스’이야기다.

 

(물론, 당시 함경도 군관의 생활상, 국경수비 방법, 이동경로 등등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희소한 내용도 있지만)

 

앞에 언급한 기록은 박취문이 강릉에 갔을 때 벌어진 사건을 발췌한 거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강릉에서 유명한 기생 연향과 같이 잤는데, 자고 난 며칠 뒤 또 다른 기생 건리개를 찾아가 섹스를 했던 거다. 문제는 연향은 매독에 걸렸다고 소문이 자자한 기생. 이 사실을 알게 된 건리개는 펑펑 울게 되고, 박취문은 미안하다며 약값을 주겠다고 말한다. 건리개가 이 약값을 거절하는 내용이다.

 

(박취문은 이후 자신도 매독에 걸린 게 아닌지 걱정 되어 성생활을 잠시 자제했지만, 이후 또 열심히 ‘한다’. 이 사람이 참 대단하다고 느낀 게 각 고을의 유명한 기생, 관계한 여성의 이름, 상관이나 동료의 파트너 이름 등등 성생활에 대해서는 실록 수준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놨다. 이 정도면 인정해 줘야 한다)

 

(이 기록을 보면, 조선에서 ‘대단위 성매매’ 즉, 집창촌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약값을 세목 1필과 중목 1필을 주겠다는 건데, 이 당시까지도 조선은 쌀이나 옷감으로 거래를 했다. 화폐경제가 아니었기에 성매매를 할 때 대가를 주고받기 힘들었다. 기생들의 경우 누군가에게 ‘몸’을 허락한 경우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얼마간 숙식을 해결해 준다던가 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마무리 짓는 경우가 많았다)

 

부북일기에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박취문이 상대한 여성들의 ‘종류’다.

 

일단 기생(유명한 기생들은 다), 노비(숙박한 집의 노비들), 술집 여인 등이다. 기생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노비의 경우는 ‘당연하단 듯’ 관계했다. 술집의 경우도 들르는 술집이 다 다른데, 하나 같이 여자와 관계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 성매매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일단 노비는 디폴트로 관계할 수 있는 여자이고, 기생과 술집 등등 성매매를 할 수 있는 곳은 넘쳐났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주막의 주모들, 이들은 술만 파는 존재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에선 여자를 흔하게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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