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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1945년 8월 6일의 경우 일본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하는 미지의 ‘신무기’ 앞에 우선은 상황파악을 해야 했다. 트루먼 역시 16시간 후에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1945년 8월 7일이나 늦어도 8월 8일까지는 입장을 정해야 했다. 즉,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건 1945년 8월 15일이다.

 

8월 8일에만 항복 성명을 발표했다면, 두 번째 원자폭탄 투하는 없었다. 아울러 소련군의 참전도 없었다.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이 절박한 순간에 뭘 하고 있었던 걸까?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들은 스즈키 칸타로 총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결기’를 보여줬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이번 내각에서 결말을 지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건 말 뿐이었다. 이틀간 스즈키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그 뒤의 행동은 중요치 않다, 두 번째 원폭, 소련 침공 후의 항복은 아무 의미가 없다).

 

원폭 투하 직후 히로히토 덴노와 내각의 다른 구성원들은 육군과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를 통해 이 폭탄의 ‘성격’과 ‘파괴력’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설명을 들은 이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 이들은 종전에 관한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니, 그럴 경황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이해의 범주 안이다. 그러나 트루먼의 성명 발표 이후에는 여하간 판단을 내렸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임을 보인 건 원폭투하 후 48시간이 지난 8월 8일이었다.

 

이 당시 가장 ‘상식적’이었던 인물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외무장관이 히로히토 덴노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용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벙커 안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있던 히로히토는 그제야 결심이 섰다는 듯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에게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리고는 도고에게 전쟁의 종결을 지시했다.

 

“전쟁은 이제 끝났다. 그런 종류의 무기가 사용된 이상, 전쟁의 계속은 불가능하다.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려고 전쟁종결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좋지 않다. 가능한 한 조속히 전쟁을 끝내기 위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덴노가 결심을 했으니 전쟁은 끝난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쉬운’ 나라가 아니었다. 8월 9일 10시 30분,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戰爭指導會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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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을 6명이 모였다. 당시 이 6명의 면면을 살펴보면,

 

총리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외무장관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 육군장관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해군장관 요나이 미츠마사(米内 光政),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郞),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였다.

 

6인 회의(Big six)라고도 불렸던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戰爭指導會議)는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직후인 1944년 8월에 발족했는데, 이는 천황의 전쟁 자문기구인 군사참의관회의(軍事參議官會議)가 모태가 됐다.

 

이들은 도조가 물러난 뒤 실질적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했는데, 이들이 등장한 시점을 보면 알겠지만 미국에게 승기를 빼앗긴 시점에서 전쟁을 떠안은 그들이었기에 겉으론 결사항전을 말했지만, 속내를 보자면 미국으로부터 좀 더 좋은 항복 조건을 얻어낼 방안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가 바로 ‘소련’이었다(국제정세 파악과 그 해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적확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떨어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했다.

 

포문을 연 건 요나이 미츠마사(米内 光政) 해군장관이었다. 이전부터 종전을 강하게 주장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냉정함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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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항복하여 일본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죽기살기로 계속 싸울 것인가를 결정할 시점이 되었다. 패전의 분함이나 희망적인 관측은 그만두자. 현실에 입각하여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정론이다. 이제 더 이상의 수사(修辭)는 필요 없다. 전쟁을 결정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시간을 더 끌수록 일본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요나이는 한 결 같이 종전을 말했고, 참석자의 대부분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문제는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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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적이 황실의 안태(安泰)를 내세워도 우리는 무조건 항복을 수용할 수 없는 입장이다(중략)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한 마당에 승산은 희박하다. 그러나 일본 민족의 명예를 위하여 계속 싸우다 보면 어떻게든 기회가 올 것이다. (중략) 죽음으로써 활로를 찾는 전법으로 나간다면 완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국을 호전시킬 공산도 있다.”

 

이 정도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역사는 아나미 고레치카의 ‘신념’을 비웃었다. 아니, 미국이 비웃었다고 해야 할까? 아나미가 한참 결사항전을 말하던 그때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회의는 휴정됐고, 오후에 다시 속개된 회의에서도 아나미는 결사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 하루 나가사키에서만 죽은 이가 7만이다(통계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아나미는 결사항전을 말했다.

 

최고전쟁지도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고, 결국 그날 밤 11시 40분에 어전회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 어전회의의 주제는 도고 시게노리가 내놓은 ‘종전 안(갑안)’과 아나미 고레치카가 내놓은 ‘조건부 종전 안(을안)’을 놓고, 선택을 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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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전회의(御前会議)

 

먼저 도고 시게노리의 갑안을 보자면,

 

“일본의 국체유지를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단순한 내용이다. 그대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아나미가 내놓은 을안이었다. ‘을안’에는 꽤 긴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첫째, 국체유지는 물론이고 그 외에 점령지역을 최소 범위로 할 것.

둘째, 무장해제를 일본에게 맡길 것.

셋째, 전범처리도 일본 측이 일임할 것.

 

종전 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고압적이지 않은가? 아니, 포츠담 선언을 거부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무리한 요구였다. 아나미는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속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적의 본토 상륙을 기다렸다가 일대 타격을 가한 뒤, 호조건을 가지고 평화교섭에 임해야 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발언이다. 이 날 오전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걸 아나미는 잊고 있었던 걸까? 문제는 이런 아나미의 주장에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와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가 찬성 의사를 보였다는 거다.

 

이들은 일본 국민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작정이었던 걸까? 다행인 건 당시 일본에도 상식이 있는 인물이 있었다는 거다. 어전회의 직전, 요나이 해군장관은 아나미가 이렇게 나올 걸 예측하고 스즈키 총리에게 ‘묘수’를 하나 알려준다.

 

“결코 다수결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덴노의 의견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덴노의 성단(聖斷)에 따라서 회의의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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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영화 ‘일본 패망 하루 전’에 자세히 묘사 돼 있다(원작인 ‘일본의 가장 긴 하루’, 1967년 작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스즈키 총리 역의 야마자키 츠토무의 연기가 밀도 있게 표현돼 있다). 스즈키는 요나이의 말에 따라 덴노에게 나아가 성단을 요구했다. 이윽고 4년 전쟁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히로히토 덴노의 입이 열린다.

 

『그러면 나의 의견을 밝히겠다. 나는 외무장관의 의견에 찬성한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해군이 밝힌 계획과 현재의 결과는 다르지 않은가. 지금도 육해군은 승산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걱정이 앞선다. 얼마 전 참모총장으로부터 해안선 방비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시종무관을 현지에 보내서 그에 대하여 조사하도록 했다. 시종무관이 조사한 바는 참모총장의 보고내용과 달랐다. 방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참모총장은 사단장비가 완비되어 있다고 했으나 병사들에게는 총검도 지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본토결전을 돌입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일본 민족이 모두 죽어버리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일본이라는 국가를 자손에게 물려주겠는가. 나의 임무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을 자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제는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게 하여, 그들이 장래에 다시 일어서서 일본을 자손에게 물려주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대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물론 충용한 군대의 무장해제나 전쟁책임자의 처벌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고통을 참아야 할 시기다. 나는 삼국간섭 때의 메이지 덴노의 심경을 헤아리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참으로 힘든 일이지만, 나는 전쟁을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덴노의 결단이 내려졌다. 1941년 12월 8일에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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