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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펄시스터즈를 기억하라

2003.11.19.수요일
딴따라딴지

이른바 68혁명은 이땅에서 실시간으로 체험되지 못했다. 하긴, 서슬 시퍼런 박통정권이 두눈을 부릅뜬 가운데 오로지 경제발전의 한길로 뒤돌아볼 틈조차 없이 치닫던 시절에, 5.16도 아닌 불순한 책동이 감히 혁명이란 단어를 달고 유입되길 바란다는 건 정신나간 짓이지. 그렇다면, 과연 사회 전체를 탈탈 털어서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었던 걸까?


당대 최고의 팝스타인 존 레논이 [Revolution]이란 노래를 부르고 새 연인과 함께 올누드 사진을 찍을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이땅의 대중음악계에도 분명 중대한 변혁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1968년, 그 움직임은 2가지의 중대사건으로 구체화된다. 그중 연초에 발생한 하나는 당시로서는 맹아적인 단계에 그치고 있었지만(말인즉슨 거창하지만, 실은 한대수가 미국에서 귀국한 게 전부다. 물론 이후 한국에 불어닥친 모던포크 붐의 씨앗을 바로 그가 뿌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연말에 발생한 다른 하나는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그 중심에 선 인물들을 단박에 수퍼스타의 위치에 등극시키게 되니... 그들은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신중현, 그리고 가수 펄시스터즈(Pearl Sisters)였다.
 










펄시스터즈의 데뷔음반 <님아/떠나야할 그사람/커피한잔>
(1968. 12. 신향음반제작소)
왼쪽이 언니 배인순, 오른쪽이 동생 배인숙 되겠다


쌍둥이는 아니되 마치 쌍둥이처럼 느껴지는(별로 닮지도 않았는데) 배인순, 배인숙 두 늘씬한 자매의 촌스러운 포즈가 한가득 실린, 펄시스터즈의 데뷔음반. 1968년 12월 신향음반제작소에서 발매되어, 오늘날까지도 중고음반시장에서 꽤나 인기좋은 아이템으로 꼽히는 음반. 당시로서는 왕 신출내기였던 펄자매에게 가수왕이라는 무거운 감투를 씌워준 이 음반.


이 음반에서 배출된 최대 히트곡은 [님아]다. 신중현의 감각은 최소 30년을 앞서간다는 말이 있는데(판단은 알아서 하시라), 그로부터 30년 뒤에 통신상에서 님들아, 니마 등으로 응용돼가면서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될 님아라는 호칭을 예언적으로 제시한 신선생의 감각에 일단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각설하고... 당시 이 곡에 모아진 인기는 삼천만의 주제곡이라는 칭호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성싶다. 오죽하면 1969년 MBC 가수왕상이 데뷔한지 1년남짓 된 펄시스터즈에게 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졌을까. 이 삼천만의 주제곡은 그러나, 작곡자 신중현의 회고에 의하면 애초에는 상업적 성공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은 작품이었다고 한다. 진위여부는 당사자들만이 알겠지만, 이 음반에 담긴 사운드가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 스타일이었음을 상기하면 믿지 못할 까닭도 없다.









같은 회사에서 나온, 쫌전 음반의 또다른 버전 되겠다.
아까 버전은 뒷면이 전부 연주곡으로 채워진데 비해,
이 버전은 뒷면에 펄자매의 팝송 번안곡이 실려있다.
앞면 수록곡은 순서만 다르게 실려있다.
이 사진도 왼쪽이 언니, 오른쪽이 동생


당시 한국 대중음악이 어땠길래? 최희준, 김상희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스탠더드 팝 계열을 제외하면(이 양반들 절대 뽕짝가수 아니다), 사실상 5음음계와 트로트리듬으로 직조된 속칭 뽕짝 곡들이 가요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마당이었다. 1967, 1968, 1970년 MBC가수왕이 이미자였다면 대략적인 설명이 될런지. 키보이스(Key Boys)라는, 당시로서도 꽤 짭짤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그룹사운드도 있었고, 차중락이나 정원 등 그룹사운드 출신 솔로가수들이 정상급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그들의 대중적 인기는 다분히 스탠더드 팝의 정서에 기댄 바가 컸다(더러는 뽕짝의 요소도 원용했고. 1970년을 전후한 후기 키보이스의 음악을 들어보라. 거의 뽕짝이다).


이런 와중에 악단보다는 명백히 신중현의 기타에 무게중심이 쏠린 사운드(이건 아무래도 당시의 후진 녹음 기술 탓이 더 커 보이지만)와 강렬한 비트, 그리고 보기에도 늘씬한 두 여자가 변변한 꺾기창법 한번 구사하지 않으며 스트레이트하게 내질러버리는 노래가 결합된 이 음반을 대중취향에 영합한 사운드로 취급하기는 참 거시기하다. 대중취향을 선도하면 선도했지.









60년대의 신중현


음반 마빡에 SOULFUL PEARL SISTER라는 되도않은 부제가 적혀있긴 하지만(<펄씨스더 특선집> 버전 기준), 실제 음반에 담긴 사운드에서는 소울보다는 락비트의 영향력을 더 짙게 느낄 수 있다. 소울풀한 분위기가 미상불 감지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신중현이 모색해온 한국적 락이 대중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은 최초 사례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한국 대중음악에도 트로트의 영향력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충분히 스매시히트를 기록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데서 이 음반이 갖는 의의는 막대하다(신중현은 이 앨범을 만들기 바로 얼마 전, 이정화라는 가수의 앨범을 역시 실험적인 사이키델릭 성향으로 만들어 냈다가 참패를 맛본 아픈 기억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펄자매의 데뷔음반은 대박이 났다. 정확한 판매고는 확인할 길이 없으되,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1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을 거라는 설만 전해져올 뿐이다(과장이겠지만). 결국 하루 아침에 최고 작곡가로 부상한 신중현은 베트남으로 갈 계획을 부랴부랴 취소해야 했으며, 펄자매의 2집은 이듬해 1월에 급조되어 나올 지경이 됐다. 그나마 앞면이라도 오리지널 곡으로 채웠던 1집에 비해 2집은 전곡이 팝송 번안곡이었다.









<아이러브유>(1969. 8. 지구).
트윈폴리오에 대한 언급은
 커버 뒷면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왼쪽이 동생, 오른쪽이 언니


그해 여름에 나온 <아이러브유>라는 앨범은 펄의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은 인기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증거물로, 이 음반은 당시 막 태동단계에 있던 한국 모던포크 사운드를 음반화시킨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대단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총 12트랙 가운데, 당대 최고인기 포크듀오였던 트윈폴리오의 곡이 절반에 달한다. 참고로 트윈폴리오의 멤버는 송창식, 윤형주 되겠다). 펄이 이 음반에서 한 일은? 좀비스의 [I Love You]를 포함한 팝송 번안곡 3곡을 부른 것과, 커버에 얼굴마담으로 등장한 것밖에 없다! ...훗날 당대 청년문화의 생생한 기록이 될 음반에서도 무작정 얼굴마담 노릇을 할만큼, 거의 아무데나 갖다 붙여도 장사가 될 정도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거다. 당시의 펄자매는.
 



 


펄자매의 또다른 경쟁력은, 아까부터도 강조하고 있듯 멋진 비주얼에 있었다.


미스 다이너마이트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던 이금희(케이비에쑤 아나운서 아님)란 댄스가수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펄자매의 상큼한 미모(그것도 두명씩이나!)와 신선한 이미지랑은 거리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한창나이에다 165cm를 상회한 것으로 알려진 늘씬한 키, 긴 생머리, 게다가 미니스커트가 기똥차게 어울리는 각선미까지... 으아, 환상이다. 요즘이야 이런 컨셉이 드물지 않지만, 당시 펄자매는 이전에는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을 신선한 충격이었던 게다.









<펄씨스더 특선집> 커버의 뒷면을 장식한 사진


그녀들의 지대한 영향력은, 이후 70년대 초반에만도 화니시스터즈, 퀸시스터즈, 쥰시스터즈, 유리시스터즈, 리리시스터즈, 허니비시스터즈, 피너츠시스터즈, 쿨시스터즈(헉헉...) 등등 열거하기조차 벅찬 수많은 시스터즈들이 양산된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서울시스터즈는... 음, 시기적으로 좀 멀다). 개중에는 펄과 같은 친자매도 있고, 그렇지 않은 팀들도 있었다. 그들이 다 펄의 아류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물론 그전에도 김시스터즈니 이시스터즈 등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여성보컬그룹들이 있긴 했다. 펄이 그녀들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들은 주로 미군부대 공연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철두철미 무대예술인들이었던데 비해 펄은 미디어를 통해 일반대중을 공략대상으로 삼았다는 거다. 앞서 언급한 선배들이 미군들의 입맛에 맞춘 스탠더드 팝계열을 주로 다뤘다는 데서, 당대의 최신조류에 충실했던 펄과는 음악적으로도 구분됨은 물론이겠고.









화니시스터즈 (대표곡: [짬 좀 내줘요])


게다가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귀국했다가 계란세례를 받은 게 1967년의 일이었으되, 만 2년도 안 되어 펄의 패션감각을 무리없이 수용해줄 수 있을만큼 대중의 시각이 전환되었다는 사실 또한 빼먹을 수 없겠다. 그것뿐인가, 들고 나온 음악성도 참신하기 이를데 없었으니... 옷걸이 받쳐주지, 패션감각 끝내주지, 게다가 음악성 쿨하지. 더 뭘 바래. 그냥 운때가 기막히게 맞았다는 한마디로 압축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당사자가 펄자매가 아니닌 다른 이들이었더라면 과연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그 수많았던 시스터즈들이 오늘날까지 회자되지 못하고 대부분 당시에만 반짝하고 말았던 배경에는, 뭐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후발주자인 그녀들이 펄을 넘볼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던 탓이 젤 크다고 봐야겠다. 펄을 넘볼 수준의 미모라는 것도 어려운 노릇이었겠거니와, 음악적으로도 신중현과 견줄만한 든든한 음악적 조력자를 찾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부분은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가요 히트의 공식에 충실한 노래들을 받아 부르는, 평범한 인기가수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그저 당시의 동영상 자료를 구할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옷을 똑같이 해입고 대칭의 춤을 췄다는 펄자매의 스테이지 매너가 어땠을지 궁금한데. 암튼지간에, 그녀들은 이땅에서 비주얼과 음악성을 거의 균등한 수준으로 겸비한 최초의 범대중적 스타(이렇게 풀어 써 놓으니 구실이 참 옹색해 보이지만, 그 의의는 사실 막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였다.









똑같은 옷과 대칭의 춤 시절의 펄시스터즈
(<주간경향> 1972년 1월 5일자 표지).




 


펄의 막대했던 스타성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작용을 하기도 했다. 하긴, 송대관이 산인시절 [세월이 약이겠지요]라는 노래를 직접 작사했다고 해서 "건방지다"는 핀잔을 들었던 게 이로부터도 몇년 뒤의 일이니, 제아무리 인기가 좋아봤자 힘없는 가수일 뿐이었던 그녀들에게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 따위를 기대한다는 건 분명 풀뜯어먹는 소리렷다. 암만 그래도 1969년 이후 그녀들이 섭렵했던 다양한 스타일은, [님아]의 강렬한 울림이 아니었더라면 도대체 펄을 무슨 노래로 기억해야 할지조차 애매할 정도로 난삽하다.









<펄시스터즈 스테레오일대작>
(1976. 지구).
박춘석 작곡 [슬퍼도 떠나주마]를 포함
펄의 지구레코드 취입작들을
집대성해놓은 음반


세상에 윤항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박춘석의 [슬퍼도 떠나주마], 번안곡 [내사랑 어디갔나(Somebody to Love; 원곡은 제퍼슨 에어플레인)]를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소화해낼 수 있는 가수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박춘석과 신중현의 감성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실로 광활한 표현력을 칭찬해야 옳으려나? 까짓거 그렇다 쳐도, 그녀들로 인해 양산된 아류성 시스터즈들의 전철을 그녀들이 밟게 되는 기가 찬 결과는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어쨌거나 한때 트로트를 뛰어넘는 그 무엇을 몸소 실천했던 그녀들은, 때때로 남진이나 이미자 등과 함께 조인트음반을 내기도 하는 그저 그런 인기가수로 그 위상을 정립해가고 있었다. 신중현처럼 유니크한 조력자와 함께하지 않는 그녀들의 목소리에는 이렇다할 개성이 없었다. 덕분에 펄시스터즈의 인기가도는 얼마간 더 무난하게 지속될 수 있었지만, 그 생명력은 그야말로 가늘고 길었다. ...그리고 1976년, 언니 배인순이 문제의 D그룹 C회장과 결혼하며, 펄시스터즈의 이름은 완전히 과거사로 남겨지게 되었다.


물론 알고 있다. 펄자매가 투철한 음악적 자의식까지 겸비한 뮤지션이 되길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걸. 그리고 데뷔시절에 이뤄놓은 업적만으로도 이미 펄시스터즈의 이름을 오래오래 기억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걸. 무엇보다도, 언제까지나 그녀들이 신중현류의 쿨한 노래를 부르는, 긴 생머리의 상큼한 자매들로 남기를 기대한다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걸. 그러므로, 머리를 짧게 치고 나팔바지를 입은 이들의 1973년경 모습에 실망할 필요도 전혀 없다는 걸.









Jun & Syuk이란 근거 불명의 이름으로
활동하던 1973년경의 펄시스터즈




 


"펄시스터즈, 27년만에 재기하다!" 이런 뉴스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30년만에 부르는 커피 한잔의 내역이란 게 하필 이런 것이었을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내년쯤에 동생이랑 새음반도 내겠다고 말하긴 했다지만, 지금 어디 그 말이 귀에 들어오나.


이니셜을 부여하지 않으면 기사작성이 안되는 찌라시 기자들의 수고를 덜어주며 다시금 이슈의 전면에 나선 배인순, 그녀. 펄시스터즈의 언니였던 바로 그녀. 덕분에 이전까지 펄시스터즈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건조한 검색결과만 무심히 노출시키던 검색엔진에서, 어느날 갑자기 펄시스터즈 인물정보가 튀어나오게까지 됐으니 아니 나타나니만 못한 건 아닌 듯도 싶다. 어쨌거나 30여년의 세월 속에 잊혀진 펄시스터즈의 이름을 다시 끄집어내게 됐으니 말이다. 조금 더 아름다운 사연이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는 아쉬움은 좀처럼 털어내기 어렵지만.


여전히 알고 있다. 어느덧 50대 중반인 그녀에게 왕년의 상큼한 모습을 기대한다는 건 바보짓이라는 걸. 그러므로 저 초췌한 초로의 모습도 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그치만 한가지, 언급하기도 거북한 과거사와 의미없는 이니셜에 매몰된 스캔들메이커든, 돈만 많았지 애정은 없는 남편에게 20여년간 고통받아온 여인이든 간에, 그녀가 그런 식으로 규정되는 건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K양은 누구고 E양은 또 누군지, 문제의 책은 대체 얼마나 팔려나갔는지(들리기로는 대박이 터졌다고 하던데), 막말로 그게 뭐가 대수라고?


뭐 찌라시도 먹고 살아야 되고, 그녀도 분명 현재진행형의 스타는 아니니, 그녀의 이름이 이런 방식으로 회자되는 현상을 두고 공연히 싫은소리를 한다는 건 참으로 시덥잖은 짓일 게다. 그래서, 더이상 싫은소리는 안하련다. 다만, 60년대 청년문화의 한 축을 이뤘고, 한국 대중음악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온 [님아]의 주인공이었으며,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비디오형 가수이자, 수많은 뭇남성들의 상상속 연인이었던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그 동생의 모습을, 그들의 또다른 이름이었던 펄시스터즈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을 따름이다. 새삼스럽게도.









<(속) 님아> (1971. 유니버어살) 앨범커버



 
펄시스터즈 빠돌이
안전빵(comblind@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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