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 (15)-이차돈 1탄
2003.8.10.일요일
순교자 이차돈.. 그 거룩하고 뽁잡시런 얘기 이차돈은 다들 아시리라(이사돈 말고). 법흥왕 때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순교하셨고, 목이 댕강 잘리자 젖같이(욕 아니다) 흰 피가 솟구쳤단 그 분 말이다. 중·고딩 때 국사시간에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었다" 뭐 일케들 배우셨을 거다. 워낙 드라매틱한 얘기라 소설로도 쓰여졌고(이광수, <이차돈의 死>), 연극과 무용으로도 올려졌다(박영호, <이차돈>/차범석, <성자 이차돈>/국립무용단, <이차돈의 하늘>). 드라마도 했었구만(KBS, <이차돈>). 그 내용이 진짜냐 가짜냐 따질 만큼 돗자리가 무식하고 무모하진 않다(종교 문제 잘못 건드렸다간 어케 되는지 PD수첩에서 넉넉히 배웠다). 종교에 관련된 믿기 힘든 얘기들이야 어디 한둘인가. 그런 건 그냥 아름답게 놔두는 게 좋다. 믿건 말건 말이다. 이차돈 얘기(흔히 이차돈설화라 부른다) 텍스트는 여럿이다. 서로 비슷한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그거 한번 쫘악 정리해보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 글을 쓴다. 그치만 그 얘기 못믿겠단 분들 입장에서 약간의 썰을 풀어보려는 불순한 의도 또한 전혀 없진 않다. 취향대로 가려 읽으시라. 쫌 길어질 거 같아 2회로 쪼개 싣는다. 이차돈.. 이게 고슴도치란 뜻이라네 법흥왕(재위 514∼540년) 때 살았던 이차돈(異次頓)은 박씨다. 『삼국사기』엔 이차돈이라 나오고,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을 보니 염촉(厭)·이차(異次)·이처(伊處)·염도(厭覩)·거차돈(居次頓) 등으로도 쓴단다(이차돈과 염촉이 젤 유명하니 요것들만 격하시라). 뜻인 즉 고슴도치라는데... 텍스트에 글케 나오는 게 아니고 몇몇 학자들이 글케 본단다. 어떤 학자는 고슴도치란 몰래 불교를 전파하던 이들, 그니까 순도(順道)·아도(阿道)·묵호자(墨胡子) 등까지 아울러 상징한다고도 하네(돗자리 이 방면은 꽝이라 뭐라 할 말 없다).
갈 길 바쁘지만 고슴도치 나왔으니 여담 한 자락 하고 넘어가자(가족에게 들려줬더니 하나도 안웃긴댄다... 쉬푸...). 꽤 옛날 일이다. 시내버스 타고 가는데 뒷자리에 앉은 청춘남녀의 대화를 듣고 돗자리 웃음 참느라 힘들었던 격이 난다. 남친이 여친한테 "울 엄마가 나 잘생겼대" 했나부다. 그랬더니 여친이 "으이그...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쁘다더니..." 하더라. 그러자 남친이 "뭐라구?" 하며 짜증을 낸다. "왜 짜증을 내고 그래?" 하고 여친이 물었더니 남친 왈, "울 엄마가 고슴도치란 말이잖아" 하더라. 하이레벨 조크인지 뭔지 잘 몰겠다만(분위기로 봐선 아녔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돗자리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다(안웃기셨담 무척 죄송시럽다. 서로 채널이나 코드가 다른갑다. 근데 사진 봐라. 고슴도치 의외로 예쁘다). 자자... 다시 본론이다. 이차돈의 아빠는 뉘신지 모르고, 조부는 아진찬(阿珍) 종(宗), 증조부는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였단다. 그게 아니고 아빠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고도 하네. 아.. 뜨... 뭐면 어떠냐. 머 나름대로 괜찮은 집안인가보다 하고 걍 넘어가자(법흥왕 조카란 얘기도 있는데... 이차돈 집안에 대해 더 관심 있으신 분들은 요기 함 가보시라. <역사21>이란 사이튼데, 운영자와 참여자의 열정과 수준이 장난 아니다. 거기서 백가쟁명 클릭하고 이차돈 검색하면 뽁잡무쌍한 논쟁들이 펼쳐질 게다. 앵간함 정신 해맑을 때 드가시라). 당시 이차돈의 나이는 22세라고도 하고 26세라고도 한다. 절개가 곧은 충신으로 사인(舍人)이었다. 사인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와 제13관등인 사지(舍知)를 아우르는데, 내양자(內養者)라고도 쓴단다. 비록 낮은 관등이지만 국왕이나 왕자를 곁에서 모시기 때문에 나름대로 끗발이 있는 자리다. 그래서 이차돈을 놓고 소신(小臣)과 근신(近臣)이란 표현이 함께 나오나보다. 이차돈 얘기, 요점 정리 해보자 앞서 말했듯이 이차돈 얘기 실린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대충 담과 같다. ① 김대문, 『계림잡전(鷄林雜傳)』(702∼737년) ⇒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실려 있다. 이 자료들의 내용을 모두 소개하다간 날새고 김샌다. 그래서 돗자리가 뻘뻘대며 <표>로 정리해봤다. 우선 요거 함 쭈욱 훑어보시라.
⑥은 좀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조선시대 자료라 가치는 좀 떨어지지만 아도화상(阿度和尙)을 기리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라 무시할 수도 없다. 맞든 틀리든 당시 불교계 일부에선 요로콤 보기도 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기선 법흥왕이 아니라 소지왕 때 일로 나온다. 또 다른 자료와 달리 아도화상이 나오네. 이차돈은, 공주의 병을 고치려면 천경림을 달라는 아도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고 했다가 소지왕에게 찍혀서 목이 잘린다. 근데 이 얘기는『삼국유사』[흥법] <아도기라(阿度基羅)>에도 나온다. 허나 좀 다르다. 여기선 아도가 공주의 병을 고쳐주니 미추왕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아도는 천경림에 절을 짓게 해달라고 한다. 미추왕은 그 부탁을 들어줘서 천경림에 조촐한 절을 세우니 바로 흥륜사(興輪寺)란다(『삼국유사』를 보면 이 얘기도 [아도본비(阿度本碑)]에 나온다고 적혀 있는데, 조선 때 세워진 ⑥과는 다른 거다. 암튼 미추왕 때 불교가 들어왔다고 하긴 넘 이르다). 거듭 말하지만, 조선시대 불교계 일각에선 이차돈에 대한 요런 얘기도 떠돌고 있었단 점이 중요하다. 어흑... 암튼 디지게 뽁잡찬란하다. 자료마다 내용이 서로 달라 뭐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또 모두 앞뒤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다. 특히 순교 때 나타났다는 기적을 안믿으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성이다. 에혀... 그치만 뭐 우짜겠나. 쪼잔한 해설은 이따 하고, 순교 장면만 대충 살피셔도 그리 헛고생은 아니실 게다. 이차돈 순교의 현장"꽃잎같은 그 하얀비가 내리는 날.." 뜽금없이 뭔 소리냐고? 이차돈 하면 돗자리 이 노래가 떠오른다. 원조 땐씽퀸 김완선님의 명반 <애수>에 실린 하얀비의 가사 일부다. 여기서 하얀비를 하얀피로 바꿔주면 현장 분위기가 더 아삼삼하게 그려진다. 뭐 이차돈 죽을 때 흰피가 치솟고 꽃비도 내렸다니 가사랑 딱 맞네.
이차돈 얘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처형 순간이다. 818년 세워진 [이차돈순교비(=백률사석당기)]엔 그 장면이 잘 새겨져 있다. 특이하게도 서서 합장을 하신 채 목이 잘리셨나보다. 아래옷은 거의 힙합이네. 더 뜯어보면, 우선 목이 잘리니 피가 솟구치누만. 밑의 물결은 땅이 흔들리는 걸 뜻하는 거 같고... 하늘에서 내리는 주먹밥 같은 건 꽃잎이란다. 쫌더 자세히 디벼보자.
흔히 "젖같이(욕 아니라니까) 흰" 피가 솟구쳤다고 들으셨을 거다. 맞다. 자료에도 글케 나온다(①·⑥). 근데 아예 흰젖【白乳】이라고 나오는 자료도 있네(③·④·⑤). 희다는 건 같은데 그게 피냐 젖이냐 헷갈린다. 판단은 국과수 몫이다. 머리가 피융∼ 날라가 산꼭대기에 떨어진다. 그 산이 금강산(金剛山)이라고도 하고(②·⑤) 강고봉(强高峰)이라고도 하네(⑥). 금강산도 강고봉도 모두 경주 인근에 있단다. 근데 9세기 초의 자료인 ③·④엔 그런 얘기 없다. 위의 그림을 봐도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네. 그럼 적어도 요 때까진 머리 날라갔단 얘기 없었던 거다. 이보다 약 100년 전에 쓰여진 ①에도 흰피 얘기만 나온다. 그럼 머리 날라간 얘기만 나오는 ②는 언제 쓰여진 거냐구? 모른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걍 "향전에 이르기를【鄕傳云】"이라 했는데... 향전이 책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책이라도 언제 누가 썼는지 당근 모른다. 어쨌든 ㉠ 누군가 날라가는 머리를 △빠지게 쫒아갔거나, ㉡ 등산객이나 수색팀이 머리를 찾아냈을텐데... ㉠이라면 그 넘의 무모한 호기심과 모험심, 더불어 음속에 가까운 스피드에 소름이 돗고, ㉡이라면 발견 순간 그 넘이 받았을 심리적 쇼킹에 눈물이 돈다. 땅이 흔들린다(③·④·⑤). 하늘이 어두워진다(③·⑤). 꽃비가 내린다(③·⑤ [이차돈순교비]의 그림을 보면 ④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을 거다). 샘물이 마르고 물고기와 자라가 뛰어오른다(③). 고주몽 강 건너던 장면 생각나네. 나무가 부러진다(③). 바람 분단 얘긴 없는데... 땅이 흔들려선가. 허걱∼ 원숭이가 떼거리로 울었다네(③). 울나라에... 뭔 원숭이가 있다냐. 뭐 왕실에서 애완용으로 길렀던 건지도. 이런 얘기는 불교의 옛 전설에도 나오는 거란다(都甲玄卿, [佛法の新羅流傳とその採用說],『朝鮮』1932. 12∼1933. 2). 특히 흰피나 꽃비 얘기는 불교설화에서 심심챦게 찾아진단다. 흰피를 갖고 희다=밝다로 해석해서 우리의 고유신앙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돗자리 개뿔도 모르겠다. 이차돈설화에 대한 역사학계의 해석들 이차돈 얘기에는 이처럼 선듯 믿기 힘든 부분이 많아 흔히 설화라고 부른다. 이 설화에 대한 역사학계의 삭막한 해석을 몇 개 소개하면 담과 같다. 법흥왕이 불교를 탄압했으며 이차돈을 처형했다 (1) "법흥왕은 실제에 있어서는 불교를 탄압했고 승려를 처형하여 순교자를 낸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어쩌면 왕은 초기에 불교를 탄압했으나 말년에는 용불적(容佛的)인 태도를 가졌던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확실한 것은 진흥왕이 흥불(興佛)의 왕이며 법흥왕을 숭배하여 법흥왕의 불미한 불교 박해사를 미화했다고 보임은 숨길 수 없다. 이차돈의 숭배와 표리일체가 되어 법흥왕의 숭배가 일어나자 미화된 순교 이야기라고 보겠다(문경현,『순교성인 이차돈고』, 『不聞聞』, 영취불교문화연구원, 1990, 170쪽)." 이차돈설화에 대한 젤 화끈하고 재미난 해석 되시겠다. 돗자리 취향과도 잘 맞는다. 그치만 아직은 받아들이기 주저된다. "불교를 탄압했던 왕이 말년에는 용불적 태도를" 갖게 된 계기가 설명되지 않아서 글타. 법흥왕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우려다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이차돈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1) "창사운동(創寺運動)은 왕과 이차돈이 함께 일으킨 것이지만, 하도 군신(群臣)의 반발이 강하였으므로 왕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 궁한 입장을 벗어나기 위하여 왕과 함께 창사를 의논한 이차돈은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짊어지려고 한 것일 것이다(이기백,『삼국시대 불교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2, 12쪽)." (2) "이차돈이 처형되기에 앞서, 그 해 법흥왕이 사신(捨身: 불교에 귀의함)했음은 지증대사비문에도 언급되어 있다. 유교정책이 통용되던 당시 왕의 사신은 큰 물의를 일으켜, 이 문제로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 왕이 구성원의 하나로 참석하여 군신(群臣)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왕권의 한계를 잘 말해준다. 이차돈은 왕의 사신과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법흥왕이 사신한 장소는 흥륜사인데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창건명령을 전한 것이므로, 이차돈은 흥륜사 창건의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신종원, 『신라 불교공인의 재조명』,『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14,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3, 162∼163쪽)." 이 주장대로라면 법흥왕이 치사해지는 대신 이차돈의 충성심이 돋보이게 된다. 일케 되면 종교적 순교라기보단 정치적 희생에 가깝다. 이차돈이 법흥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우려다 처벌을 받았다 (1) "법흥왕과 이차돈이 흥법(興法)을 하기로 약속하고 창사(創寺)를 한다는 데에 합의를 하여 이차돈이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는데 강경파인 이차돈이 이왕 창사를 할 바에는 고유신앙의 성소(聖所)인 천경림(天鏡林)에 창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창사 자체를 반대하고 있었던 군신(群臣)들은 고유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고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고, 법흥왕은 강력한 군신들의 반발을 제지하기 곤란하였고, 더구나 천경림에 창사한다는 것은 왕과 이차돈 사이에 합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은 군신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興法)의 온건파인 법흥왕으로서는 점진적으로 흥법해 나가려 한 데 반하여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개혁적 방법으로 흥법하려 한 데서 사건의 발단이 생긴 것이다(최광식,『이차돈설화에 대한 신고찰』,『한국전통문화연구』1, 대구효성가톨릭대 인문과학연구소, 1985, 238쪽)." (2) "이차돈은 매우 급진적인 방식을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정치세력간의 합의 없이 당시 무교의 상징인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베고 거기에다 오랑캐의 신(부처)을 모시는 사찰(흥륜사) 건립을 추진했던 것이고, 여기에 귀족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발함으로써 마침내 그가 모든 정치적인 책임을 지고 숙청된 것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그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는 신라사회에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으며,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에 의해 전폭적 후원을 받으며 급속히 발전해갔다(『이차돈은 순교자인가』,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문답으로 엮은 한국고대사 산책』, 역사비평사, 1994, 227쪽)." 불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놓고 법흥왕은 온건파였고 이차돈은 강경파, 신하들은 반대파였단 거다. 근데 하필이면 신라 전통신앙의 성지인 천경림(天鏡林)에다 흥륜사(興輪寺)를 세우려 하니 신하들이 펄쩍 뛰고, 법흥왕은 그 책임을 물어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는 스토리 되시겠다. 그치만 금새 뽀록날 일인데 법흥왕의 허락 없이 이차돈이 글케 왕명을 바꿀 수 있겠는가. 하긴... 죽기로 맘먹었으면 뭔짓을 못하겠냐만... 세 가지 모든 견해에 남는 의문! 연구자들은 이차돈의 순교는 인정하지만 그 때 일어났다는 기적은 수긍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왜 신하들이 갑자기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찬성하게 되나. "절 죽여주세요" 또는 "저놈 죽여라" 해서 목을 잘랐는데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그걸로 땡이지 왜 그걸 계기로 갑자기 상황이 역전되어 불교공인이 이뤄지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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