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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3.금요일


김조광수


 



 


"난 남자가 좋아."


같은 학과 출신인 이성친구에게 고백했던 말이다.


 


1993년. 커밍아웃이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커밍아웃을 할 대상으로 그 친구를 고른 것은 그가 퀴어 영화에 호의적인 평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국내에 개봉하는 퀴어 영화도 많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는 미 개봉 퀴어 영화도 꽤 많이 골라보는 퀴어 매니아였다.


 


그런 이유로 나와도 아주 잘 통했던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하며 살까"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고 잔치가 끝났다는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30년을 이성애자인 척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성애자로 살 수는 없었던, 이제 동성애자임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청년의 고백이었다.


 


사랑의 상대가 아닌 사람에게 "난 남자가 좋아"라고 말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게는 아주 어려운 고백이었다. 고백하리라 마음을 먹고도 몇 달을 망설인 끝에 그 말을 내 뱉고 나서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내 힘든 시간이 다가 왔다. 퀴어 매니아이며 자유분방해 보이던 그는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심리적으로는 정말 너무나 길었던)이 흐른 뒤에 그는 시간을 달라는 말을 했다. 아직은 준비가 안 돼있다고. 내가 사랑을 고백한 것이 아닌데 그는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바보. 멍충이."


 


괜한 고백을 했다는 자책감에 수없이 많이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를 만나지 못하고 지냈던 며칠 간 절망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떨었다. 많이 울기도 했었다. 일주일쯤 지난 뒤 그는 술에 취해 나를 찾아와 나를 안고 울면서 말했다. 두렵고 무서웠다고. 이성(理性)은 동성애를 이해하고 있지만 감정은 그렇지가 않았단다.


 


게다가 누군가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고 당황하는 자신을 보며 또 실망을 했다고. 내가 그에게 고백을 하기 전에 무수히 많이 망설였듯이 그도 힘든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었다.


 


나의 첫 번째 커밍아웃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뭐든지 처음이 힘들고 그 다음은 수월해지듯 나의 커밍아웃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에게 깜짝 놀랄만한 고백을 받은 친구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갔고 10년이 흐른 뒤에는 가족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눈물바다로 시작했지만 나중엔 “그런 줄 알고 있었다”는 쿨한 대화로 변모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 자존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커밍아웃을 준비하라"고 한다. 성소수자들에게는 커밍아웃할 준비를 하라는 주문을, 이성애자들에겐 고백을 들을 준비를 하라고 말이다. 특히 이성애자들에게 "누군가 당신에게 커밍아웃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며 내게도 언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소수자)야" 라고 고백을 해 올 상대 중에 친구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가족 중에도 있을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치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성소수자는 많고 그들이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추세에 있으니 커밍아웃은 이제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협박이 아니다. 준비 없이 듣게 된 고백 때문에 당황하지 말라는 정중한 권유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덧붙이는데, 대체로 커밍아웃을 하는 성소수자들은 상대를 찾을 때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사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을 택하게 된다. 커밍아웃에 실패(거부한다거나 절교를 당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자신에게만 한 은밀한 고백을 다른 이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아우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아주 중요한 점이다. 고백을 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고 있다면 대처하는 것도 쉬울 것이다. 커밍아웃을 무조건 받아주라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커밍아웃을 쉽게 받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를 믿고 있기 때문에 고백하는 것"이라는 상대의 마음을 안다면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질 것 아닌가.


 


수없이 많은 고민 끝에 해오는 고백이다. 게다가 나를 믿는 마음을 갖고 해오는 고백이다. 가능하면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게 좋은 것 아닌가.


 


커밍아웃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일이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누구는 커밍아웃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고 다른 누구는 고백을 듣게 되어 고민이 생기게 되는 일이 되풀이 될 게다.


 


그러니 준비하라. 나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 지금까지 총 여덟 번에 걸쳐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듣지 않아도 될 욕들을 들으면서도 내 글로 인해 동성애를 우호적으로 보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늘어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써왔다. 하지만 오늘로 딴지에 글 쓰는 걸 그만두려고 한다. 내게 동성애 혐오를 보낸 사람들에게 굴복해서는 아니고 글을 잘 못 쓰는 통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원고를 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죽기보다 괴로울 만큼 힘들었다. 내 블로그에 끼적이는 글과는 차원이 다른 일인데 너무 쉽게 시작한 것 같아 반성도 많이 했다. 딴지에 다시 글을 쓰는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글이 없는 딴지가 너무 좋아져서(무엇보다 디자인이 예쁘게 바뀌어 좋다) 아쉽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딴지스 독자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이만 총총히 물러 간다.



 


철없이 사는 영화쟁이
& 커밍아웃한 게이 김조광수 (ceope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