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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기나긴 독재의 추억 - 박정희를 찬양하는 그대들에게

 

2009.8.28.금요일

 

김대중이 박정희와 이승만 사이에 누웠다. 그들에 비하면 십 분의 일 정도에 불과한 작은 공간에. 그동안 동작동 현충원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곳은 그저 호국영령들이 잠든 엄숙하고 무거운 곳일 뿐 민주주의하고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거기 그가 누었으므로. 그의 작은 무덤에서 풍기는 인동초의 향기는, 저 두 무덤에서 짙게 뿜어나오는 퀴퀴하고 음습한 썩은 내를 누르고도 남아 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박정희.

 

 

아직도 그의 업적을 들먹이며 존경이나 숭배, 신앙 어쩌구 하는 글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참 취향 특이한 인간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독재를 그리워하는 인간들. 폭력적 지배에 향수를 느끼는 인간들. 그건 마치, 채찍질에 길들여져 처 맞지 않으면 쾌감을 느낄 수 없는 변태적 마조히스트를 연상케 한다. 당신의 채찍질이 그리워요. 제발 저를 다스려 주세요. 혹독하고 잔인하게. 아흐~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그저 니들은 평생 그렇게 살아라, 하며 외면하면 될까? 하지만 그러기엔 왠지 찝찝하다. 마치 그들이 그리워하는 저 독재의 악취가 시나브로 내 콧구멍으로도 스며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문득 오싹해 지기도 하고, 그들 주변의 인간들 중 올바른 섹스의 방법을 배우지 못한 일부가 섹스가 무엇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마조히스트가 될 것 같아 위태롭기도 하고.

 

이미 마조히즘 중증 변태야 포기하더라도, 그런 위험 앞에 놓인 소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뭔가 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명랑빠굴의 즐거움을 배운 우리가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며 시대적 요청이고 성스러운 책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필자 나름의 그 뭔가, 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는 스탈린이 1928년에 시작한 소비에트 부흥의 기치였다. 스탈린의 경제개발은 철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결과 경제개발 시작 당시 소련의 연간 조강능력은 430만 톤에 불과했지만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난 뒤인 1940년에는 1700만 톤까지 올라갔다. 같은 시기 독일의 조강능력이 1600만 톤에서 1910만 톤 정도의 성장에 그친 것과 비교해보면 실로 엄청난 성과임을 알 수 있다.

 

 

소비에트에서 제2차 경제개발이 끝난 10년 뒤인 1959년 12월, 지금의 건설교통부에 해당하는 부흥부의 이기홍 국장이 경제개발3개년 계획안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오~ 노우! 불구대천의 원수 스탈린의 방식은 따를 수 없습네다. 하며 그 계획을 묵살해 버린다. 하지만 4,19혁명 직후인 60년 5,12일, 장면 과도정부는 이기홍의 3개년 계획안을 토대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을 발표, 하긴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흘 후 5, 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무산된다. 그러나 이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에 의해 곧 다시 부활한다. 그렇다고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반드시 스탈린의 표절이라는 건 아니다. 그저 그 경제개발 몇 개년 계획이라는 게 박정희의 발명품은 아니란 거지. 그리고 박정희 경제개발은 스탈린보다 오히려 미국에 의해 완성됐다고 보는 게 옳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민족주의와 쿠바의 반미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 돌파를 위해 택한 방식이 바로 로스토의 반공주의 독재개발론이다.

 

후진적 미개발 국가의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친미국적 군부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우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실현한 후, 그 바탕 위에서 후진 사회적 부정부패들을 척결, 개혁하면서 경제건설과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자는 이론. 이 이론은 남한에 그대로 적용되어,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표방한 강력한 반공이념과 결합,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정책으로 채택된다. 북한의 공산주의 독재개발론에 대응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반공독재개발의 출발이다.

 

그 정책이 동남아의 다른 반식민지 국가들에서는 실패했음에도, 남한에서 비교적 성공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다른 나라들은 직접 공산주의와 접하고 대결하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남한은 월등하게 발전을 이룩한 북한과 직접 경쟁하는 상태였다. 당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분단대치국가에는 특별히 집중지원을 퍼부었다. 동독에 대항해 서독을, 북한에 대항해 남한을. 말하자면 남한은, 2차 대전 후 공산주의에 대항해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시범지역이었다.

 

이에 더해진 국민의 근면성. 우리는 그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근로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 그 명성이 드높다. 자본진영의 세계적 지지기반. 미국의 일방적 경제 지원. 그 중간 거점인 일본의 자발적 협조. 박정희의 독재. 여기에 국민의 순응과 근면, 희생이 포함된 것이 바로 박정희 경제개발의 카테고리들이다. 따라서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실패하고자 지랄발광을 하지 않는 이상 실패란 있을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실패하고자,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랄발광은 했기 때문에.

 

 반공독재개발이 낳은 부작용들

 

가장 먼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가치가 심하게 평가절하 되었다는 것. 이 폐해는 지금까지 사회 전반에 깊이 깔려 가장 풀기 어려운 과제 중 하나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건 상당히 오래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에도 나오듯 식민지하에서도 노동자의 각성과 조직화는 진행되었었다. 물론 식민지와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은 곧 프롤레타리아 이념실천의 장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반공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부터 위축되기 시작한다.

 

소위 전평이라 칭해지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주축으로 활동하던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은 이승만과 미국의 합작공세 아래 힘겹게 지탱되다 6,25를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다. 그리고 6월 항쟁 이후 새로이 자본주의하 노동운동이 부활할 때까지 기나긴 암흑기를 갖는다. 그 시기는 전 국토를 병영화하고 전 국민을 병사화하던 때였다. 노동자는 모두 산업전사였고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는 존재였으며 좀 부드럽게 부르면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 와중에 놓인 전태일도 공돌이 산업전사였다.

 

 

독재자는 노동자들을 다스리는 골치 아픈 길보다 소수 자본가를 상대하는 편한 방법을 택했다. 정주영이나 이병철, 김우중은 자신들의 능력보다 박정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박정희는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은 노동자를 다스리는 구조. 그런 구조에서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보다 갑절에 가깝게 혹사당했고 그 이익은 모두 재벌의 소유가 되었으며 독재자는 그 소유를 분배해 가졌다. 재벌은 그렇게 탄생했고 독재는 그렇게 살을 불렸다. 

 

사실 지금 우리사회에 남아있는 수많은 문제점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된 반공독재정권의 유산이다. 노동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므로 노동자의 자기비하가 만연하고 반대로 학력이 지상목표인 사회가 되었다. 아버지는 프레스에 손가락을 잘려가며 아들을 가르쳤고 누나는 미싱바늘에 손가락 찔려가며 남동생을 대학에 보냈다. 그때 오가던 대사들은 전국 어디서나 모두 대동소이했다. 너만은 반드시 공부해 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 지금은, 박사도 환경미화원을 목표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여기서 한번, 웃을까?  

 

그 시기에 노동자가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면, 최소한 전태일의 시대에 근기법이라도 지켜지는 세상이었다면, 일을 하는 한 노동자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면, 그럼 지금 같은 경제적 발전은 불가능했을까? 그렇게 혹사당하며 성장한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게 되자 당연히 전투적인 노선을 택한다. 사업자보다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밀린다. 밀리면 지는 거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전사와 싸우면서 일하는 투사로 길러졌다. 그들을 투사로 만든 건 바로 반공독재다. 전사로 길러놓고 왜 그렇게 싸우느냐고 비난하는 건, 웃기는 짬뽕이다.

 

 자학사관의 토양

 

 

우리는 아직 멀었다라는 논조는 조중동의 영원한 레토릭이다. 그들에게 민중은 언제나 무지하며 가르치고 계도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건 상관없다. 언론의 사명인 저널은 그 탄생서부터 계몽성을 담지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 계도의 방향이 옳지 않다는 것. 조중동 등 언론과 해방이후 형성된 학계는 철저히 자학사관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의 기준은 항상 일본이었다. 역사의 기록, 학문의 성과, 메이지유신의 신화, 산업의 발전, 문화의 향기, 시민의식의 함양, 군국주의의 패기.

 

임나일본부는 분명한 사실이고,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의 원서를 번역하는 것보다 일본번역판을 재역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도 유신을 하면 일본처럼 될 수 있겠지. 우리나라 산업의 토대는 모두 일본이 만들었어. 바둑이든 운동이든 제대로 하려면 일단 일본을 가야지. 일본사람들 질서 지키는 거 봤냐? 안 봤으면 말을 말어. 형님, 형님도 이제 거실에 일본도 한 쌍은 걸어 놓으셔야죠. 요즘은, 그러니까 지난 10년 사이에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 전만 해도 이런 메뉴들은 조중동과 학계의 단골 식단이었다. 그중에도 사학계와 조선이 가장 심했다.

 

그들에게 일본은 모든 기준의 척도였고 지향의 정점이며 추구하는 이상의 끝이었다. 그게 워낙 심하다보니 일본보다 뛰어난 역사가 있으면 폄훼하거나 축소 왜곡해야 했으며 일본보다 우월한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깎아 내려 낮춰야만 했다. 호랑이는 토끼로. 무궁화는 지저분하고 벚꽃은 멋진 것으로. 사무라이는 화끈하고 남자답지만 화랑은 계집질이나 하는 한량들로. 그래야 저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안 돼. 우리는 아직 멀었어. 그리고 그 토양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저 반공개발독재다.

 

박정희는 그 정점에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제국시절의 일본군복을 입고 검을 휘둘렀다. 낮에는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 마시는 쇼를 하고 자신이 엽전들을 위해 쇼를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밤에는 기생들을 불러 앉혀 사미센을 키며 코이비토요 사요나라, 블루라이토 요코하마 엔카를 부르게 했다.

 

박정희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다. 그가 꿈꾼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나는 단언한다. 그의 최종적 꿈은, 일본 황국의 조선총통이었을 거라고. 그것이 자신이 가장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임무이므로. 그럼 김대중 같은 애송이한테 신경 쓸 일도 없고. 하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괴로웠을 것이다. 상당히.

 

그의 청렴이니 검소니 하는 헛소리엔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손가락이 자꾸 안으로 오그라들어 자판 치기가 힘들 지경이다.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비용들을 생각해 보자. 양극화, 사교육, 노사, 이명박 정부의 삽질 등으로 인해 생기는 손실들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또 앞으로는 얼마나 더 치러야 할까? 그 모두 그와 그 후계자 및 추종자들이 누린 이익으로 인해 생긴 빚이며 그걸 우리 모두가 갚아나가는 중이라면 이해가 될까?

 

아마 그래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채찍질에 깊숙이 길들여진 저들은. 시끄러! 나의 각하는 그런 분이 아냐! 어머 각하 오셨쎄요? 저를 더 갈겨주세요. 쎄게, 더...더 쎄게... 아흐응~

 

마지막 팁 하나.

 

가끔 꼴 마초들이 박빠의 색깔을 띠고 앉아있는 꼴을 본다. 그런데 그들이 실은, 마초가 아니라 저 변태 마조라는 것. 그것을 마초라고 착각하고 앉았다는 것. 마초와 마조는 점 하나 차이다. 마조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마초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면...

 

그리고 여기 딴지에서도 가끔 그런 자들을 본다. 씨바,

 

불타던 과부(hagonol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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