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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내현 추천0 비추천0




[규탄] 국민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

2002.4.2.화요일
딴지일보



87년 6월, 서울 남대문.


87년 민주화 항쟁, 그리고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은 세계에 유례가 별로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뜨거운 세월을 살아왔더랬다. 오래 전 얘기가 아니다. 불과 십년이 조금 넘은 이야기이다. 86년부터 KBS 시청료 거부 투쟁이 일어났고,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6월 이한열 열사 사망, 6.29 선언, 이어지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87년 대선, 대규모 군중집회의 연속....수만명, 수십만명, 심지어 백만명.. 최루탄이 다 떨어져서 못 쏠 지경이었고, 공권력은 진압을 포기했으며, 전대가리 정권은 시민들에게 거리를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시절이었다. 노동운동이 폭발한 것은. 불과 몇 달 사이에 130만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으며, 이때 새로 만들어진 노조만도 1500개에 육박할 정도였다. 울산의 128일 장기파업, 구로 동맹파업, 블랙리스트 철폐운동, 청계피복노조 복구운동....그 시대를 살던 우리들 귀에 들려오던 단어들이었다. 신문지상은 연일 불법 파업, 사회 혼란, 이기주의의 확산을 걱정하는 내용으로 가득가득 채워졌으며, 노사분규는 스트레스 해소의 장이 아니다는 규탄의 글도 쏟아졌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폭발이 일어난 것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과격해서도 아니었고, 법을 우습게 알아서도 아니었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구로공단엔 한달 300시간씩 살인적으로 일하며 월급 15만원 받는 여공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2400원하던 일당을 3600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를, 어떻게 임금을 50%나 올려달라는 과격한 주장을 할 수 있느냐며 소위 보수 라는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회사의 조종을 받는 어용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법파업선동"이 되었고, 그들에게 법률적 지식을 가르쳐주면 "불순세력"이 되었다. 대한민국 법전에 존재하는 법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불순세력이 되는... 그런 이상한 사회를 우리는 살았더랬다.


민주화란, 전두환 물러가고 양김이 정권을 잡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권력과 돈을 누리는 사람 따로 있는, 그런 불합리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민주화였다. 노동자들이 원한 것은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체제를 바꾸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임금을 조금 올려달라는 것, 두발 자유화를 허용해 달라는 것, 전화를 쓰게 해 달라는 것, 노조활동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야근수당을 더 달라는 것, 쉬는 날을 달라는 것, 일하다가 다쳤을 때 치료를 해 달라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때 노동자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사상을 의심받는 것을 목격한다. 항상 있던 일이니 새로울 것도 없지만, "개혁인사"라고 자처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그때의 노동운동가가 그때의 안기부 거물과 지금 같은 당에서 정치적 동지가 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동산업이라는 회사가 있다. 키친아트를 만드는 회사다. 이 회사는 89년의 한 사건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당시 경동산업은 살인적인 노동조건으로 악명이 높았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정도의 일은 거의 하루에 한번꼴로 일어났고, 전체 노동자의 반 정도가 산재 피해자라고 할 만큼의 노동조건이었다. 장시간 노동, 저임금, 산재...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 중 몇명이 운영하던 디딤돌이라는 사내 써클이 일일찻집을 열었다는 이유로, 불법 노조활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회사의 징계를 받자 투쟁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이 100여명의 구사대가 동원되고, 이들에게 두들겨맞고 끌려가며 밀리고 밀려 결국 옥상에 올라간 20여명의 사람들은 일주일동안 밥도 물도 못 먹고 공권력과 대치한다. 아래에서 지원농성을 벌이던 가족들이 실신할 정도로 구사대에 두들겨 맞고, "구속되든지 해고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이 오자... 이들은 아래로 내려가서 집단 분신을 해 버린다. 5명이 분신하고 한명이 할복하고...


그때는 그랬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열악했다. 최저임금제라는 제도가 처음 생긴게 88년의 일이었고, 노조를 만드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내 말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최후의 호소 수단으로... 분신을 선택할 만큼.



현대중공업 투쟁 당시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가 있다. 66년 일본에서 중고 기계를 들여와 대량으로 화학섬유를 만들며, 93년 폐업될 때까지 792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노동자를 아황화탄소 중독이라는 직업병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그 중 38명은 이미 사망했다.


종로에서 누가 총질을 해도 38명은 죽기 힘들다. 그만큼 직업병이라는 것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인권은 무방비상태에 있었다. 80년대 말에 와서야 산업재해와 직업병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시엔 아황화탄소 중독을 직업병으로 인정할 수 있네 없네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를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당사자들과 각종 단체 변호사 교수 등이 긴 세월동안 투쟁해야 했다. 물론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보험 수가가 터무니 없이 낮았다.


지금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지만, 암튼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경동산업은 2000년 경영 부실로 퇴출되었다가 노조가 기업을 인수, 흑자기업으로 전환시켰다. 회사를 망친다던 그 노조가 말이다. 원진레이온은 93년 폐업했고, 이때 매각대금중 일부를 보상금으로 받은 피해자들이 99년 구리시에 원진녹색병원을 세웠다. 그들이 염원하던 직업병, 산재 전문 의료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80년대 말은 이런 수많은 사례들이, 그동안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가, 말 그대로 폭발했던 때였다. 87년 7월부터 있었던 울산 현대중공업 분규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울산 현대엔진 노조결성(87.7.5)이 뇌관이 되어 몇 달간의 대폭발을 일으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울산, 마산 등을 거쳐 서울 구로공단까지,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한 노동운동의 시발은 바로 울산이었다. 그래서 울산은 단순히 현대엔진, 현대중공업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계와 공권력, 노동과 자본의 대리전이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시간당 600원의 보수를 800원으로 올려달라는 것,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측이 이것을 돼먹지 못한 노동자들의 난동으로 치부하고, 정주영회장이 노조 결성은 안 된다고 거부하면서, 그동안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었다.


울산은 갑자기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무대가 되었다. 어용노조, 총파업, 5만명의 행진, 경찰과의 대치, 젊은 노동자의 죽음, 분신기도, 128일간의 현대중공업 파업, 처절한 골리앗 투쟁, 구속과 사법처리에 이르기까지... 일년도 넘는 긴 이야기를 여기에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10여년이 지났다.


아직도 우리는 80년대 말의 그때, 민주화의 열풍과 노동운동의 폭발을 머리속에 정리하고 있지 못하다. 87년, 88년 울산에서 맹활약했던 당시 전민련 의장 이부영은 지금 안기부 정형근과 같은 당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개혁적이라는, 서민을 위한다는 다른 당에선 그때 울산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으니까 빨갱이네 아니네 하며 싸움이 벌어진다.


이인제 홈페이지에 가면 이런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인제 의원은 2002년 2월 3일 낮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새시대개혁연대 총회에 초청을 받아 특강을 했다. 새시대개혁연대는 권용목 전 현대그룹 노동자협의회 의장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386 세대 중심의 전국조직이며, 이날 총회에는 김민석 의원도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이 의원은 "노동부장관 시절 울산의 노사분규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권용목 당시 노조 대표와 비밀리에 단독회동을 가진 적이 있다"고 회고한 후 "과거 고난의 시대를 따뜻하게 긍정하고 이제 변화의 시대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에 존경을 드린다"고 치하했다.....
 


권용목. 80년대 말 울산 투쟁의 주역 중의 주역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인제는 울산에 가서 권용목과 회동한 것 때문에 결국 장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던가.


노동자 편에 서서 모든 걸 다했다는 개혁적 인사 이인제,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찌하여 울산에서 노무현이 했던 말, "노동계의 대표자가 국회의원이 되어, 여러분들이 주인이 되어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을 가지고 노무현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있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노무현은 이제 전향했다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언어도단 마저 하고 있는가.


색깔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공격해서 누구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월급 30만원 40만원 받고 묵묵히 일하던 우리 국민들, 그러나 정작 일한 사람은 온데간데 없이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권력자와 재벌총수가 추앙받는 것을 보아야 했던 평범한 소시민들, 야근에 잔업을 밥먹듯이 하면서 청춘을 바쳐야 했던 힘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사상을 의심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며 역사의 죄악이다. 그것은 인권에 대한 모독이며, 80년대 말 이후 우리가 지금까지 일구어 왔던 모든 성과를 부정하는 테러다.


월급 몇만원 더 달라고, 사람답게 일 좀 해 보자고 했던 우리 국민들이 체제의 적이라는 말인가? 그럼 지금 그 당시로 다시 되돌아가자는 말인가? 노동자들 편에 섰던 변호사 정치인 운동가들의 사상을 의심하면서, 정작 행동한 당사자인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한 입으로 나는 당신편이니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는가.


80년대 군부에 저항해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던 시민들에게 3당합당이 배신이었듯이, 색깔론 또한 마찬가지다. 당내 경선이거나 국회의원 선거이거나 대통령 선거이거나 마찬가지다. 색깔론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국민을 배신하는 사람이 국민의 지지를 얻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파렴치한 죄악이다.


온 국민을 체제의 적으로 만들지 말라.


색깔론은 죄악이다.



색깔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딴지 편집장 최내현(asever@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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