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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젊은 유명 논객이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시쳇말로 매장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 한 그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소송에 임하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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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폭력' 폭로 사건 소송에 임하는 간략한 입장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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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즘 전반이 주창하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찬성한다. 성범죄에 관한 한, 우리는 법정에서 가해자가 '딸 같아서', '격려의 뜻에서’ '의도치 않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변명하고 법정이 가해자의 '선의'를 존중해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가해자 중심주의'를 숱하게 목격해 왔다.


양성 간에 발생하는 권력의 불균형을 추인하는 공권력의 행태, 그리고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현실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페미니즘과 진보진영이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만 하는 당연한 기준일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가 종종 오용되어 왔으며 때로는 악의적으로 남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고 해서 음주와 운전에 반대할 순 없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찬성한다. 하지만 역시 음주운전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태도나 입장을 뜻한다. 피해자임을 자칭하는 이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에 우선하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가령 철수가 영희의 신체를 허락 없이 만졌다는 분명한 사실이 존재하고 당사자와 다수가 그것을 인정할(수밖에 없을) 때, 영희의 입장을 기준으로 철수의 가해성 여부를 판단하는 게 피해자 중심주의다. 또한 여기에는 철수의 행위가 성희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음에 대한 일반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물론 다리를 만진 것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철수의 의도와 상관없이 영희가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면 철수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마나 한, 원론적인 얘기다.


입증되지 않은 주장을 사실로 간주하거나, 심증으로 굳히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선(先) 발언자 중심주의' 정도가 될 텐데, 마녀사냥으로 이어지는 중세의 밀고 시스템과 큰 차이가 없다. 밀고의 대상이 된 사람은 운이 좋으면 무죄 방면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그 전에 고문대에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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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논객이 '이유야 어쨌든 신체적 약자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라는 자성의 입장을 표명한 것을 일방적 폭력 행위의 자백으로 간주하고 그를 신나게 두들겨 팬 자/타칭 진보 지식인들의 태도가 과연 충분히 지성적이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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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성 간 갈등과 폭력에 있어 약자의 폭로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의 부작용을 지켜봐 왔음에도 결국 찬성한다.


폭로라는 방식은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소명할 공간을 비좁게 한다. 하지만 사법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또 두 사람의 관계 내에서든 피해자에게 불리한 환경이 강요되었다면 사후 폭로는 피해자가 정의에 호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폭로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야만적이었던 80~90년대, 영화판에서는 촬영장에서 여배우에게 약속에도 없는 수위 높은 노출 신을 강요하는 일이 횡행했다. 염정아는 <테러리스트>에서 감독과 은밀히 공모한 유오성의 잭나이프에 속옷이 잘려 가슴이 노출되는 일을 당했다. 영화 <길소뜸> 개봉 전까지 하이틴 스타였던 이상아는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스텝의 협박에 의해 강제로 옷을 벗었다. 그때 그녀는 미성년자였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는 버젓이 흥행했다. 심지어 이상의 범죄 행위는 세간에서 재미난 촬영 비화 정도로 소비되었다.


훗날 두 배우는 방송에 나와 당시의 노출이 자의는커녕 강제에 의한 피해였음을 밝히는 것으로 시청자들의 인정에 호소해야 했다. 벗긴 감독보다 벗겨진 피해자가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억울함은 덤이다. 두 배우에게 남겨진 방법이 폭로-폭로라기보다는 서글픈 후일담 수준이지만-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사실을 밝힐 있는 자유라도 주어진 게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폭로는 피해자에게 남겨진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지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소명할 기회 역시 동일한 가치로 인정받아야 한다. 폭로라는 방식의 특성상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진보를 자처한다면, 더군다나 논객이나 평론가로 활동한다면 폭로의 대상이 된 사람의 자기 변호에도 귀를 열어두는 게 인간에 대한 예의다.


폭로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공정함을 위한 장치임을 감안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한 이슈에 대해서도 공정함은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장치는 손쉬운 테러의 수단이 된다. 폭로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곧 테러리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무혈 테러, 내지는 명예살인의 도구로 남용될 소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해당 논객이 연루된 사건에 국한해 볼 때, 폭로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인격 폭행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은 다름 아닌 진보진영 내에서 조성됐다. 폭로자의 일방적 주장과 폭로 대상자의 개인적 반성이 근거의 전부인 상황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고일어나 일제히 당사자를 비난해대는 모습은 흡사 마른 벌판의 들불과도 같은 장관이었다.


많은 논객이나 평론가들은 그의 이름만 거론하지 않았을 뿐, 해당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뻔한 상황을 가정해 폭력은 나쁘다는 식의 원론적인 논평을 쏟아냈다. 그들의 근엄하고도 준열한 문장의 행간에 물들어오니 때맞춰 노 젓기를 마다하지 않는 바지런한 뱃사공의 모습이 연상된 게 나만의 착시이길 바란다.


폭력사건을 저질러 여론의 출장정지처분을 받은 후 마이너리그로 강등된 어떤 여성 논객의 경우는 특히 비범하다. 그녀는 마침 이 기사의 주인공이 화형대에 올라간 바로 그때 자신이 남성에게 당했다는 비슷한 사례를 풀어 일간지 재입성에 성공했다. 폭력사건으로 온 세상이 그녀를 비난할 때 누가 홀로 장판파를 지켰는지 생각해보면 실소를 머금을 일이다. 내가 텔레파시 능력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그저 절묘한 타이밍이 만들어 낸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보일 만큼 기막힌 우연의 공교로움에 나의 안면근육이 실소를 범하고 말았다는 것으로 내 입장을 정리하겠다.


어떤 상황에 어떤 의견을 낼 지는 각자의 자유다. 진보진영에 속한 상당수가 천부적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런 그들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을 폭로 대상자의 권리는 얼마나 존중했는가?



3


폭로의 대상자가 된 젊은 논객의 입장, 자신은 진실로 억울하다는 그의 주장을 기정사실화 하자는 게 아니다. 폭행은 쌍방이었으며 자신이 더 많은 피해를 받았다는 그의 입장이 진실일지는 간단히 말해 '반반'이다. 옳거나, 틀리거나. 물론 최초 폭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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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주장의 사실성 여부는 판단 보류의 영역이다. 그런데 숱한 진보 문필가들은 어떤 근거로 그리도 민첩한 판단을 내렸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글 한 줄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억울함이 만약 진실로 입증될 경우, 그 치열한 비폭력주의자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신체적 약자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의 도덕적 관대함을 존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후 사정을 상관치 않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당사자의 글은 쓰여서도 읽혀져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 윤리적 교조주의 역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해당 논객의 인품과 도덕성에 하등의 관심이 없다. 폭로 대상자 개인을 옹호할 마음도 이유도 없다. 이 기사에서 내가 옹호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응당 누렸어야 할 기회와 권리다. 그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부여되어야 할 것들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아시다시피, 그는 진보진영 내에서(언론사까지 포함하여) 철저히 소외되었다.


한국 사회의 지형지물에 따라 <진보 지식인>의 범주에 든 이들이 아니라, 진보 지식이라는 그 정의에 오롯이 부합하는 이들이라면, 뉘집 엄마가 마녀로 지목된 상황에서 돌멩이를 들기에 앞서 투석의 이유를 먼저 고민할 것이다.


매장당한 논객이 무덤에서 탈출하려 소명을 개시한 직후, 많은 ‘진보 논객’들이 응원의 목소리를 내며 그의 주변을 서성대고 있다. 그 중엔 폭로자의 주장에 따라 그, 혹은 그를 가정했음이 틀림없는 가상의 캐릭터를 가차 없이 성토한 이들도 여럿 보인다. ‘진보’하고 싶은가? 진보는 언변을 좌판에 깔아놓은 시장통이 아니라 소정의 가치여야 한다.


인간답게 살자.



P.S

이 기사는 딴지일보의 입장과 무관하다. 욕 들을 준비는 됐으니 아래 댓글란을 마음껏 활용하시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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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