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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이승엽 - 꿈은 물건너가는가?

2003.12.7.일요일
딴지 야구부


 
노모 히데오


노모 히데오. 1995년 200만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태평양 너머 LA다저스에 입단한다. 이로써 그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에 이어 일본인 제2호 메이저리거가 된다.


목돈으로 200만달러라, 얼핏 보면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다. 근데 그걸 빼고 노모가 그해에 받은 순수연봉이 얼만고 하니... 달랑 109,000달러. 당시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으로 규정된 액수가 정확히 109,000달러였으니, 쉽게 말해 목돈 약간 얹어서 받고 최저연봉으로 퉁쳐서 계약해버렸다 이거다.


일본에서 노모가 어떤 선수였더라. 1990년 일본무대에 데뷔하자마자 18승 8패를 올리며 일본 최고 선발투수에게 수여되는 사와무라상을 수상했음은 물론, 초반 4년간에 걸쳐 연평균 17.5승과 269.5탈삼진을 올려대던... 최고투수란 말로는 부족한, 괴물투수 아니었던가. 그런 노모가 팔부상으로 1994년 시즌을 반쯤 공쳐먹더니만, 느닷없이 메이저리그를 가겠답시고 설쳐댔던 거다.


당연히 벤또 싸들고 다니며 말리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지. 그래봤자 동양인은 빅리그에서 안된다는 비관론이 한창 팽배해 있었던데다(마침 1994년 먼저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가 시즌 대부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며 그러한 관점에 기름을 부은 차였다), 돈 문제를 놓고 봐도 일본에 남는 편이 훨씬 높은 수입을 보장할 수 있었으니까. 당시로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 최고투수 노모는 메이저리그 최저대우를 감수하며 태평양을 건넜다. 그 결과는... 그해 메이저리그 올스타전내셔널리그팀 선발투수. (원래는 그렉 매덕스가 내정돼 있었다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랬다). 그해 내셔널리그 탈삼진왕. 또한 내셔널리그 신인왕. 이 휘황찬란한 타이틀을 몽땅 노모 히데오 바로 그가 따내고 만 것이다. 4월에 별 주목을 못 받으며 미국땅을 밟았던 노모는, 시즌이 끝난 후 그야말로 금의환향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할 수 있었다.


노모의 석세스 스토리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이듬해 16승, 그 다음해에도 14승이라는 성적을 올리며 토네이도 열풍을 이어갔던 노모는, 그러나 진출 3년차가 되자 주무기인 포크볼이 빅리그의 난다긴다하는 타자들에게 간파되며 부쩍 고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구질은 그의 팔꿈치에도 무리를 주고 있었다. 결국 1998년 수술과 함께 성적은 추락하고, 시즌도중 뉴욕 메츠로 팀을 옮기는 신세가 되기에 이른다(박찬호가 15승을 올리며 다저스의 에이스급 투수로 급부상했던 바로 그 해다).


그나마 메츠에 정착하기라도 했으면 다행이게. 이후 그는 1년단위로 팀을 옮겨다니는 파란만장한 역정을 자랑하니, 1999년에는 밀워키, 2000년에는 디트로이트, 2001년에는 보스턴의 유니폼을 각각 입어보게 된다. 유니폼 수집에 각별한 취미를 가진 선수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은 그다지 반갑지 않을 거다. 게다가 1998년 280만달러를 받던 그가, 1999년 밀워키와 계약할 때 합의한 연봉액수는 25만달러(!!!)였다. 이쯤되면 일본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해볼 법도 한데, 그는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냥 빅리그에 남았다. 마치, 빅리그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듯이.


주목할 점은, 이 와중에도 그는 연평균 11승씩을 올리며 밥값을 해주었다는 거다. 팔꿈치가 한번 단단히 상했던 탓에 예전만큼 폭발적인 구위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노련미를 바탕으로 선발로테이션의 한 축을 단단히 맡아줄만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연봉은, 2001년 450만달러로 다시금 수직상승해 있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노모는 다시 다저스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그동안 그는 해마다 16승씩을 꼬박꼬박 올려냈으며, 특히 올해에는 두차례의 완봉승도 포함시키며 에이스 케빈 브라운 못지않은 활약을 해주었다. 실로 만만찮은 풍상을 겪으며 질기디질기게 이어온 9시즌에 걸친 선수생활동안, 그는 통산 114승과 1802탈삼진을 올렸으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4번째로 양대리그에서 모두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대선수가 된 거다.


노모의 활약은 오늘날 수많은 일본출신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대활약하게끔 만든 기반을 닦았다는 면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아울러, 선수생활 유지가 위태로울 정도의 역경과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오로지 무서운 집념과 실력으로 극복해냄으로써 팬들이 열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이승엽


이승엽. 2003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노라고 선언했었다. 성공했다면 그는 2000년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던 이상훈에 이어 한국프로야구 출신 제2호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되었겠지만(한국프로야구도 모자라 굳이 한국인이란 단서를 재차 다는 까닭은, 조 스트롱이나 훌리오 프랑코도 어쨌거나 한국프로야구 출신이기 때문이다. 쩝...), 요 며칠새 들려오는 소식들을 놓고 보면 그 꿈은 거지반 물건너간 모양이다.


들리는 말로는 시애틀 매리너스는 계약금 150만달러에 연봉 30만달러, LA 다저스는 계약금 포함 3년간 300만달러를 제시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현재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이 바로 30만달러다. 더구나, 주전보장은 커녕 마이너리그부터 밟고 올라오라는 소리까지 들었단다(나중에 다저스는 액수도 좀 올리고 빅리그 25인 로스터 포함도 보장했었다고 하지만). 설상가상, 일본프로 출신으로 역시 빅리그 진출을 선언했던 마쓰이 가즈오가 3년간 2,300만달러로 뉴욕 메츠에 입단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 판국이다.


이승엽이 어떤 선수냐. 올시즌 56홈런을 작성(좀 웃긴 건, 이게 무슨 육상 트랙 경기도 아닌데 전혀 동등하게 간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작성된 기록을 두고 아시아신기록을 운운한다는 거다)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홈런타자라는 자부심을 재확인한, 당장 빅리그에 도전한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선수다. 게다가 이미 박찬호, 김병현, 최희섭, 서재응 등의 한국인 성공사례(한국프로리그는 거치지 않았지만)가 있다보니, 8년전 노모가 정말 뭣도 없이 무작정 태평양을 건널 때와 비교하면 팬들의 기대치도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그리고, 본지도 민족정론지답게 지난번 기사를 통해 열렬히 응원해준 바 있다. 궁금하면 누질르시라). 이래저래, 자존심 안 상하면 이상하다.


그런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든 일본의 지바 롯데 마린스, 돈도 많이 주고 4번타자도 시켜줄 테니 이승엽보고 당장 오라고 콜을 하는 중이란다. 그리고 이승엽 본인도 그쪽으로 마음이 거의 기운 상태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사실, 마음도 이왕 상한 마당에 그런 제안에 귀가 솔깃하지 않으면 이상한 노릇이다. 그래도 이왕 뱉은 말을 의식해서인지, 일본진출은 메이저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고 있다느니... 뭐, 이런 사운드도 흘러나오는 중이다.


우선, 이승엽은 내년이면 만 28세가 된다. 일본에서 딱 1년만 뛰고 메이저리그를 타진한다 해도 그때는 29세란 말이다. 자국 프로리그에서 아무리 혁혁한 캐리어를 쌓은 선수라 할지라도 일단 신인으로 간주하고 보는 데가 메이저리그다. 29세의 신인? 별로 매력적일 리가 없다. 현시점에서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진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우회하겠다는 건, 메이저리그 진출 기회를 점점 없애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승엽이 미국 구단으로부터 제시받은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은, 사실 노모가 첫해에 누렸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빅리그가 당시 노모에 대해 갖고 있던 기대치나, 지금 이승엽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치나, 큰 차이가 없다는 말쌈이다. 노모는 그 기대치를 실력으로 가뿐히 뛰어넘은 거고, 그러한 모습에 팬들이 열광했던 거고. 우리가 이승엽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거다. 노모만큼 대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본인이 몇년동안 소중히 가꿔온 꿈이고 그만큼 착실히 준비해 왔다면, 까짓거 자존심 쫌 깎이더라도 실력으로 확 극복해 버리겠다는 과감성을 가져봐도 좋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야구선수로써 이룰 건 다 이뤘노라고 했건만.


아무렴 마음에 두고 있던 상대에게서 사실상 바람을 맞고 난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고, 좋은 조건,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그럴 수 있으려니 싶긴 하다. 반면, 지난 2년간 틈만 나면 언급하며 소중히 키워온 빅리그의 꿈은 이제 혼자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 버렸다는 사실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지금 그 꿈은 명백히, 그의 플레이에 일희일비해온 수많은 팬들과 공유되어 있다. 이승엽이 홈런 하나 더 친다고 내집마련의 꿈이 앞당겨지지도 않고 국민연금 납부액이 탕감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럼에도 그의 플레이가 뿜어내는 판타지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 그리하여 그에게 국민타자라는 닉네임까지 부여하게끔 만든 팬들 말이다.


우리들의 국민타자에게 그 판타지를 극대화시켜주길 기대한다면, 최고의 무대에서 멋지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요구한다면 정녕 무리일까? 국민타자라는 자존심은 2년간 5백만달러라는 얼어죽을 데드라인을 설정할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 간판을 내세워 생전 처음 입단한 팀에서 막바로 주전을 보장받겠다는 발상 역시 그리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빅리그의 입장에서 본 이승엽은 박찬호, 김병현처럼 데려다 잘 다듬으면 보석이 될법한 원석이 아닌, 검증되지 않은 리그에서 닳을대로 닳은 선수이므로. 게다가 빅리그에서 먼저 부른 것도 아니고, 빅리그가 무조건 금전적인 대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님을 몰랐을 리 없었을 터이므로. 이런, 그런 처지마저도 바로 8년전 노모의 경우와 거의 흡사하군.


믿을만한 보도인지는 모르겠으되, LA에서 이승엽을 만난 박찬호가 이런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돈 아니면 꿈, 둘 중 하나만 좇아라." 사실 옳은 말이다. 그중 뭘 선택하든, 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팬 여러분께서 만족해 주시길 바랍니다"라. ...이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팬들과 꿈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그 기대치까지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승엽이 제2의 노모가 되든 제2의 이상훈(혹은 신조 쓰요시)이 되든, 그의 도전이 갖는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았을 거다. 물론 일본진출도 만만치 않은 도전일 테고 그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이제껏 공언해온 대로 좀더 광활한 무대,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무대에 당당히 선 모습을 보고팠던 거다. 어쨌거나 이승엽은 여전히 이승엽일 테고 그를 향한 우리의 애정도 여전하겠지만, 노모와 같은 극대화된 판타지의 대상을 가질 기회는 사실상 박탈당한 셈이다. 국민타자의 처신, 그래서 조금은 아쉽다.



 
설마, 돈이 꿈이었던 건 아니겠지?
안전빵(comblind@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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