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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 뽕짝이나 클래식, 다 거기서 거기

2004.9.3.금요일
딴따라 딴지


우리나라 음악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어떤 음악은 주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과분한 대접을 받기도 했고 반대로 어떤 음악은 당혹스러울 정도의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귀족 기쁨조들이 담당해왔던 서양 전통음악이나 궁중의 나랏님 기쁨조들이 담당해왔던 조선 전통음악의 경우가 전자의 경우라면 대중들의 기쁨조가 담당한 뽕짝이나 디스코 등은 후자의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뽕짝은 우리 아줌마들, 도시 하층민들의 기쁨조 역할을 오랜 세월 훌륭하게 수행해왔던 음악인데, 헤까닥 뒤집어서 생각해보니 우리 아줌마들과 도시 하층민들이 뽕짝처럼 사회적으로 부당한 푸대접을 받아왔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겠다. 이런.

 

지금이야 뽕짝이 음악적으로 사회적 푸대접을 받고 있다지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처음 전해졌을 때의 뽕짝은 그렇지 않았다. 뽕짝은 당시의 가장 세련되고 쿨한 음악이었으며 문명화되고 개화된 도시생활을 상징하는 음악적 코드였다. 당시의 유학파들, 지금으로 따지자면 최고 상류사회의 인생들이 뽕짝을 사랑했고 서양과 근대를 동경하는 많은 모던 남녀들이 뽕짝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오늘날 뽕짝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이미지였고 현실이었다. 물론 축음기를 사거나 음악다방을 출입할 주변머리가 없었던 당시의 하층민들도 약방 옆에서, 떠돌이 장사꾼들 옆에서 돌아가는 유성기에 귀를 기울이며 뽕짝을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강남에서는 힙합, 강북에서는 록이 득세하는 것처럼 모든 취향은 계급에 따라 다시 나뉘게 마련이다. 아니, 고매하신 혹은 고매해야만 하는 인생들은 하층민, 잡것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취향으로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마련이다. 속으로는 끊임없이 대령 중령 소령은 호텔방에서~, 서울에 올라온 지 석 달 밖에 안 됐슈~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더라도 몸뚱아리는 늘 예술의 전당 객석에 걸쳐두어야 하는 것이다. 졸려 뒤져버릴지라도 말이다.

 

이런 걸 어렵게 말해서 취향의 구별짓기라고 하는데 뽕짝 역시 음악 자체와 무관하게 이러한 구별짓기 과정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지 간에 당시로서는 뽕짝의 등장을 통해 비로소 대중들이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타인과의 공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뽕짝은 당시 음악적 리얼리즘의 최고봉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홍상수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라고 생각했다면 일제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은 조선의 미래다> 라고 생각했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이라는 제국을 적대시했을망정 서구화 혹은 근대화로 나아가던 일본의 문화는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조선의 발전, 조선의 현대화라는 장밋빛 꿈은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꿈이 일본을 경유하지 않아도 될 때부터 혹은 일본을 경유하면 안 되게 되었던 그 때부터 조선의 미래는 다르게 설계되어야 했고, 사람들은 이제 미국은 조선의 미래다 라는 말로 그 공백을 쉽사리 메워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자리가 미국에 의해 대체되면서 뽕짝의 사회적 지위는 더욱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 뽕짝은 현대를 알리는 문화적 이정표가 아니라 조국의 현대화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저질스런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뽕짝과 일본식 창가들이 제거된 미래의 자리에는 미국판 뽕짝과 서구식 전통음악, 색목인 제국주의자들의 역사가 들어섰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등의 음악은 고급이 되었고 뽕짝은 저급이 되었다. 그것이 음악적으로 등급이 매겨진 것은 물론 아니었다. 뽕짝을 사랑했던 하층민들과 아줌마들은 뽕짝과 함께 여전히 사회적으로 저급한 존재로 남겨졌다, 혹은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뽕짝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누군가는 도대체 뽕짝 가수들이 가수왕 후보에 오르고 그렇게 방송에 많이 노출되는 것이 무슨 근거냐!고 방송의 정당성을 논하고 호통을 쳐대지만 뽕짝은 끄떡도 않는다. 뽕짝은 그런 불평과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노래방과 구민회관 강당에서,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중년의 캬바레에서, 그리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관광명승지를 들락날락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여전히 열띤 환호와 함께 울려 퍼지고 있다. 뽕짝을 구리게만 생각하는 이들도 노래방에만 들어가면 뽕짝을 통해 우스워지길 자청하고, 집안 어른의 환갑잔치에서는 우습지도 않은 얼굴로 뽕짝을 노래한다.

 

또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뽕짝이 공식적으로 궁상떠는 음악, 우스꽝스러운 음악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고속버스의 아줌마 댄서들과 함께 말이다. 게다가 뽕짝의 이마에 새겨진 왜색이라는 글자는 그것을 진지하게 대하는 행위 자체를 가로막는다. 록, 힙합이라는 얼굴을 가진 양색이라는 글자는 쿨하게 새겨 넣은 멋진 타투(Tatoo)로 이해되지만 뽕짝이라는 얼굴을 가진 왜색이라는 글자는 그저 구리게 찍혀버린 낙인일 따름이다. 또 사람들은 뽕짝-왜색을 이야기할 때는 민족을 들먹이면서도 서양전통음악-양색을 이야기할 때는 순수를 말한다. 당연히 순수란 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가치기 때문에 상대편을 잡것으로, 불순한 것으로 낙인을 찍어야만 비로소 자신이 순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당근, 뽕짝은 잡것, 불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구린 사연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편견과 맞짱을 뜨고 있는 사람들은 역시나 우리의 하층민들, 아줌마들이다. 물론 이 양반들은 편견과 맞짱을 뜬다고 해도 한 대오에 서서 머리띠를 두르거나 어깨를 거는 대신, 한 자리에 모여서 넥타이를 이마에 두르고 어깨를 들썩이는 등의 방식을 사용한다. 음악은 그저 흥겨운 진동을 반복할 뿐이며 개야 짖든 말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무위자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뽕짝을 유린하고 비난하는 논리는 사실 18~19세기를 지나면서 유럽 땅에서 숙성되고 20세기 벽두에 조선 땅에 상륙한 것이다. 근데 그 내용이란 게 뽕짝식으로 설명하자면 천방지축 오도방정 머리 나쁜 자기 미워미워미워~, 구슬픈 노래 한 가락 뽑으려다 머리만 한 웅큼 뽑혀버린 내 신세 처량하구나, 제일로 멋진 사람 콩나물 대가리 그리는 사람 쿵작쿵작~ 뭐 이런 식이다. 근데 이런 기준 자체가 오늘날에 얼마나 구린 대접을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둘째치고, 과연 뽕짝 가수 가운데는 위와 같은 경우에 부합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일까?




 
 

 

왜 없겠는가. 일제시대의 뽕짝 아뤼스트들은 둘째치고 오늘날의 뽕짝 가수들 가운데에서도 나훈아, 심수봉, 설운도 등은 사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창작자들이자 히트 메이커들이다. 그들은 오도방정이나 천방지축과도 거리가 멀고 지난한 창작의 과정을 경험하였으며 정상의 위치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쉼 없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멀쩡한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온 이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뽕짝에 가해졌던 음악적 비난은 오히려 전통음악을 그대로 답습하고 외워서 연주하기만 하는 음악대학 교수 비슷한 사람들에게 돌려져야 할 것만 같다. 별다른 인생 고민도 없고 창작의 고통도 모르는 일부 철부지 음악가 선생님들 말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뭐 또 요즘처럼 험하고 각박한 시대에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해서 남는 게 뭐가 있겠는가. 저마다 생긴 대로 그저 하루하루 소신껏 살아가는 인생들끼리 말이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이제 사람들도 뽕짝에 대한, 그 개념 없고 잔뜩 비뚤어져 있는 눈빛을 거둘 때가 되었다, 뭐 이런 이야기다.

 

 

 

 


음악만담가 김토일
(449tong@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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