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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왕자병, 공주병에서 깨어나라 !

2000.1.12.수요일
딴지 문화부 최가박당
 

지난 호에 꼴통 보수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으로 본 기자가 쓴 기사가 실린 이후 상당히 많은 수의 독자들로부터 성원의 답신 메일을 받았다. 그 분들께 일일이 답해드리지 못한 점 이 자리를 빌어 사과드리며, 그 분들을 포함한 딴지 가족 모두에게 본 기자 똥꼬털을 여미며 삼가 새해 인사를 올린다.


새 천년에도 명랑사회 건설을 위해 졸라 달려갑시다. 건강하세요!





본 기자 이번 호에서도 음악계를 까발리기로 했다. 왜 자꾸 음악 갖고 그러냐고 하실 분덜이 있을 것 같아 먼저 잠시나마 썰을 풀어야 할 것 같다. 미학이네 예술학이네 공부하는 사람들도 무시하기 쉬운 문제인데, 음악은 모든 예술장르 가운데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래서 가장 골 빠지게 연구되고 논의되어야 할 예술장르다.


왜냐고?


우선, 음악이라는 넘은 도무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유령같은 넘이라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이 넘은 지하철을 스르륵 통과하는 패트릭스웨이지처럼 슬그머니 우리의 마빡을 통과해 들어와 우리의 의식을 조종하기까지 한다. 대중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대중예술은 모두 이러한 특성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지만, 그 특성을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는 게 음악이라는 거다.


함 생각해 보라.


종로 한복판에서 홀딱쇼 퍼포먼스를 벌인다 해도 보기 싫은 뇬넘들은 안 보면 그만이다.(누가 안 보겠냐만은.) 쉬리가 떠서 관객이 몇 백만 돌파했다고 해봐야 나머지 4000만명 이상은 쉬리를 보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하지만 떴다 하는 길보드 땐스 음악은 온 국민들의 의식 속에 기냥 직접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거다. 티브이와 라디오뿐만 아니라 전국의 길거리 여기 저기서 틀어대면,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도무지 그 음악을 듣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음악을 듣는 우리는 매체를 장악한 권력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들 권력자가 관리하고 들려주는 음악소리에 끽소리 못 하고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거다. 하다못해 버스를 타도 졸라 힘없는 승객덜은 기사넘이 좋아하는 쌍쌍파티 뽕짝 음악을 그저 체념하고 들어야 한다.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뽕짝음악 하나에서도, 우리는 깜장 썬글라스의 버스기사와 그가 운전하는 차에 온 몸을 맡긴 시민 사이의 권력 관계를 읽을 수 있는 거다.


요컨대, 음악은 작금의 예술과 문화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술장르다. 이 시대에 음악만큼 매스 미디어라는 권력에 의해 쉽게 조작 당하는 장르는 없으며, 음악만큼, 극단적인 계층들 사이의 극단적인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장르는 없다는 말씀이 되겠다.


따라서 우리 시대 음악이 처한 상황을 깊이 연구해 보면, 예술 전반, 혹은 문화전반이 처한 현 상황을 종합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는 말씀 (근데 울 나라 음악학자, 음악비평가덜 졸라 직무유기하고 있다. 음악학계, 내지 음악비평계에 굵직한 논쟁 한 번 있었다는 소리 들어봤나).


이상 본 기자가 음악계에 대해 유독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가 되겠다.


대중음악계의 문제는 동료기자인 크리티카님께서 잘 다뤄주고 계시니, 이 최가박당은 계속 모가지에 힘 좀 줘가며 고매한 클라시꾸 음악(혹은 예술임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음악)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클라시꾸 음악의 문제를 시작하기 전에 본 기자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강력하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직업은 무엇인가?>


이 희한한 물음에 어리둥절할 분덜이 있을 거다.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직업이 뭐냐니?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직업이 클라시꾸 음악가지 모긴 모야?







나, 직업이 머여여?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모르시는 말씀 마시라.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덜의 직업은 따로 있다. 그분덜의 직업은 대부분 교사다. 대학교수거나, 대학강사거나, 고딩강사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개인 레슨을 하는 강사인 거다. 


사실 개인레슨이야 다들 겸해서 한다. 법적으로 금지하건 말건 대학교수들도 개인레슨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에이, 그거야 연주활동 외에 남는 시간에 후진양성하는 거지, 왜 또 순진한 음악가덜을 매도할려구 그래? 하실 분덜이 있을 거 같으니, 별 수 없이 직업의 정의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자, 국어사전을 펼쳐 직업의 정의를 찾아보기로 하자. 짠!







직업(職業) : (명) 생활을 설계하고 꾸려 나가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하는 일.

우씨... 속았다. 국어사전의 직업에 대한 정의는 주부나 백수 같은 직업까지 포괄하는 졸라 애매한 개념이다. 본 기자가 다시 명확하게 정의하는 수밖에 없겠다.


한 마디로 직업은 돈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 = 돈벌이라는 기본적인 도식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을거다. 자아실현을 위한 어쩌구  하는 도덕책스러운 말은 접어놓자구.


우리가 어떤 활동을 직업적으로, 다시 말해 돈벌이로 한다고 하자. 이 상황을 폼나게 영어를 섞어 말하면, 우리는 그 일을 푸로페쇼날(professional)하게 하는 게 된다. 푸로축구, 푸로야구 할 때의 푸로라는 말이 푸로페쇼날의 줄임말이라는 건 상식적으로 잘 알 거다.


이쯤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울 나라에 과연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가 있는가? 클라시꾸 음악을 푸로페쇼날하게, 즉 직업적으로, 다시 말해 돈벌이 삼아 들려주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이다. (옆 사람이 돈 얘기로 순수음악을 더럽히지 마라 하고 침을 튀기거덩 가볍게 조디를 한 방 날려주자. )


답을 말하자면, 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수타쿠래푸투로 돈버는 쌈장이라는 넘도 있고, 묘기당구로 먹고 사는 뇬넘들도 있는데 음악가라고 푸로가 없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그 수는 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음악가로도 돈 벌고 교사로도 돈 버는,( 이 경우 대부분 교사로 버는 돈이 훨씬 많다)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뇬넘들을 모두 제외시키고 푸로 음악가의 자격을 전업 음악가로 한정한다면, 그리고 그들 음악가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제한한다면, 그 수를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다. 오직 무대 위의 연주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명실상부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은 이 땅에서 도무지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거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잠시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덜의 일생을 함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그들은 빵빵한 부모의 도움으로 수천만원대(혹은 억대)의 악기를 마련하고, 중고딩 시절부터 고액의 레슨을 받아가며 마침내 음악대학에 진학한다. 음대생이 된 그들은 때로 얼라들 레슨해서 용돈도 벌어가며 나름대로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갈 거다.


하지만,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화려했던 지난 날은 다 가고, 이제 그들을 받아줄 곳이 없다. 그들은 마침내 한 떨기 초라한 백수의 길에 들어서는 거다. 이들 대책 없는 백수들은 자신만의 음악세계와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갈 능력도 없고, 그런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다. 교수님덜이 그런 거 가르쳐준 적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선배 음악가들을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한두 해 백수 생활을 하다 지쳐갈 즈음, 그들은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나즈막히 소리치게 되는 거다.


그래, 결심했어! 유학갔다 와서 폼나게 교수가 되는 거야!


울 나라 유학생들이 해외에서 쓰는 돈은 연간 8000억. 그 가운데 절반이 이들 음대 유학생들에 의해 뿌려지는 돈이다. 연간 4000억을 외국에 뿌려대는 이들 음악가 지망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학문턱에도 못 가보고 빌빌거리다 돌아오고 말지만, 어렵사리 학위까지 따고 귀국해봐야 그들 역시 상당수는 다시 백수의 길에 들어선다.


그 가운데에서 경쟁자들을 제치고 어렵사리 음대 교수, 혹은 음대 강사 자리를 꿰찬 엘리트 그룹들. 그들은 이제야 한숨을 놓으며, 자신의 힘겨웠던 인생을 돌이켜보는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날의 추억들 속에서 불현듯 깨닫는 게 있다. 본전생각이다.



아!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꼰대들에게 쏟아부은 그 엄청난 액수의 돈들. 이제 내가 꼰대가 되었으니 그 돈들 다시 챙겨야쥐!


지난 호에서 지적했던, 입시부정 관련 교수들이나 악기 사기 관련 교수들은 모두 이런 본전생각에 눈이 멀어버린 잉간들이다. 설사 그렇게까지 맛탱이가 간 잉간들은 아니더라도 울 나라 음대교수들은 모두 이러한 본전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몰래 몰래 불법적인 개인레슨을 자행하는 음대교수들이 자신의 범법행위를 스스로 합리화하는 데에는 (표면적으로야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한 일 운운하겠지만) 이러한 본전생각이 깔려있는 거다.


그들은 이제 차츰차츰 자신이 무대 위의 연주가가 되기 위해 지금껏 달려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건망증, 내지는 기억상실의 단계에 도달한다. 그들은 마치 음악교육에 목숨을 건 듯, 가르치고 또 가르칠 뿐이다.


아~~ 스승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울 나라에서 교수자리를 꿰차기만 하면 이렇게 모두들 음악교육의 화신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날이 갈수록 유학 직후의 연주실력에서 끊임없이 퇴보해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들은 왜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걸까? 가르치는 게 연주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라서?


노! 답은 간단하다.







연주회 날 요 꼬라지 안 나려면..

초대권을 뿌려도 가족친지들만 오는 연주회, 돈을 벌기는커녕 빵꾸만 평펑 나는 연주회를 위해 정열을 바치느니, 수입 쏠쏠한 레슨에 몰두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사실상 변변한 연주회 한 번 열어보기 위해서라도 레슨에 몰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고? 그래야 빵꾸 메꿀 거 아닌가.


몬 소린지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을 독자분덜을 위해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설명해보기로 하자. 다음은 울 나라에서 지명도가 상당히 높은 어느 실내악단의 연주회당 평균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표다. 빨간 색으로 칠한 부분에 주목하면서 이 표를 함 봐주길 바란다.














수입 (단위 : 만원) 지출 (단위 : 만원)
 광고협찬금 : 회사당 100-1,000

 티켓판매
유명연주자의 협연 : 150-200
무명연주자의 협연 : 50


 기타 (CD판매) : 10-30


 


 


 

음악회장 대관료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 기본대관료(350)+부대설비비(50) = 400

개런티 (합주단 멤버 30명기준)
20명(기존단원) X 20 + 10명(객원) X 15 = 550

 외국 협연자가 있을 경우
(항공료, 개런티, 호텔비 등)
200-300

팜플렛 인쇄비 : 200-300

기타경비 : 100
<합계> 200 - ? <합계> 1,350-1,500


이 실내악단은 두 세 달에 한번 꼴로 연주회를 하는데, 연주단원들의 개런티는 연주회당 보통 15만원에서 20만원씩 지불하며 월급 같은 건 없다. 물론 이들더러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걱정해줄 필요는 없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다른 악단의 단원을 겸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나 대학강사라는 폼나는 직업을 따로 갖고 있으니까. 대부분 외국에서 번쩍이는 학위를 따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로서 울 나라 최상류 계급의 사람들이니 여러분들의 동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각설하고. 문제는 위의 표에서 티켓판매의 부분, 즉 이 악단의 연주회에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찾아와서 얼마만큼의 돈을 내느냐 하는 거다. 티켓판매 부분을 똑똑히 함 보라. 저 처절한 액수를...


한번 연주회를 가질려면 1,350에서 1,500만원의 돈이 드는데, 유료 관객수입은 끽해야 50만원, 세계적인 지명도를 갖춘 협연자가 연주에 참여할 경우에나 150만원 정도 모인다는 거다. 관객수입이 50만원이면, 도대체 몇 명이 돈을 내고 연주회를 본다는 걸까? 모두들 제일 싼 표(1만원)로만 들어왔다고 해도 50명밖에 안 된다. (참고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의 객석수는 총 2,600석이다.) 50명 빼면 나머지는 모조리 초대권 무료 입장객이라는 말씀.


만약 이 악단이 관객수입만으로 수지타산을 맞추려는 택도 없는 시도를 할 경우 연주회당 최소 1,000만원 이상의 적자를 보게 되어 있다. 결국 이들은 적자를 어떻게 메꾸겠는가. 물론 기업에 사정해서 협찬을 받아내고, 심지어 악단의 책임자가 눈물겹게 사재를 털기도 한다.


하지만, 공공연히 자행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협연자에게 상당량의 입장권을 강제로 사게 하는 거다. 협연자로서는 자기의 연주경력을 늘려가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표를 살 수밖에 없다. 자기가 연주하는 연주회 표를 자기가 사는 조까튼 일이 벌어지는 거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귀국독주회와 음악 발표회들이 하루에도 수 십회씩 열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믿거나 말거나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불타는 예술혼 때문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들이 자기의 본업인 교사로서의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음악가로서의 경력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래야만, 음악가 겸 교사로서의 위치를 다져갈 수 있고, 그래야만 차질없이 먹고 살 수 있다는 거다.





자. 이제 정리를 좀 해보자.


결론적으로, 울 나라에서 클라시꾸 음악 분야에 뿌려지는 그 막대한 돈은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를 만드는 데에는 거의 쓰여지지 않는다. 그 돈은 끊임없이 왜곡된 음악적 사제(師弟)지간을 재생산하는 데에 쓰일 뿐이다.


가족잔치 연주회 열어 빵꾸난 돈을 제자들 레슨 수입으로 메꾸는 클라시꾸 음악가덜의 행태, 즉 경력 쌓기 위해 선생이 형식적인 연주회를 열면, 거기서 생기는 만성적자를 그의 제자들이 졸라게 메꾸어가는 조까튼 현상이 울 나라 음악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거다.


이러니 제대로 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덜이 만들어질 리가 있나. 얘기가 좀 길어지겠지만, 이쯤에서 최근 예술계의 쟁점 가운데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최근 대학승격 문제를 둘러싸고 예술종합학교(본 기사에서는 음악원의 경우로 한정)와 기존 예술대학 사이에서 야기된 물어뜯기 한판 쌈이 벌어졌드랬는데, 지금까지 본 기자가 설파한 음악계의 문제를 전제하지 않고는 그 쌈의 본질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종합학교는 1993년에 바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을 키우겠다는 야심찬 기획을 가지고 출범했다. 그들은 예비학교를 통해 어린 음악 영재를 키우는 등, 파격적인 예술 교육을 실행하여 왔으며, 현재 이곳 학생들의 연주력만큼은 설대를 능가하는 최일류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을 키우겠다던 그들의 목표는 달성되었을까? 유감스럽지만 우리 사회의 벽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예술종합학교 사태와 관련한 예술종합학교 측과 일반 예술대학 측의 핵심주장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술종합학교] : "이제 우리도 때가 됐으니, 정식 대학으로 승격해서 실기전문학위를 만들어 국제경쟁력을 높이겠다."

[일반예술대학] : "애초에 학위 따위 필요 없는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 만들겠다고 하던 넘들이 이제 와서 웬 학위 타령이냐. 니네 대학승격하면, 가뜩이나 심각한 입시경쟁이 더 심해질 거 아니냐."


예술계에서 쟁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건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이 중요한 쟁점을 가지고 논쟁하는 게 아니니 딱할 노릇이다.


설대를 비롯한 일반 예술대학들은 겉으로야 예술종합학교더러 이상을 이상 그대로 실현시켜라 하고 근엄하게 주문하고 있지만, 내심 예술종합학교가 대학승격이 될 경우 재능 있는 학생들을 빼앗기고 결국 2류 3류 대학으로 전락할 것을 두려워하여 온몸으로 대학승격을 막고 있다. 한 마디로 밥그릇을 걱정하는 거다.


그렇다면 예술종합학교는 떳떳한가. 일반 예술대 측의 주장대로 그들이 애초의 이상을 저버린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까놓고 얘기해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 에게 학위가 모가 중요한가? 음악가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는 실력을 갖췄으면 됐지. 장영주나 장한나가 학위 땜에 인정받나 말이다. 국제경쟁력이라는 말도 그렇다. 애초에 예술종합학교는 예술계의 망국병인 유학을 없애고 토종 예술 풍토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버트, 조금만 여유를 갖고 바라보자.


예술종합학교가 대학으로 승격이 된들 좀 어떤가. 예술종합학교가 기존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좇겠다는 게 아니지 않는가. 학위 없으면 도무지 먹고 살 수도 없는 울 나라 실정을 뻔히 알면서 그네들더러 언제까지 맨땅에 헤딩하고 있으라는 건가.


더구나 예술종합학교는 단순히 서구 클라시꾸 음악만이 아닌, 민족적 정체성을 갖춘 총체적 한국 예술의 확립을 목표로 꾸준히 문화적 인프라 구축에 힘써오고 있다. 그 이상이 실현된다면, 예술종합학교 졸업생들만의 혜택이 아닌 예술계 전체의, 아니, 온 국민의 혜택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학위나 대학승격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울 나라에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이 만들어질 수 있느냐는 게 핵심적인 문제인 거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술종합학교와 일반 예술대학은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다.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거다.


사실상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음악교육 체제하에서는 자신의 온 정열을 무대 위에 바치는 창조적이고 전문적인 음악가, 즉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가 양성될 수 없다. 음악 교육, 더 나아가 예술교육 전반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상황인 거다. 예술종합학교를 비롯한 음악 대학의 양식 있는 분덜은 허심탄회하게 머리를 맞대고 공존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대학로에서 데모 따위나 할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예술교육의 개혁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한물간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은 10만원 20만원하는 무시무시한 티켓값에도 불구하고 연일 매진을 기록하는 반면, 한창 무르익은 기량으로 고국 땅에 돌아온 젊은 연주가들의 세계 정상 수준의 귀국 독주회는 싸구려 입장권과 초대권을 뿌려대봐야 가족 친지들이 오갈 뿐인, 허영으로 찌든 천박한 음악문화.


기업의 후원이 필수적인 클라시꾸 악단들의 재정적 어려움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천민 자본주의의 첨병 재벌들. 퇴근 후 단란주점에서는 수십만원을 거뜬히 쓰면서도 음악회 따위에 쓰는 돈 일이만원이 아까워 벌벌 떠는 샐러리맨들의 인색한 문화생활. 재산증식, 주식 걱정에 집안에서 음악 한 곡 틀어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새끼들 피아니스트로 키워볼까 택도 없는 꿈을 꾸는 그들의 욕심많은 아내들. 입시대비랍시고 고교 2학년부터 학교에서 추방되는 음악수업... 


사방팔방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있는 이러한 오염된 문화적 환경이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씨를 말리고 있는 거다. 음... 침 튀기며 말하다 보니 내용이 넘 길어진 거 같다. 좀만 기다려라. 이제 결론을 말할테니.


맨 앞에서 전제했듯이, 음악은 제반 예술 현상을 총체적으로 반영해주는 예술장르다. 클라시꾸 음악이 문제라면, 대중 음악이나 다른 예술 장르도 다를 바가 없는 거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만 해도 울 나라에서 전업 푸로 대중음악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에쵸티? 에세스? 그 뇬넘덜이 음악가이기나 한가? 문학계의 전업 푸로 작가는 어떤가? 미술계의 전업 푸로 미술가는?


클라시꾸 음악계의 경우, 문제의 초점은 그들의 잘난 음악이 울 나라 중생들의 삶과 아무런 연관성을 맺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즉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계는 울 나라 사회 한편에 거대한 성곽을 지어놓고 철저히 지네들끼리 먹고사는 경제구조를 만들어놓고 있는 게 문제라는 거다.


이들이 그 거대한 성문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한, 청중들과 직접 만나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적극적인 푸로 근성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는 거다.


합리적인 예술 전통을 가진 나라들은 아직도 삶과 예술이 느슨하게나마 연관을 맺고 있다. 유럽 선진국으로 배낭여행을 다녀보신 분덜은 길거리 음악가들의 모습을 본 경험들이 있을 거다. 길거리에서 악기 케이스나 모자를 앞에 놓고 자신만의 연주를 들려주는 이들. 그리고 그 음악을 함께 즐겨주고 기꺼이 돈을 던져주는 길거리 청중들의 모습. 바로 이들 길거리 음악가들이야말로 전업 푸로 클라시꾸 음악가들의 초보적인 형태인 거다.


적자 투성이 무대 위에서 드레스에 턱시도에 한껏 폼잡는 데만 몰두하는 울 나라 클라시꾸 음악가덜. 당신들은 과연 이들 길거리 음악가들만큼이라도 푸로의식이 있는가.





21세기의 문지방 위에 선 지금, 이제 우리도 20세기의 부실공사 클라시꾸 음악계라는 이름을 가진 높은 담벼락의 성곽을 과감히 허물어뜨려야 할 때다. 


그 성곽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힘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문화적 저변의 확대에 있다. 중딩 1학년 수준의 공중파 방송으로 상징되는 바, 이 땅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문화적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클라시꾸 음악계의 성은 굳건하게 현실과 담을 쌓을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현실을 탓하기엔 음악가덜 니네의 마빡이야말로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무대 위의 열정은 온데 간데 없고, 본전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니네 클라시꾸 음악가덜. 정말로 정말로 부끄럽지 않은가.


성밖의 삶을 함 봐봐라. 지쳐 축 처진 대중들의 어깨가 보이지 않는가. 현실에 의해 갈갈이 찢겨버린 그들의 소박한 꿈들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그들을 보며 눈물 흘릴 수 없다면, 이미 당신은 예술가가 아닌 거다.


예술은 현실에 지친 잉간들에게 주는 구원이요. 예술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딛고 일어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마술사들이다. 이를 위해 예술가는 멀쩡히 두 눈을 번쩍 뜨고 꿈을 꾸어야 하는, 십자가 고행과도 같은 수난을 감수해야 하는 거다.


그러나, 예술가를 자처하는 이 땅의 클라시꾸 음악가덜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세상 모르게 잠에 취해 그들만의 꿈을 꾸고 있는 거다. 


클라시꾸 음악가덜이여 ! 꿈에서 깨어나라. 고립된 예술의 성에서 살고 있다는 니네들의 망상, 그 공주병과 왕자병에서 깨어나라는 말이다 !





- 딴지 문화부 전문기자     
최가박당(hoggenug@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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