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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3.금요일

 

에버프리

 

 


1. 들어가기에 앞서

 

 

 

 

 

엘지와 기아는 라이벌일까 아닐까?
아마 양 팀을 응원하는 골수팬들 입장에서는 "에라 씨바~ 꼴쥐(꼴아) 따위가 무슨 라이벌이냐.. 개념 밥말아 드신거임?" 이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말도 안되게 엄청나게 벌어진 성적 때문에 기아팬들 입장에서는 엘지가 라이벌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엘지와 기아를 라이벌었다고 보는 시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대체 왜?
엘지와 두산처럼 같은 구장을 쓰며 오랫동안 아웅다웅해온 관계도 아니다.
해태와 롯데처럼 모기업이 동종 업계를 양분한 경쟁 관계도 아니며 , 영호남 지역 대결의 구도를 갖춘 것도 아니다.

 

 

 

 

 


아.. 씨바 아닌가? 해태가 전자사업에 뛰어들면서

 

 

"우리의 목표는 엘지다" 라는 모토아래

 

 

의도적인 라이벌 구도 형성이었을 수도??

 

 

 

 

 

어쨌든 엘지와 기아는 특별히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만한 환경적 요인을 갖지 못한 관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요즘에야 많이 희석됐지만 90년대만 하더라도 엘지와 해태가 붙은 잠실구장은 전쟁 그 이상이었다.
분명 라이벌 중 라이벌이었고, 프로야구 흥행의 큼지막한 요소였다.
그러나 사실 이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이 80년도 프로야구 초창기부터는 아니었다.
해태가 한국시리즈에서 엘지의 전신인 MBC와 격돌하며 우승을 거머쥐었던 83년도 이후부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진 않다.
유난히 스타급 선수들이 많았던 MBC였지만 사실 83년도 준우승 이후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해태는 80년대를 정복해버린 최강자였으니 앞서 얘기한 동종 업계의 경쟁 관계나 지역 대결 구도 등의 외부적 환경 요소가 미약한 상황에서 라이벌 의식이 발생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실 당시의 라이벌 구도는 해태와 롯데 혹은 해태와 삼성, 더 확장한다면 롯데와 삼성이 이루고 있었으며 MBC는 사실 이런 구도에 빠져있었다고 보면 맞다.

 

 

 

 

 

해태와 롯데야 뭐 두말할 필요도 없는 업계의 넘버 원투를 다툰 제과계 최고 경쟁 관계 였으며 영호남 야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으니 라이벌 의식이 안생기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거기에 83년과 84년 차례로 두 팀이 우승하며 라이벌 의식은 더 증폭되어 갔고, 선동렬과 최동원의 최고 투수의 자존심 싸움도 불을 더 지피고 있었다.

 

 

 

 

 

그 옛날 80년대 코찔찔이 시절 해태를 응원하던 친구와 롯데를 응원하는 친구의 치열했던 신경전을 기억하시는가.
맛동산을 강요하는 해태팬 친구와 산도를 강요하는 롯데팬 친구 사이에서 "왜 MBC는 과자를 안만드는지 몰라" 라며 오리온 고래밥을 씹던 때가 엊그제 같다.

 

 

 

 

 

해태와 삼성도 역시 영호남 대결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항상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며 항상 우승후보로 꼽히던 삼성이 매번 해태에 덜미를 잡히며 갖게 된 콤플렉스 또한 라이벌 의식을 부추기기도 했다.

 

 

 

 

 

 

 

물고 물리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세팀의 대표 투수들...

 

 

 

 

 

이렇듯 라이벌 구도가 세 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상황에서도 해태는 최강자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83,84년,85년 이 세 팀은 사이좋게 우승을 차지한다. (85년도 삼성의 우승은 전후기 리그 통합우승)
앞으로 이 세 팀이 물고 물리는 라이벌 구도가 고착화 되겠다 싶을 무렵, 선동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해태 독재(?)의 시대를 열어 제낀다.
이후 해태는 86년부터 89년까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롯데나 삼성과의 라이벌 구도 역시 점점 옅어져 갔다. 게다가 신흥 강자로 떠오른 빙그레까지 참전 선언을 하며 확고했던 라이벌 구도가 혼탁한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러던 와중에 MBC를 인수한 엘지가 창단 첫해 우승을 차지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영원히 우승할 것만 같았던 해태가 5연패 도전에 실패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83년도 준우승 말고는 변변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약체팀 MBC가 옷한번 갈아입었기로 서니 단번에 신흥 강자로 떠오르리라고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년 강팀의 면모를 유지하면서 해태에 도전하다 물먹은 빙그레와 삼성 입장에서는 망연자실할 뿐이었고, 해태도 90년 엘지의 우승에 상당한 충격을 먹었다.

 

 


90년 우승 직후 세제 CF에 출연한 김재박 전 엘지트윈스 감독
럭키금성이 박한 유니폼이 이채롭다. 당시 럭키금성 그룹은 야구단의
성공으로 인해 그룹명까지 바꿀 정도로 야구에 대한 큰 애착을 보여 왔다.

 

 

 

 

 

그러나 아직 엘지와 해태가 본격적인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기습 우승을 차지한 엘지는 91년, 92년도에 다시 예전 MBC모드로 회귀했고 절치부심한 해태는 91년도와 93년도에 다시 우승하며 최강자임을 입증했다.

 

 

더구나 염종석을 앞세운 롯데는 92년도에 플레이오프에서 해태를 누르며 한국시리즈까지 먹어버렸고, 꾸준하게 강팀이었던 삼성은 박충식의 15이닝 완투로 기억되는 93년도 한국시리즈를 해태와 명승부로 이끌어 내며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며 해태의 라이벌은 이 두 팀임을 입증하려 했다.

 

 

 

 

 

본격적인 엘지와 해태의 라이벌 구도는 94년부터 시작됐다.
92년 백인천의 중도사퇴로 엘지 감독 자리에 앉은 이광환은 한국야구에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엘지라는 팀을 최강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기존 해태 전성기 시절의 야구는 혼의 야구, 조직력의 야구, 강한 카리스마의 야구로 설명할 수 있었으나 이광환 시절의 엘지 야구는 사뭇 달랐다.
훗날 신바람 야구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이때 당시의 엘지 야구는 자유분방함을 바탕으로  잘생긴 젊은 선수들이 마음껏 뛰고, 마음껏 치며 야구를 즐기는 자율 야구를 표방했다. 더구나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은 서태지로 대변되는 X세대가 등장한 시절이었다.

 

 

그런 90년대 중반의 시대적 상황과 엘지 야구의 스타일이 절묘하게 맞물려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사실 현재 엘지팬들의 상당수가 그 시절 유입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거기에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한팀 시즌 최다승 경신) , 이젠 해태의 시대가 아니라 엘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엘레발들이 여기저기서 창궐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역 구도나 모기업의 경쟁 관계 같은 클래식한 라이벌 형성 요건이 아닌, 상반된 야구 스타일의 정면충돌로 생겨난 순수한 라이벌 구도였다.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이미 수많은 팬들을 확보한 해태와, 엘지의 야구에 매료되어 새롭게 유입된 엘지팬들의 빅뱅은 고스란히 잠실 매치의 전운으로 이어졌고, 이때의 기억은 아직도 엘지와 기아가 라이벌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엘지는 해태가 주춤했던 95년도에도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하며 강자의 면모를 이어갔고, 해태 역시 이종범이라는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를 필두로 전열을 정비하고 96년도에 챔피언을 재탈환 하며 양팀의 라이벌 구도를 더욱 견고하게 해나갔다.  결국 97년도 한국시리즈에서 양팀은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을 펼친다.
97년도는 해태와 엘지의 라이벌 구도가 최정점을 찍었던 한해였다. 페넌트레이스에서도 유난히 명승부를 많이 펼쳤고, 정규시즌에서 10승 8패로 유일하게 해태에게 상대전적에서 앞선 엘지와의 맞대결이었던 만큼 사상 최대의 전쟁같은 한국시리즈를 예상했었다.
(엘지 킬러 조계현과의 첫대결에서 4타수 4안타를 친 이병규가 인터뷰 중 "선배님들이 보다 좋은 공을 던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싸가지 멘트를 날린 이후 해태팬들의 감정을 건드린 이후 더 심해졌고", 김응용 감독 참외 폭탄 테러사건도 엘지와의 잠실경기에서 였다.
그만큼 경기 외적인 요소에서도 양 팀의 라이벌 의식은 점입가경이었다
.)

 

 

 

 

 

그러나 예상 외로 해태가 다소 싱거운 승리를 (4승 1패) 거두며 당대 최고 라이벌전은 끝이 났다. 고 김상진이 5차전을 완투로 장식하며 끝난 이 한국시리즈는 해태라는 이름을 달고 우승한 마지막 해였으며 그 이후 12년동안 우승을 하지 못하는 암흑기로 접어든다.

 

 


올해 기아의 우승이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끝나는 바람에, 주축 투수가 마지막 위닝샷을 던지고 포수와 얼싸안는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결국 타이거즈 마지막 한국시리즈 위닝샷의 주인공은 아직까지 고 김상진이다. 그의 씩씩한 속구가 오늘 따라 너무 보고 싶다

 

 

 

 

 

엘지도 97년도 빅뱅 이후에 98년과 02년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이미 그 화려했던 90년대 중반의 위용은 점차 쇠락하였고, 이젠 약팀의 아이콘으로 내몰린 처지이다.

 

 

 

 

 

이런 연유로 당시의 짧았던 엘지와 해태의 라이벌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만 분명 한국야구에 있어 이 두 팀간의 관계는 신선한 자극제였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해보려한다.
앙숙이었을 것만 같았던 이 두 팀은 사실 경기장외에서는 그 어느 팀들보다도 활발한 교류를 하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활발한 교류를 하면 사이가 좀 좋아져야 하는데 결국 이 교류들로 인해 팬들의 적개심은 점점 더 커져갔던 아이러니들이 있다.
이른바 조공 트레이드...
물론 타팀들의 트레이드 소사를 살펴보면 그쪽도 기가 막힌 얘기들이 많이 있지만 엘지와 기아는 유독 회자될만한 트레이드들이 많았다.
자자... 기아팬이신 독자제위들... 벌써부터 김상현 떠올리며 므흣해하시는 장면 눈에 선하지만 좀 있다 얘기하자. 김상현 얘기 빠지면 재미없지 않겠나..  그래도 그간 엘지와 기아가 뭔 짓거리들을 했는지는 먼저 살펴보고 하자...

 

 


2. 엘지의 가려운 등을 긁어준 효자손 해태

 

 

 

 

 

엘지의 전신 MBC와 기아의 전신 해태는 83년 유승안과 현금을 맞바꾼 트레이드부터 선수 교류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유승안은 백인천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쏠쏠한 공격력을 지니고도 MBC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해태로 내쫓기듯 자리를 옮기는데, 해태에서도 마찬가지로 김무종이라는 재일교포출신 포수의 큰 산을 넘지 못하고 방황하다 빙그레의 창단에 맞추어 고향팀으로 옮겨간다. 빙그레에서 장종훈의 등장 전까지 줄곧 4번을 치며 맹활약을 하던 유승안임을 감안할 때 MBC는 처음부터 해태에게 좋은 선물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벌어지게 될 해태의 엘지와의 트레이드 잔혹사의 시발점이라고 보기에는 비약일지 몰라도 어쨌든 좋은 기억으로 출발한 것은 아닌 셈이 됐다.

 

 

 

 

 

이후 MBC는 해태와의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고 엘지로 인수되었으며 옷을 갈아입자마자 해태로부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된다.
유승안을 현금 받고 내주었던 83년과는 반대로 똘똘한 우완투수가 모자랐던 엘지는 현금을 주고 해태로부터 차동철이라는 오른손 정통파 투수를 영입한다. 차동철은 사실 쟁쟁한 해태투수들에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한 투수였지만 86년도에 입단하여 3년연속 100이닝 이상을 소화하고 10승을 두 번이나 찍은 아주 쏠쏠한 투수였다. 그러나 트레이드 되기 직전 마지막 해인 89년에 부상 등으로 상당히 부진했었고, 넉넉치 않은 구단 사정등으로 인해 알토란같은 활약을 하던 차동철을 엘지로 양도하고 말았다.
그러나 해태에게 그리 배아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차동철은 해태시절의 좋았던 공을 전혀 뿌리지 못했고 난타당하기 일쑤였으며, 트레이드되었던 90년부터 92년까지 3년간 총 80이닝밖에 등판하지 못하며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선수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차동철은 이광환 감독을 만난이후 해태시절 좋았던 때보다 훨씬 더 팬들에게 각인되는 반전을 이루어낸다.
이광환 감독은 현재 한국  야구에서도 대세인 투수분업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감독이다. 이 과정에서 차동철에게 미들맨의 역할이 주어졌고, 93년부터 부쩍 차동철의 등판횟수는 늘어났다. 93년 평균자책점 3.20 5승 4패 4세이브로 부활하여 엘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공을 세우더니 94년에는 총 34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2.59 2승 5패 7세이브로 불펜의 기둥 투수로 거듭났다. 이때만해도 중간계투요원에게 주어지는 홀드가 집계되지 않아서 그렇지 홀드 개수도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차동철은 이광환 감독의 투수분업화 정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고, 강봉수와 더불어 불펜 에이스로서의 역할은 물론 클로저 김용수의 보좌역할까지 완벽하게 해내며 엘지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사실 이 시기에 해태팬들이 차동철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리 처참하진 않았다. 차동철이야 원체 기라성같은 해태투수들 사이에서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여전히 해태는 투수 왕국이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엘지로 옮긴 이후에도 한참 있다가 부활한 경우라 장이 꼬이는 경험을 차동철에게서 겪진 않았다. 문제는 93년도에 있었던 역사에 길이 남을 한대화-김상훈  트레이드였다. 이 역사적인 트레이드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양 팀팬들 사이에서도 술안주거리가 될 정도로 당시로써는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한대화가 누구인가.

 

 

 

 

 

비록 OB에서 트레이드되어온 대전 출신의 선수였지만 해태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해태에는 유독 김씨성을 가진 타자들이 득실득실했다. 김성한, 김종모, 김일권, 김봉연, 김준한 등등의 김씨성을 가진 호남출신의 거물들 사이에서 출신 지역도 다른 한대화가 해태타선의 중심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단순한 이유다. 실력~~
해결사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그의 클러칭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꼭 극적인 순간에는 한대화의 타점이 존재했다), 한대화가 있는 타선과 없는 타선은 아무리 스타선수들이 즐비한 해태타선이었지만 확연하게 달랐다. 결국 마운드에서는 선동렬이, 타석에서는 한대화가 이끌어나가는 팀이 해태였던 것이다.

 

 

 

 

 

김상훈은 또 어떤가..
MBC를 포함한 팀 역사상 두번째 타격왕을 차지한 실력은 물론이요, 서글서글한 외모로 많은 팬들을 몰고 다닌 명실상부한 "미스터 엘지"가 김상훈이었다.

 

 

 

 

"지금 투수의 선택은 직구 아니면 변화구입니다"
요즘 뻘어록 만드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미스터 엘지 출신
김상훈 스브스 해설위원

 

 

 

 

 

이런 거물급 선수들의 트레이드는 양 팀팬들 모두를 아노미상태에 빠뜨렸다.
아마 당시에 인터넷이 활성화되었다면 양 팀 홈페이지는 물론, 웬만한 포털사이트의 서버는 폭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양 팀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트레이드였다.
트레이드 될 때만해도 한대화의 노쇠화 현상은 두드러졌었다. 사실 한대화가 타율이 높은 유형의 타자는 아니었지만 92년, 93년 2년 연속 0.260대를 기록한 것이 심상치 않은 기류였다. 또한 못쳐도 70타점이상은 기록하던 선수가 93년도에 46타점을 기록하며 “이제 한 대화의 시대는 물건너 가는 것인가”라는 쑤군거림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종범과 홍현우 등 걸출한 젊은 내야수들이 치고 올라오는 통에 한대화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었다.

 

 

 

 

 

김상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위픽으로 입단하지는 않았지만 스프링캠프를 통해 유연한 수비와 빼어난 타격솜씨를 보여준 서용빈이라는 신인을 이광환은 주전 1루수로 낙점해놓은 상태였다.
더구나 김상훈이 비록 훌륭한 타자였다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순 없었지만 4번타자가 지녀야할 파괴력이나 클러칭 능력은 항상 모자란 느낌이 있다는 주변의 평도 무시하기 어려운 의견이었다.

 

 

 

 

 

결국 양 팀은 야구계가 깜짝 놀라 자빠질만한 빅딜을 성사시켰다.
해태는 노쇠화 기미를 보이고 있는 한대화를 보내고 김상훈을 영입함으로써 우타일색이던 타선에 탑클래스 왼손타자를 보강하려던 복안이었을 것이고, 엘지 입장에서는 한대화의 해결 본능이 필요했고, 송구홍의 부상으로 생긴 3루 공백도 메꾸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결과는 얘기 안해도 잘들 아실 것이다.
엘지 대박, 해태 쪽박...

 

 

 

 

 

엘지는 2009년 페타지니 이전까지 가장 강력했던 4번타자를 얻었고, 그 해 우승까지 차지하는 엄청난 트레이드 효과를 얻어냈다.
아직도 엘지팬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역대 4번타자로 한대화를 꼽곤 한다.
94년 마지막 우승의 여운도 여운이지만, 한대화 이후로 우타 빅뱃을 한번도 보유하지 못한 슬픈 팀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겠다.

 

 

 

 

 

한대화는 역시 우승 청부사다운 활약을 해냈다.
94년 한 대화는 총 106경기에 나와 타율 0.297 홈런 10개 타점 67개를 수확하며 완벽하게 부활했다. 사실 한대화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모자라는 스탯일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클러칭 능력은 엘지에 와서도 여전했다. 신인 3인방이 정신없이 달리고 치는 역할을 했다면 한 대화는 팀의 중심에서 위압감을 발산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게다가 젊은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팀라인업에서 자칫 방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팀 분위기를 잡아줄 수 있는 왕고참의 역할까지 해낸다. 훗날 이상훈의 증언을 들어보면 한대화가 얼마나 카리스마있는 선배였는지 알 수 있다.

 

 

 

 

 

반면 김상훈의 경우는 사실 처참한 수준이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야구하며 "미스터 엘지"로 대우받던 김상훈은 규율이 엄격한 해태의 팀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김상훈은 트레이드 경험이 처음이었다. 한대화가 오랫동안 해태에서 활약했지만 그는 이미 OB시절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한번 겪었던 적이 있어, 김상훈 만큼 큰 데미지를 먹진 않았을 것이다.

 

 

 

 

 

 
전성기 시절의 한대화 한화 감독
 한대화는 OB가 서울로 연고지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해태로 트레이드 통보를 받고 난 이후 고향팀을 떠나지 않겠다며 대전에서 잠적한 사실도 있다. 또한 해태팬들에게는 섭섭한 얘기겠지만 한대화는 해태시절에도 김응용 감독에게 고향팀 빙그레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심심치 않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올해 한대화는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고향팀으로 돌아왔다. 한대화의 지극한 수구지심이 통한 것일까?

 

 

 

 

 

어쨌든 김상훈은 해태에서 2시즌을 뛰며 0.240대의 평균 타율과 총 35타점을 올리며 은퇴해버리고 만다. 해태로써는 속터질 노릇이었다. 박철우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좌타자가 없어 한대화라는 거물을 내주고 야심차게 데려온 김상훈이 이렇게 맥없이 물러나버리게 되어 전력은 전력대로 손실이었고, 극에 달한 팬들의 원성까지 감당해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선수 대 선수를 바꾼 본격적인 트레이드, 그것도 메가톤급 빅딜이었던 양 팀의 첫 대결은 이렇듯 엘지의 완승, 해태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흐뭇한 엘지팬들의 엔돌핀이 흘러나오면 나올수록 해태팬들의 장꼬임 현상은 심해져만 갔다.

 

 

 

 

 

(사실 이 트레이드에서 한대화-김상훈만 옷을 갈아입은건 아니었다. 엘지는 김상훈과 젊은오른손 거포 이병훈을 같이 보냈고, 해태는 베테랑 왼손 투수 신동수와 국가대표 1루수 출신 신인 허문회를 껴서 보냈다. 이 선수들이 특별한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신동수는 차동철과 마찬가지로 분업화된 엘지의 마운드에서 왼손릴리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선수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 역시 해태팬들의 아픈 이빨과도 같았고...)

 

 


2. 심해져만 가는 호랑이의 조공

 

 

 

 

 

메가톤급 트레이드 이후에도 엘지와 해태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져 가기만 했다. 특히 96년도는 양적인 교류량을 봤을 때도 돈독한(?) 양팀의 관계를 증명했다. 양팀 선수 총 7명이 상대방의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기억에 남는 트레이드만 살펴본다면 조현 <-> 송유석, 동봉철 건과 최훈제 <-> 최향남 건이다.

 

 

 

 

 

우선 조현...
엘지팬들에게 있어 조현의 존재는 단순한 신인급 유망주가 아니었다.
엘지팬들은 2009년 현재까지도 우타거포형 타자에 심각하게 목마름을 호소하고 있다. 역대로 엘지의 주축 타자들은 대부분 왼손 타자들이었고, 그런 덕에 좌타군단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을 정도였다. 솔리드한 왼손타자들이 많다는 것은 분명 큰 장점이긴 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중심을 잡아줄 거포형 오른손 타자가 없다는 것이 때론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했다. 오상민, 강태원류의 B급 왼손투수들에게 하염없이 발리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한없이 엘지를 괴롭혔던 왼손투수 징크스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95년도 신일고 출신 오른손 거포형 조현의 입단은 엘지팬들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한대화가 원포인트릴리프로 그 빈자리를 메꿔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언제까지 노장 한대화에게 의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조현이 그 빈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유망주로 엘지팬들 눈에 들어온 것이다. 사실 왼손거포였던 김재현의 신일고 1년 후배였던 관계로 검증된 신일고표 고졸 신인이라는 기대감도 있었고, 실제로 고교시절 조현의 파워는 엄청났다. 그러나 조현은 결국 기대에 못미치며 초라한 신인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해태 또한 이종범과 홍현우의 활약으로 막강한 타선을 구축하고는 있었어도 한대화 이후 강력한 4번타자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이시기에 그 유명한 이호성이 주로 해태의 4번타자를 맡았었지만 아무래도 중량감이 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지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터지지 않는 조현을 무작정 기다리기도 답답했었고, 차동철과 김용수, 김기범등의 부진과 이상훈의 부상 등으로 투수력에 큰 문제를 드러내며 엘지 무적시대를 열어제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96년도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며 이광환 감독의 중도 경질이라는 사태까지 맞이하게 된다.

 

 

 

 

 

결국 양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조현이라는 전도유망한 거포 유망주와 중간계투의 핵심 송유석, 김재현의 공백을 메꿀 왼손 외야수 동봉철을 맞바꾸게 된다.

 

 

 

 

 

이때 엘지팬들의 원성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아직 2년밖에 지켜보지 못한 젊은 거포 유망주를 송유석, 동봉철이라는 퇴물과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사실 프로야구판에서 이런 트레이드는 잘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메이저리그에서처럼 팀이 많아서 유망주들의 부메랑 효과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이면 모를까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유망주를 꼴랑 8개팀이 경쟁하는 리그에서 한계가 명확한 노장선수들과 바꾸는 트레이드는 두고두고 후회할일로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엘지는 이런 파동을 한번 겪은 바 있다. OB에게 김상호라는 젊은 우타 거포를 내주고 최일언이라는 하향세 투수를 받아오며 결국 OB의 두 번째 우승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전적이 있어 조현 트레이드는 그만큼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가 봐도 해태가 큰 이득을 볼 것이라는 이 트레이드에서도 해태는 제대로 물을 먹었다. 조현은 결국 자신의 치명적인 단점이었던 나약한 멘탈을 극복하지 못하고 해태에서 있는 2년 동안 2할이 채 돼지도 않는 타율을 기록한 뒤 한화로 쫓겨나고, 한화에서도 단 6경기만을 출장한 채 은퇴해버리고 만다.

 

 

 

 

 

반면 엘지는 두 베테랑 선수들을 적시적소에 쏠쏠하게 써먹으며 97, 98 두 시즌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밑거름을 만든다.

 

 

 

 

 

송유석은 그의 별명답게 엘지에 와서도 마당쇠 역할을 믿음직하게 해내며 차명석, 최창호 등과 상대적으로 허약했던 불펜을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투창선수 출신이었던 송유석은 해태 불펜의 핵심이었다.
물론 엘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공격적이고도 듬직한 포스가 그리워진다.

 

 

 

 

 

동봉철도 2번타자와 좌익수를 보며 부상으로 빠진 김재현의 공백을 훌륭하게 메꾸어주며 97년 준우승에 일조한다. 그러나 같은 해에 있었던 최향남 조공 사태를 생각한다면 이 트레이드는 솔직히 애교 수준이었다.
선동렬이 96시즌부터 일본으로 떠나 없었지만 해태는 당시에도 최강의 투수진을 보유한 팀이었다. 이대진은 리그 최고의 에이스로 성장했고  김상진, 임창용, 이원식 등의 영건들도 급성장했다. 거기에 이강철과 조계현도 건재한 상황에서 최향남같은 투수들이야 얼마든지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팀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최향남의 공을 목격한 사람들의 의견은 달랐다.
최향남의 해태시절 별명은 "불펜의 선동렬"이었다.
96년 트레이드 될 때까지 고향팀에서 거둔 승은 단 1승에 불과했지만 당시 해태 코칭스텝에서 최향남의 불펜피칭을 보고 지어준 별명이 영광스럽게도 국보 선동렬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빼어난 구위를 갖고 있었다는 얘긴데, 문제는 실전에 투입하면 "새가슴"이 작렬하여 자신의 공을 던지질 못했고 결국 공을 들이던 해태 코칭스텝도 트레이드를 통해 공식적으로 최향남 육성을 포기한다.

 

 

 

 

 

 

 

해태시절 새가슴이라 평가받던 최향남이

 

 

"향운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공격적인 투수로 변신하였고,

 

 

무모하다는 얘기를 뒤로하고 메이저리그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당시 해태의 2군 경기까지 꼼꼼히 챙겨보던 골수팬들은 최향남 트레이드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었다. 게다가 박재벌, 박재용이라는 준수한 왼손타자들이 있는 와중에 엘지에서도 주전으로 뛰지 못하고 대타 전문요원이던 최훈제를 데려 온 것에 큰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엘지는 대박을 쳤고, 해태는 또 한번 가슴을 쳤다.
최향남은 트레이드 되자마자 새가슴 논란을 잠재우고 일약 엘지의 에이스노릇을 하며 2년 연속 준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사실 최향남이 엘지에 있는 동안 10승 이상을 딱 한번 기록하며 흔히 얘기하는 에이스의 중량감에는 못미쳤던 것이 사실이나 이상훈의 마무리 전환과 일본 진출, 임선동 파동, 전반적인 투수 노령화 현상 등으로 인해 투수력이 개허접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은 최향남의 활약은 배고픈 자취생이 책상 뒤적거리다 친구가 꼬불쳐둔 만원짜리를 발견한 셈이었다.

 

 

 

 

 

역시 해태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두산으로 또 자리를 옮긴 최훈제... 이 와중에 해태팬들의 입장에서는 최향남의 활약을 보며 또 한번의 장꼬임 현상으로 괴로워해야 했던 건 두말할 나위 없었고...

 

 

 

 

 

이렇듯 엘지와 해태의 90년대 트레이드는 완벽하게 엘지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팬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당했는데도 다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건 여전히 최강자였던 팀의 위상때문이었다.
그깟 트레이드 좀 실패했어도 여전히 해태 선수들은 최고였고, 심각하게 팀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엘지는 서울지역의 우수한 선수들을 싹쓸이 하다시피 하면서 강팀의 기반을 다졌고, 갖추지 못한 몇몇 빈구석들을 해태로부터 수혈 받으며 90년대 중후반 해태의 유일한 라이벌로써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그러나 해태의 조공 트레이드가 여기서 그친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양 팀의 트레이드 승자는 엘지였다. 이때는 솔직히 해태도 여유가 없었다. 모기업이 기아로 바뀌면서 밥먹듯 하던 우승이 뚝 끊어졌고 아예 가을 야구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늘어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레이드가 실패한다면 팀의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데 실제로 기아는 타팀팬들에게 조롱받는 삽질 트레이드를 이시기에 여러 차례 하며 팬들의 자존심을 뭉갤대로 뭉갰다.

 

 

 

 

 

후후~ 그러나 역사는 항상 돌고 돌며 반전을 만들어낸다.
2000년대 양팀의 트레이드 역사는 투비 컨티뉴 하자....

 

 

 

 

 

 

 

 

에버프리(ahj20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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