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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은 나에게 무엇인가

 

어제가 박종철 열사 31주기입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는 국가의 권력 기관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에서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문재인 정부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은 민주화 이후 국가권력은 국민 편이 아니었다며 국정원 검찰의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국정원 민주화, 검찰 민주화 조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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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영화 1987>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지만, 더이상 민주주의를 위해 잡혀가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원래 민주주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는 역사상 최초의 실험이었고 다시 민주주의가 출현하는 데는 그 후 200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며칠 전에는 보수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에게 축구장 출입을 허용했다는 소식이 국제뉴스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사우디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축구장에서 스마트폰으로 경기를 찍는 모습이 뉴스가 되는 나라가 사우디입니다. 3년 전인 2015년에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던 나라니 그도 그럴 만 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3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대한민국도 그와 흡사했습니다.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에게 달라고 말하면 잡혀가고 고문당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친북 빨갱이로 몰렸습니다. 대통령을 우리가 뽑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지금, 대한민국의 상식으로 납득이 갑니까?

 

우리가 사는 오늘은 선배 열사들이 그토록 열망했던 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도 124년 전 1894년에 농민들이 봉기했습니다. “인간은 평등하다. 민심이 천심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지만 그때 이것은 역모였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1894년, 농민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수많은 민중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영화 1987>의 한병용(유해진)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받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장면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하며 공포심에 가득 찬 저 정청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렇게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이 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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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2일 오후 2시, 스물네 살의 청년이었던 저는 건국대 조국통일 특별위원장으로 사회과학관 앞 광장에서 도루코 면도칼로 혈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미제축출 조국통일” 

 

"한 민족, 한 핏줄인 남과 북이 언제까지 서로 반목하고 싸우며 지낼 것인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목에 힘주어 말하던 그날 이후 저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낮에는 가발을 쓰고 안경을 쓰고 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고 밤에는 총학생회실 소파에서 책상 위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두세 달 그렇게 못 먹고 못 자니 허리도 아프고 온돌방이 그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부지구 연합집회가 우리 학교에서 열리고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했습니다. 

 

몸을 숨기기 좋다고 생각한 나는 군중 속에 숨어 후배의 자취방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라면도 끓여 먹고 온기를 느끼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학내 프락치도 군중 속에서 나를 미행하기 좋은 조건이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뒤를 밟히고 말았습니다.

 

“이 새끼들. 꼼짝 마!” 

 

십여 명의 건장한 안기부 요원들이 좁은 방을 순식간에 같이 잠을 자던 후배 세 명을 제압하고 이불을 씌웠습니다. 

 

“고개 쳐들면 뒈질 줄 알아. 너 이 새끼 일어나.” 

 

새벽 2시에 벌어진 일이라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주먹이 날아오고 발길질에 배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몸은 어느새 안기부 봉고차에 태워져 있고, 뒤로 꺾인 두 팔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더군요. 대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 고개를 들자 누군가 당수로 제 고개를 쳤고, 그 순간 늘어진 고개를 다시 들 수가 없었습니다. 

 

봉고차가 멈추자, 그들은 제 허리띠를 풀더니 뒷춤을 잡은 채 내리라고 했습니다.

 

“고개 쳐들면 죽을 줄 알아. 앞으로 가.” 

 

네 명이 에워싸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이곳이 호텔인지 모텔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을지로 어디쯤으로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고, 나를 연행한 안기부 요원들 얼굴을 보지 못해 기억이 없습니다.

 

 

방에 도착하니 그들은 제 옷을 벗겼습니다. 팬티만 남긴 채 발가벗기더니, 수돗물을 크게 틀었습니다.

 

“너 배후가 누구야? 조혁이 어딨어?”

 

“모릅니다.”

 

“이 새끼 봐라.”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집단폭행과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피할 곳은 없었습니다. 초라한 몸으로 그 폭행을 감당할 수밖에는요. 눈을 뜨고 맞으면 움츠리며 충격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디서 올지 모르는 폭력 앞에 그저 나동그라져 신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발로 뒤통수를 차면 이마와 코를 박으며 앞쪽으로 날아가 떨어지고, 주먹으로 이마를 때리면 뒤통수를 방바닥에 찧으며 밀려 나가떨어졌습니다. 오른쪽에서 때리면 왼쪽으로, 왼쪽에서 때리면 오른쪽으로 넘어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지지 않은 길은 딱 하나더군요. 아무리 아파도 울지 않는 것, 아무리 두려워도 쓰러지고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때리라고 일어나 앉아 있는 것. 때리고 쓰러지고. 일어나 앉으면 또 때리고... 저는 지지 않으려고 공포스런 밤을 지새웠습니다.

 

서너 시간을 그렇게 맞았을까. 얼굴과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수돗물 쏟아지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 보니 고막은 파열되지 않았나 보다, 생각했을 때 어떤 안기부 놈이 한마디 하더군요.

 

“야! 이 새끼야. 조국 통일도 좋지만 좀 처먹으면서 해라. 몸이 이게 뭐냐?”

 

가뜩이나 깡마른 체격에 수배 생활이라 못 먹고 못 자서 몸이 말이 아니었을 때입니다. 175cm에 체중 52kg, 허리둘레 26인치인 저를 보니 그들이 보기에도 좀 안 돼 보였나 봅니다. 깡마른 청년을 죽지 않을 만큼 때리더니 그들은 폭행을 멈추었습니다. 

 

눈물을 참으며 주섬주섬 옷을 입었고, 그들은 다시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끌고 올 때처럼 허리띠를 뺏더니 네 명이 저를 에워싼 채 봉고차에 태웠습니다. 차는 다시 움직였습니다.

 

온몸이 피멍투성이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어딜 가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한참을 달려 봉고차 안 커튼이 잠시 걷어졌을 때 무거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습니다. 

 

동부경찰서. 우리 학교를 담당하던 동부경찰서 정문이 보였습니다. 저를 실은 봉고차가 덜컹하더니 동부경찰서 정문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동부경찰서 이첩을 앞두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살았다. 경찰 조사는 받겠지만, 죽음 같은 폭행은 이제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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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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