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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쇄된 도시

 

확실히 나는 운이 없는 편이다. 살면서 무엇 하나 쉽사리 얻어지는 게 없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나름 인생 걸고 넘어온 단 1년짜리 유학 생활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니.

 

매일 비가 내렸던 우울한 겨울을 지나 드디어 화창한 봄 날씨가 찾아올 때쯤, 영국 정부의 이동제한령, 일명 ‘락다운(Lockdown)’이 발표되었다. 지난 3월 23일 저녁,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발표한 조치는 구체적이고 직관적이었다.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당신은 No라고 대답해야 한다.”

 

지금부터 이야기는 봉쇄된 도시 안에서 바라본, 지난 3주간의 영국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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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다운 이전: 전운이 감도는 기숙사

 

이미 락다운 시행 전부터 대학 기숙사에는 심상치 않은 낌새가 감돌았다. 지난 3월 12일, 보리스 총리의 집단 면역(Herd Immunity) 전략 발표에 누구보다 먼저 마스크를 착용했던 아시안 유학생들은 매우 민감해졌다. 정말 영국의 70%가 감염될 때까지 가만히 두겠다는 거냐며 격분하는 이들이 생겼다. 몇몇 유학생들은 빠르게 고국 행 비행기를 구해 떠나기도 했다.

 

조금씩 상황이 나아져가던 한국과 대조적으로 영국에는 나쁜 뉴스들이 연일 계속되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도 애가 탔다. ‘인종차별 당하지는 않니?’, ‘마트에 생필품은 있니?’라며 안부를 물어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따뜻한 관심들이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지내던 나를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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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고 있는 브리스톨은 런던이나 맨체스터 같은 대도시가 아니어서인지, 저녁 펍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스크를 쓴 아시아인들에 대한 조롱 섞인 시선도 아직 남아있을 때였다. 사람마다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랐던 탓에 곳곳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났다.

 

다국적 유학생들이 모여 사는 기숙사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중국인 룸메이트는 전기밥솥 하나로 방 안에서 모든 식사를 해결하며 공용 주방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시국에 생일이라며 고국에 다녀온 이탈리아인 룸메이트는 다른 룸메이트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다른 경험과 입장이 충돌하며 기숙사 건물마다 크고 작은 잡음이 이어졌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와 명확하지 않은 가이드라인 탓에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영국인의 아시안 혐오가 많이 알려졌지만, 아시안 학생들도 영국인들의 실상은 정말 미개하다며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공격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요즘 아시안 학생들, 외지에 나가서도 기죽지 않고 대차게 잘 따진다.

 

나는 3월 말에 독일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참가하겠다고 하니, 중국인 룸메이트들은 끊임없이 다가와 설득했다.

 

‘너 코로나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아니? 지금 독일, 스페인, 프랑스 다 난리도 아니야! 너 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다?’

 

이어지는 설득에 진지하게 재고해보겠다며 매번 달래서 돌려보내곤 했다. 돌이켜보면 다 부질없는 논쟁이었다. 바로 다음날 보리스 총리가 락다운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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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다운 실시: 눈물의 환불 러쉬

 

비록 모든 저축과 대출까지 끌어모아 떠나온 유학이지만,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는 한 번 참석해봐야겠다는 부푼 꿈이 있었다. 나름의 거금을 들여 일찌감치 독일 왕복 항공부터 현지 교통 및 숙소 등 예매를 모두 마쳐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예약들은 락다운 조치와 함께 골칫덩어리 환불 러쉬가 되어버렸다.

 

그뿐만 이랴. 두근두근 기대하던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직강부터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혁오밴드’ 콘서트까지! 예매 내역과 캘린더를 바라보며 뿌듯해했던 행사들은 얄짤없이 모두 취소되었다. 1년 유학으로 얻고자 했던 좋은 경험들이 모두 취소되는 허탈감이 앞섰지만, 정말 스트레스 받는 건 환불 절차였다. 사상 초유의 취소 사태에 저가 항공 및 숙박 관련 회사들은 거의 마비 수준이었다. 느린 처리 속도 탓에 눈물의 환불 러쉬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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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가 표시된 카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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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된 공사현장

 

취소 대란 외에도 많은 소중한 기회와 약속들이 멀어져 갔다. 친구들과 함께 펍에서 이야기 나누던 일상의 행복이 사라졌다. 정들었던 대학원 동료들이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갔다. 학교에서는 필요한 논문 지도나 워크숍 같은 남은 일정들을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과제 제출 일정을 조절해 주는 등 빠르게 대처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진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불평불만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영국 상황 때문이었다. 어느새 급속도로 불어난 영국 확진자 수는 한국을 추월했다. 보리스 총리와 찰스 왕세자 같은 유명 인사들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영국인 친구들은 부정적인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특유의 영국 유머를 뽐냈지만,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를 막을 순 없었다. 길거리의 영국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다.     

 

락다운 이후: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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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사람 많던 거리.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았다

 

한국 친구들에게 이곳 사정을 전하다 보면, 영국의 락다운 조치에 어리둥절해하는 경우가 많다. 나갈 곳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한국처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를 두고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 학교도, 도서관도, 카페조차도. 문을 연 곳은 어디에도 없다. 문자 그대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니, 길거리를 나서도 황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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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한 박물관 입구는 노숙자의 거주지가 되었다

 

유동인구가 줄자 거리의 노숙자들이 특히 더 눈에 띈다. 행인들 사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그들이, 이제 거리의 주인이 됐다. 폐쇄한 건물 입구, 볕 좋은 자리에 이들이 자리를 폈다.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면서도, 이 락다운 도시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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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직원이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는 슈퍼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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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료품점 앞 2m 간격 유지 대기선

 

식료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이라고 자유롭게 갈 수 있지는 않다. 모든 슈퍼마켓 앞에는 보안직원들이 입장 인원수를 제한한다. 대기자들은 2m 간격으로 부착된 스티커에 맞춰 줄을 선다. 물건 사재기(Panic Buy)를 예방하고자 인원 당 살 수 있는 식재료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일행 중 한 명만 매장에 들어가게 하는 곳도 생겼다.

 

또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밤낮없이 바빠진 영국 보건 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종사자들이 식재료를 구입하지 못하자, 특정 저녁시간대에는 해당 보건 의료서비스 종사자만 쇼핑이 가능한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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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볕에도 불구하고 공원에 일광욕하는 이가 한 명도 없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하루 한차례 운동을 위한 외출 만을 허용했다. 과연 영국인들이 락다운 조치를 잘 따를지 의문이었다. 햇볕 든 날은 남녀노소 공원으로 뛰쳐나와 일광욕을 즐기는 영국인들이다. 공원에 꽃은 만개하고, 봄볕은 이토록 따사로운데, 그 영국인들이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실제로 락다운 초반에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제법 보였다.

 

그러나 경찰들이 꾸준히 순찰을 하며 사람들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락다운 조치에 따라, 경찰은 3명 이상 모여 있으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해산을 요구할 수 있다. 경찰은 정말 꾸준하게 공원을 돌며, 앉아 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집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으니 동참합시다.’라며 귀가시켰다. 혼자 공원에서 잠시 광합성을 즐기던 나도, 경찰의 권고에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얄궂은 인생이여, 그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자타 공인 천성 밖돌이인 나는 코로나19 락다운으로 인해 이렇게 기숙사에 갇혀 창밖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날씨가 정말 사람한테 영향을 많이 주는구나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쨍한 햇볕과 파란 하늘, 그리고 살랑이는 봄바람이 얼마나 사람을 애타게 하는지. 야속하게도 락다운 이후로 영국의 날씨는 정말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오죽하면 이런 밈(meme: 정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 사진, 또는 짧은 영상)까지 유행했을까. 참으로 얄궂은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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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영국 날씨 VS 격리 기간 영국 날씨 - 출처 <meme>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며 삶의 활력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친구들과 화상회의 어플로 온라인 펍을 열기도 하고, 룸메이트들과 프라이팬과 병뚜껑으로 실내 배드민턴 놀이를 하고, 유튜브 요리 채널을 따라 온갖 요리에 도전하면서.

 

사실 운 없는 인생이었던 나는 알고 있다. 인도 여행 중 지프 기사가 나를 산속에 버려두고 도망쳤을 때에도, 네팔 여행 중 오토바이에 치였을 때에도 그랬다. 아무리 원망스러운 일이더라도, 지나 보면 좋은 경험이다. 보라, 벌써 글로 써서 돈을 벌고있다. 집에 갇혀있는 체험, 이게 뭐라고 딴지는 내게 원고료를 준다는 건지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2020년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을 때 내가 영국에 있었는데 말이야…’라며 오래오래 추억할 이야깃거리가 되어주리라 믿으면서, 오늘도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씩 해본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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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