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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자의 장르야 놀자] <스탠드>, 30년 전에 이미 신종플루 대유행을 예감하다

 

2009.8.27.목요일

 

새삼스레 스티븐 킹의 <스탠드>가 각광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 <스탠드>가 소개됐고 그로 인해 서점가에서는 이 책의 판매량이 늘어났으며 실제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경우, 판매순위가 무려 10,000등 이상이나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게 다 그 놈의 신종플루 때문이다. 

 

 

미국에서 1978년 처음 발표되고 1989년 완전판이 발매된 이후 2007년에야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스탠드>는 (<미래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1996년 축약판이 소개된 적이 있다.)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간다는 설정이 최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와 맞물리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무려 원고지 9,000매에 달한다는 (국내에는 총 6권으로 출간된) <스탠드>는 실은 꽤 간단한(?) 이야기다.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실험하던 독성 강한 감기 바이러스가 유출돼 삽시간에 시민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천만다행으로 면역력을 품고 있던 소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아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것. 굳이 <스탠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은 <미스트> <셀> 등 적지 않은 수의 지구 종말 소설을 발표했다. 개중 <스탠드>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현실성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스탠드>의 구상에 대해, "친분 있는 의사로부터 일정한 주기로 변이를 일으키는 독감의 특성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킹의 말마따나, 요 몇 년 사이 조류독감에서 돼지독감으로 변이를 일으킨 사례만 보더라도 <스탠드>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법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 벌써 유행으로 번져 하루가 멀다 하고 감염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사망자도 속출한다는 점에서 <미스트> <셀> 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실제로 두 작품은 <스탠드>와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건 발생의 계기에는 다소 황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미스트>가 차원의 문을 뚫고 나온 안개 속의 괴생물체를 앞세워, <셀>이 폰 사이코로 지칭되는 일군의 좀비를 앞세워 종말론적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스탠드>에 대항(?)하기에는 현실과 괴리된 약점이 너무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스탠드>는 독감으로 몰락하는 세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것은 곧 변종독감의 맹위에 따른 과학의 종말이 마법의 부활을 부르고 각각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른 이들 진영이 극단적인 전쟁을 통해 대립하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스티븐 킹은 과학과 마법이라는 상징적인 키워드를 통해 잿더미로 화한 문명 속 이성이 눈을 감고 두려움이 눈을 뜨는 지점에서 사람들의 혼란을 극대화한다. 가족, 친구, 친지 할 것 없이 독감으로 모두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기에 측정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며, 그래서 보이지 않는 마법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스티븐 킹의 특기다. 킹의 진가는 상황의 묘사보다 오히려 심리묘사에 있다. <스탠드>는 사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기보다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인물들의 극한 심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겉보기엔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스탠드>는 결국 사람들 마음속의 심리적 종말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이 사라진, 마법과 본능만이 살아남은 시대에서 과학과 마법은 대립하고 이성과 본능은 서로를 파괴하려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인다. <스탠드>가 제시하는 종말의 풍경은 과학과 이성으로 제어되던 인간의 벌거벗은 본성을 드러내는 시험대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시험대를 통과하고 다시 과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를 읽을수록 자꾸 궁금해지는 이유는 현재 신종플루와 직면한 우리의 일련의 혼란스런 행동들과 극중 묘사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탠드>는 종말의 풍경을 묘사한 이야기라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 혹은 일말의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스티븐 킹은 이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저 아이한테 이제껏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준다면, 저 아이는 자기 자식들한테도 이야기해 주겠지. 자손들한테 경고하는 것이지. (중략) 제발 과거의 교훈을 배우렴. 이 텅 비어 버린 세상을 너희 교본으로 삼도록 하려무나.
"프래니"
스튜가 몸을 돌려 프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스튜어트?"
"너는...... 너는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에서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프랜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더니 침묵에 빠졌다. 등유 램프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프랜의 눈빛이 매우 우울해 보였다.
"나는 모르겠어."
프랜이 마침내 말했다. 자신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듯싶었다. 뭔가 더 말하려고 기를 썼다. 첫 번째 답변을 해명하려고. 그러나 그저 되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르겠어."

 

신종플루가 창궐하고 있는 작금에 <스탠드>를 생각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작품이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킹은 이미 30여 년 전에 독감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세상에 퍼져 혼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좋은 소설은 독자를 즐겁게도 하지만 미래를 예측해 간담을 서늘케도 만든다. 그래서 <스탠드>는 내게 가장 무서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겠지만 소설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스탠드>는 바로 그런 걸작이다.

 


6권 다 읽느라 이 여름에 진땀 뺀
허기자(www.hernamwo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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