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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한국의 문화계여 독설을 허하라!


2000. 9.04.월요일
딴지 논설우원 최가박당

비평가의 독설


영화 전문 주간지 <씨네 21>에는 짐 호버먼 칼럼이라는 고정난이 있다. 이 사람의 칼럼을 보면 독설이 워낙 심해서 어떤 때에는 영화감독에 대한 인신공격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예컨대, 지난 8월 둘째 주에는 뭐 이런 백치 같은 영화가 다 있어 - 자기 선전의 귀재 라스 폰 트리에의 실패한 실험 <백치들>이라는 졸라 긴 제목의 칼럼이 실렸는데, 그 내용 가운데 일부는 다음과 같다.






폰 트리에는 바보 얼간이 백치들에게 펑크풍 찬가를 바치는 것도 모자라, 일반 성인들이 침을 흘리고, 몸부림치고, 옷을 벗는가 하면,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진 정신지체인들을 흉내내는 우스꽝스러운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일까지 해치운다. 정치적으로 부정확한 이 정신착란적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폰트리에가 <킹덤>에서 써먹었던 다운증후군 환자들의 합창이나 나아가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 여주인공의 성적으로 백치적인 행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격이다.








이게 바로 호버먼이 지적한 덴마크버전 영구엄따.. 장면

<백치들>이 과연 이토록 가혹한 평을 들어야 할 영화일까? 사실 본 기자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화적 편식이 심한 우리 나라에서 유럽, 그것도 덴마크 영화를 볼 사람이 얼마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굳이 보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한 외국 평론에 대해 얘기하는 건 호버먼의 칼럼이 우리나라 여느 영화 평론가의 비평과는 사뭇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나라의 비평가들은 혹평보다는 호평에 익숙하며, 간혹 혹평을 할 때조차도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데 반해 호버먼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호버먼은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자신이 <백치들>을 백치같은 영화로 보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칼럼은 <백치들>이라는 영화를 바라보는 하나의 의미있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본 기자가 최근 우리 문화계에 화제가 되었던 이현세의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평을 써야 될 형편에 처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편리하게 호버먼의 칼럼을 패러디해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현세는 바보 얼간이 원시인들에게 컬트적인 찬가를 바치는 것도 모자라, 개나 소나 침을 흘리고, 몸부림치고, 빠굴을 하는가 하면,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진 성도착자들을 흉내내는 우스꽝스러운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일까지 해치운다.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이 정신착란적 만화는, 어떤 면에서는 이현세가 <남벌>에서 써먹었던 쇼비니스트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이나 나아가서 <공포의 외인구단> 주인공들의 마초적으로 신화적인 행동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격이다.


과연 <천국의 신화>가 이토록 혹독한 평을 들어야 하는 만화일까? 이건 독자들의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이 비평을 통해 본 기자는 <천국의 신화>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 가운데 하나를 제시했을 뿐이고, 행여 본 기자가 만화 평론가라는 지위를 점할 자격이 있다면 이러한 시선을 불특정 다수 대중들과 공유해보려 할 뿐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비평가의 독설은 그 독설의 근거가 제시되는 한, 대상이 되는 작품이나 작가를 직접적으로 모욕하지 않는다. 비평가의 독설은, 대상이 되는 예술 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일 뿐이며,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독설이 부당하다면, 또 다른 비평가, 혹은 작가 자신이 반론을 제기하면 된다.


독설의 유무를 떠나 성의 있는 비평은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며 때로 비평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비평은, 사회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예술작품에 대해 국가 권력이 아닌 시민 자신의 합리적인 의사소통과정을 통해 견제하는 효과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평과 독설의 자유가 보장되는 수준에 따라 그 사회의 예술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고도 할 수 있다.
 


<천국의 신화> 사건과 비평의 부재


본 기자는 만화 <천국의 신화>가 사회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문화적 비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최근 음란물 판정을 받는 사태를 겪으면서 <천국의 신화> 혹은 작가 이현세가 마치 진보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되는 건 비평의 부재 현상이 낳은 어이없는 역사의 해프닝일 뿐이다. 본기자의 시각으로는 극우 민족주의 몬도가네 드라마일 뿐인 <천국의 신화>가 진보라니 말이 되는가? 


그러나...이러한 역사의 해프닝은 이현세 탓이 아니다. 이현세가 언제 자신을 진보라고 했나? 이현세의 작품 자체는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법원의 유죄판결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 때문에 이현세, 혹은 이현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이현세 자신에게 책임을 결코 물을 수 없다.



이게 바로 문제가 됐던 뱀빠굴 씬 초장부.


이현세를 엉뚱하게도 급진주의 세력, 혹은 체제 전복 세력으로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사법부였고, 법원의 결정이었다. 국가 권력이 이현세라는 보수적 작가를 진보 작가로 둔갑시켜버린 거다. 미리 밝혀두건대 <천국의 신화>에 대한 법원의 음란물 판정은 명백히 부당하다. <천국의 신화>는 그 작품성의 고하를 떠나서 일정한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예술작품이지, 성적 흥분만을 유발시키기 위한 음란물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보자. <천국의 신화>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가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단순히 국가 공권력을 향한 투쟁선언도 아니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거창한 논쟁도 아니다. 솔직히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은 이제 다들 지겨우시리라 믿는다. 70년대도 아니고 이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대중들은 아무도 표현의 자유라는 대의명분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본질은 <천국의 신화> 사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떠한 비평적 기능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천국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시선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는 거다. <천국의 신화>라는 문제유발적 작품이 발간된 이후 우리 사회에서 다루어진 쟁점이라곤 오직 "이 작품이 음란물인가? 아닌가?" 하는 단순한 물음밖에는 없었다. 


결국 사심없는 태도로 문제의 작품에 대해 다양한 시선을 겨누는 제대로 된 비평은 존재하지 않고 음란물인 이유와 음란물이 아닌 이유라는 극단적 대립만이 허공에서 공방전을 치루고 있었던 거다. 마치 린다김이 국방장관과 빠굴을 했는가, 안 했는가? 하는 따위의 정치적 쟁점처럼, 이 따위 논쟁은 논쟁 그 자체로 걷잡을 수 없이 음란해질 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은, 문제가 된 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만들어지기 전에 법률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법부에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의 책임을 전적으로 사법부에 돌리기엔 떳떳하지 못한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문화적 모순들이 있다.


 


툭하면 법을 찾는 문화계의 꼴불견들


특히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일어난 굵직한 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과연 비평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한양대 무용과 김민희 교수는 자신이 안무한 무용작품에 대해 혹평을 한 무용 평론가 송종건을 상대로 1억원 짜리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했다. 김 교수는 송종건 씨가 무용전문지 <댄스포럼> 4월호에 실적을 앞세워 관객을 기만한 비양심이라는 기사를 통해 허위사실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이었다.


송종건 씨는 이 기사에서 김 교수가 지난해 11월 16일 공연한 허행, 다음날인 17일에 공연한 점박이눈 그리고 올해 3월 14일에 공연한 비창이 같은 작품을 제목만 바꿔 공연함으로써 다른 작품인 것처럼 속인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 측은 “세 차례 공연에 제목이 서로 다른 것은 어느 제목이 가장 좋은지 찾기 위한 것일 뿐 송씨가 말하는 공연 실적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하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거다. (한국일보 관련기사)


한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인 배은환은 자신이 연주한 콘서트를 보고 연습부족, 불성실 등의 논평을 했다는 이유로(그것도 공적인 매체에 게재된 정식 비평이 아니라 콘서트 담당자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서) 논평을 한 예술의 전당 이사장 박성용을 상대로 무려 9억9천9백9십9만원 짜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얘기를 알고 싶으면 여기를 누르시라)


손해배상청구의 대상이 된 작품들이 과연 혹평을 받을 만한가 하는 문제, 즉 문제가 된 논평들의 내용이 정말로 정당한 논평인가, 아니면 부당한 논평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논평이 정당한 논평이든 아니든 어째서 법의 심판을 받는 상황으로 흘러가는가 하는 거다. 고소를 한 무용가나 음악가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며, 숨겨진 속사정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눈물겨운 하소연을 하더라도 그들이 예술작품에 대한 논평에 대해 법의 잣대를 들이대도록 만든 것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명백히 부당하다.


더구나 배은환의 경우, 피고인 박성용이 보낸 E메일은 콘서트 주최측의 내부 문건일 뿐이었다. 기획 콘서트를 주최하는 쪽에서 콘서트 사후에 연주의 질을 내부적으로 체크하는 건 사실상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더구나 사적인 메일에 불과했던 문제의 E메일을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그 메일을 입수한 후 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그 메일을 공개한 배은환 본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적인 메일을 제맘대로 공개된 매체에 실은 배은환이야말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해야 할 사람인 거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평론을 실은 매체는 해당 평론에 대한 반론을 실어줄 의무가 있으며 평론의 부당함에 대한 지적은 그러한 반론권을 통해 행사하면 된다. 평론이든 논평이든 자신의 작품에 대해 독설을 퍼부었다는 이유 하나로 거액의 법률적 소송을 불사하는 이들 예술가 나부랭이들은 과연 상식이 있는 잉간들인가? 



 
결론 : 독설이냐, 법이냐?

본 기자는 이미 오래 전에 소위 순수예술계의 지극히 비순수하고 몰상식한 실태를 다룬 기사를 여러 편 쓴 일도 있고 해서 더 이상 이러한 사건들을 자세히 논하고 싶지 않다.








내 성질 알쥐? 나의 춤을 비판하는 건 전쟁이야. 전쟁..


실상 비평의 부재, 혹은 비평에 대한 몰이해는 순수예술계에서건, 대중예술계에서건 만연된 현상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문화 전반에 만연된 현상이다. 우리 문화계에서는 비평가 자체가 수적으로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비평가도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화자찬 식의 상찬만 늘어놓기 일쑤다. 미술계의 경우 평론은 이미 주례사로 불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독설을 늘어놓는 평론가의 의도를 순수하게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예술가들만의 잘못도 아니겠다. 결국 비평의 부재라는 문제는 우리 문화계 전체, 더 나아가 합리적인 의사소통 가능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할 병폐다..


(비평의 부재 현상을 낳은 사회적 원인을 보자면, 한편으로 일제와 굼바리 독재 등 권위주의 정치 체제에 찌들어 산 우리 민족의 험난한 20세기 역사가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학연, 혈연, 지연 등에 얽메이는 우리 대중 사회의 전근대적 악습이 있다. 결국 우리 사회의 파행적 근대화의 역사가 서양의 근대 예술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그 속에 담긴 근대 정신,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을 받아들여 문화지체를 가속화해 옴으로써 예술계의 비평 부재현상을 낳은 거다. 이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자세한 분석 기사로 독자 열분들을 다시 찾아뵙기로 약속드리는 바이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


본 기사의 도입부에서 본 기자가 씨네 21의 짐 호버먼 칼럼을 패러디하여 써 본 <천국의 신화>에 대한 비평적 독설. 그러한 비평적 독설과 그에 대한 근거 있는 비평적 반론이 충분히 개진될 수 있었던들 <천국의 신화>가 법정에 설 이유는 없었을런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해당 작품이 명백히 예술작품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법관들이 그 작품에 대해 예술작품 아닌 음란물이라는 식의 주제넘은 개입을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청소년 보호라는 문제도 평론의 활성화를 통해 이루어야 할 문제다. 실제로 만화 <천국의 신화>는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으로만 말하자면 어떠한 예술작품도 면책될 수 없을 거다. 진정한 청소년 보호는 그러한 문제적 작품으로부터 청소년들을 격리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적 작품을 문제로서 바라볼 수 있는 청소년의 비판적 시각을 키워내는 데 있다. 


이제 또 한번 시끄럽게 <천국의 신화> 논쟁이 지나가고... 다음 차례는 또 뭘까? 언제까지 우리는 매번 문제적 작품이 나올 때마다 표현의 자유니 청소년 보호니 하며 밑도 끝도 없는 논쟁을 벌일 건가. <천국의 신화>에 대해 사법부의 개입이 선행되는 사태나 꼴불견 예술가들이 비평가의 독설을 견디지 못하고 법정 투쟁을 불사하는 거나 동일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 사회의 대중들은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용기 있는 선택을 준비할 때가 됐다. 


독설이냐, 법이냐? 합리적인 미학적 의사소통이냐, 공권력을 통한 억압이냐? 바로 그것이 문제로다.




딴지 논설우원 최가박당 
(hoggenug@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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