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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나의 첫 대통령

 

2009.8.25.화요일

 


다들 아는 이야기.

선생님께서는 1970년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을 꺾고 대통령 후보자에 지명되었다.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선거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 등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도 되었다.

그리고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제7대 대통령선거 (1971년 4월 27일)
투표율 : 79.8%

1. 박정희 : 6,342,828
2. 김대중 : 5,395,900



온갖 관권선거, 부정 공작이 난무하였는데도
540만표를 획득. 박정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고는
그때부터 박정희에 의해 주시당하기 시작한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된 선생님은
같은해 10월에 일본에 체류하던 중, 유신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첫 성명을 발표하신 후
선생님은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꾸준히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벌이셨다.


이후 오랫동안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치러진다.
12.12사태를 불러일으킨 체육관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간선제는 끝났고 
16년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역사상 가장 관심이 뜨거웠던 선거였지만


제13대 대통령선거 (1987년 12월 16일)
투표율 : 89.2%

1. 노태우 : 8,282,738
2. 김영삼 : 6,337,581
3. 김대중 : 6,113,375



역시 각종 여론조작이 횡행했던 이 선거는
전두환의 친구를 대통령으로 만든다.


최초로 군인 출신이 제외된 14대 선거에서 절치부심하셨지만
호남을 배제시키려는 3당 합당 프로젝트에
보수언론과 정권의 지원까지 겹친지라


제14대 대통령선거 (1992년 12월 18일)
투표율 : 81.9%

1. 김영삼 : 9,977,332
2. 김대중 : 6,337,581
3. 정주영 : 3,880,067



선생님은 또 한번 고배를 드신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의는 비례대표 13번까지만 당선되는 바람에
선생님은 아쉽게도 낙선하고 만다.

보통 정당의 당수는 박빙의 상황에서 한표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판가름이 날 아슬아슬한 순위에 자신의 번호를 올려놓는다.


이 점에서 염치없게 비례 1번으로만 출마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례후보 탈락되어 정치인생을 마감한
선생님과 항상 같이 거론되던 모 정치인과 비교된다 할 수 있겠어.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 노회찬의 극적인 당선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당선으로 김종필이 낙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19를 짓밟은 5·16 군사반란의 주역인 김종필은 하필이면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에게 자리를 내주고 4월19일에 정계은퇴 성명을 내야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05045


 
종필종결자, 노회찬.
 



1997년 10월에는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선거 (1997년 12월 18일)
투표율 : 80.7%

1. 김대중 : 10,326,275
2. 이회창 : 9,935,718
3. 이인제♡ : 4,925,591



"이인제를 찍었더니 김대중이 되더라."

하는 말을 탄생시킴과 더불어
오랜 인내와 도전의 결실을 맺는다.


 

 

 
그러니까 순서대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나는 영화 친구를 보며, 교실 벽의 멸공 포스터에서
당시에 대한 철저한 고증에 피식하니 쓴웃음을 흘렸다.

 
 


 

 
잘못된 고증의 대표적인 예로 어린 신부의 해병대 군복.
해병대는 야상 계급장을 팔뚝에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고보니 나도 그런 희한한 시절을 살았었다.
그렇게 살면서도 전혀 웃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6.25의 노래, 제 2절.
 
라 마르세예즈를 능가하는 폭풍간지의 가사.
 


매년 6월 25일 등교할때면
교문 수백미터전부터 학교 확성기로 울려퍼지는 저 노래가 들렸다.

매년 6월 25일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승복 어린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야 했어.

죽은 사람에게, 살아있다고 가정하고 편지를 쓰는게
당시엔 병신같다고 생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정에는 떡하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문구와 함께
주먹을 굳게 쥔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이 있었으니까.


6년 내내 편지의 마지막을

"널 죽인 나쁜 공산 괴뢰군들에게 꼭 복수해줄께.
 내 친구 승복아. 편안하게 쉬렴."

이라고 끝맺었던 기억이 난다.
아. 손발이 오글거린다.


 
전설의 주준호체.
 
한획 한획에서 투철한 주체사상이 우러나온다.


우리는 매년 겨울마다 전방의 국군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썼어.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선생님에게 묻자

"공산당들 때려잡아달라고 부탁드려.
 공산당놈들때문에 군인아저씨들이 고생하셔."

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지.


그래서 나는 당연히

"우리 조국땅을 둘로 가른 괴뢰군들을 모조리 때려잡아주세요."

라고 편지를 보냈어.

아. 진짜 손발이 오글거린다.
이게 고작 20년 전 일이라구.


 

 

그따위 편지쓰고 20년만에 손발이 오글거리더라.
명사수 수경이도 손발이 오글거릴 시대가 와야 되는데.

 
 

우리는 방학때마다 권장도서 3종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했다.
위인전. 새마을운동. 그리고 반공 소설 한편씩을 읽고.

내가 그때 북한 어부의 서울 이야기라는 반공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교장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당시 티비에서는 국경일만 되면
똘이장군이라는 만화를 방송해주곤 했다.

김일성을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뿔달린 돼지로.
남파 간첩을 김일성이 날리는 박쥐;;로 묘사했던 기억이 난다.
왜 돼지가; 돼지고기를;; 좋아하는지가 다소 궁금했었어.


 
힘내라, 싸워라, 부셔라. 붉은 도당을!
똘이장군 - 제3땅굴편.

 
 
오른쪽 위의 분이 김일성 주석이십니다.
 



이따위 만화의 스토리는 다행히도 기억하지 못한다.
고작 20년밖에 안된 일인데도.


우리는 북괴라는 가공의 존재의 위협을 현실로 느끼며 살아왔다.
공산 괴뢰군들은 다들 눈 뻘겋고 뿔달리고. 악마처럼 생긴 줄 알았어.

작년에 중국에 출장가서 중국 조선족 공산당원들과 술을 마실때

"우리 뿔 달린줄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에
쓴웃음으로 답할수밖에 없었지.

잠깐만 방심하면 공산 괴뢰가 쳐들어와서 우리 집을 불태우고
우리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갈거라고 교육받으면서 살았어.


그런 시절, 아침 등교길에 집 현관에서

 

 

 
 
 

이런 괴상한 디자인의 삐라를 발견하는 날에는
두려움에, 며칠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뿔달린 돼지 김일성이 날려보낸 박쥐가
평화로운 우리집까지 와서 저런 삐라를 뿌렸구나.
혹부리 김일성은 호시탐탐 우리 가정의 행복을 노리고 있구나.

 

저런 삐라 줏어서 학교 선생님한테 들고가면
참 잘했어요. 도장도 다섯개씩 콱콱 찍어주고 그랬어요.

 


밟아도. 공권력으로 아무리 짓밟아도.
믿을수 없게 살아나 꾸준히 자기 세력을 위협하던 선생님에 대해
박정희가 이용할 수단은 매카시즘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빨갱이와 동일시시켰다.

 

우리 집안은 대구 경북. 오리지날 TK다.
우리 집에서 김대중이란 이름은 빨갱이로 통했다.
우리 집에서 호남이란 지역은 빨갱이의 지역이었다.

 


 상식에 관하여.

 

드라마와 개그의 깡패나 하층민들은
거의가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다.

 

전라도라는 지역은 특히 TK 출신에 의해
대한민국과는 별도의 공화국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이 있지.
전라도 출신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한다.
글쎄, 나는 그말을 들으면 기겁했다.

 

 


전라도라는 출신은, 일종의 천형으로까지 취급받았다.

나도 어릴적부터 전라도 사람들은 믿어서는 안된다고 교육받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20대를 맞이했다.

대학 시절의 베프도 나한테 전라도 출신을 경계하라고.
전라도 출신은 항상 등을 친다고 말하더군.
물론, 아무런 근거도 그녀석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인생의 커다란 스승이라고 말할 만한 분이
대학교때 지도교수님이셔.
그런데 그 분은 전라도 출신이셨다.

아무리 전라도 출신을 비하하던 나의 TK 부모님들도
우리 지도교수님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못하시더군.

"너 정교수님 말씀 잘 들어라.
 그분 만한 선생님 안계시다."

군사부일체라는 유교적 정신이 TK를 능가한것일까.


대학교 2학년을 휴학하면서
한동안 공사판에서 노가다 알바를 했다.
그때 만나던 좋은 형님들은 다 전라도 출신이었다.

그 형님들과 하루종일 땀을 흘리며 노가다를 했고
밤이면 일당을 모조리 술값으로 날려버렸지.

내가 노가다가 처음이라서 매일 방해만 되었는데

"나는 자네가 흘린 땀만으로 만족해."

라고 쿨하게 술값을 치르던 그 형님이 아직 기억난다.


2년을 단골로 다니던 헬스장 관장님은
콩국수에 설탕을 쳐먹는걸 좋아했고
그 사모님은 막걸리에 설탕을 타먹는걸 좋아했다.

틈만 나면 술과 고기를 사주던 그 두분에게서
처음으로 "우리 대중슨상님이~" 라는 대사를 라이브로 들었다.

나는 김대중이라는 이름 뒤에
존칭을 붙여 부르는것을 그때 처음 들었다.


우리 부모님과 고향어른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은, 다 김대중을 존경한다.
그다음부터 나는 김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강준만 교수의 저서를 읽었고
박재동 화백의 목 긴 사나이를 보았다.
대학 4학년때, 한국현대사 리포트의 주제도 김대중으로 삼았다.


툭하면 다들 민주화 투사라고 자칭하는 시대에
유일하게 민주화에 투사라는 단어로
수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민주화라는게 정확히 무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정권교체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정권교체는 반드시 선생님이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격 수꼴 잡지, 리뷰
 



어릴때부터 TK식 교육을 받으면
조기교육으로 훌륭한 하나의 수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가르침받는게 무엇인지를 궁금해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내가 미워하라고 주입받는게 과연 무엇인지 알려 애쓴다면.
오히려 이런 TK의 이단아가 나올 수도 있다.


 나의 첫 대통령.

우리집은 골수 TK다.

"점마 저 독한 눈빛 좀 보소. 딱 빨갱이 아닝교."
이런 비아냥을 나는 집과 고향에서 들어왔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말을 들어왔고
93%에 달하는 비정상적 득표율을 가리켜
역시 전라도는 빨갱이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왔다.

근거없는 주장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왜"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나는 20대의 7년을 포항에서 보냈다.
포항에서 여자를 사귈때마다, 흔치 않게 이런 질문을 들었다.


"오빠 고향 어디에요?"

"대군데. 왜?"

"부모님이 전라도 남자는 안된다고 하셔서요."

"전라도 남자는 왜 안됀대?"

"사기 잘친대요."

굉장히 똑똑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애들도
저런 대사를 내뱉는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근거없는 편견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아닐껄?" 하는 반감이 생기게 된다.


나는 선생님이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정권 교체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상식적인 경상도 사람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뽑은 사람은
여태까지 전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만큼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15대 대선날, 부모님께서는 이회창을 찍으라고 다짐시켰다.
나는 나가서 김대중을 찍고 왔다.

97년 겨울 새벽, 방에서 몰래 휴대용 티비로 하의도의 열기를 보며
옆 방, 부모님의 한숨소리에 웬지 뿌듯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부모님은 내가
권영길을 찍은 줄 알고 계신다.

자식된 도리로, 김대중을 찍었다는 사실을 말 할 수 없다.
양심상, 이회창을 찍었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다.


선생님은 당선되자마자
5공때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을 사면시켰다.
선생님의 그릇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 티비를 봤다.

전두환이 감옥 앞에서 인터뷰 도중에 껄껄 웃으며

"여러분 어유 감옥 오지 마세요. 사람 살데가 아니에요."

하는것을 보고 

 

 

 

 
아 씨바 진짜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래. 이것도 그릇이라면 그릇이지.
그런데 좀 그릇된 그릇인것같아.


선생님은 남북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어.
그 덕에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이 이루어진거고.



 


98년 6월 16일, 정주영회장이 소 천마리를 몰고 북으로 갔다.




나는 학생식당에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았다.



 


 

 

정주영 회장은 판문점을 통과한 첫 민간인이었다고 해.
 


아, 나 진짜 통일 한번 되는건줄 알았는데.

나는 그날 밤 기숙사방에서 맥주를 쌓아놓고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가 담긴 음반을 틀었다.


내가 선생님께 표를 던진 이유중의 하나는


선생님이 서태지의 팬이셨다는군.
발해를 꿈꾸며 를 듣고 서태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인기를 노리는 정치인의 얄팍한 술수와는 달리


선생님은 퇴임 후에도 서태지와 인연을 이어나가셨다.


문화를 사랑했던 선생님은 지금


마이클 형님과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계시지 않을까.



 선생님과 YS.

한때 평생 민주화 동지였던 YS와 선생님은
3당 합당 사태 이후로 벽을 쌓았다.



 

 



선생님은 분명히 마지막에 YS와 화해하기를 바라셨을꺼야.
사형 선고를 내린 전두환도 사면시켰잖아.


YS가 지맘대로 가서 혼수상태의 선생님을 구경하고 와서
화해했다고 주장하긴 했지.

뭐.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선생님도 YS의 제스쳐를 받아들일 생각이셨을테니.
그래서 선생님의 유지를 살려, 유족들이 장의위원장 제안을 했었는데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35860


하지만 이 소식이 알려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측에서 약간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수용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기수 비서실장은 19일 CBS와의 전화통화에서 "정식으로 제의가 온 것도 아니고 아이디어 차원에 대해 언급할 사항이 못된다"면서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로 장의위원장 제안이 들어와도 거부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김 실장은 "우리 나라도 세계 10위권 국가인데 이제 국격(國格)을 갖춰야 한다"며 "국가 원로인 전직 대통령이 자신이 데리고 있던 현직 총리와 공동장의위원장을 맡겠냐"고 말했다.



그래 니 그릇은 이거밖에 안되는거다.
이딴식으로 장의위원장 제안을 거부한건 참 씁쓸하네.

그래도 김영삼이 이랬다니까 놀랍지도 않아.
근데 이래놓고서 "화해했다" 라고 뻔뻔하게 말씀하셨던건가요.

YS와 DJ를 한마디로 비교해본다면
김영삼이 평생 읽은 책보다 DJ가 더 많이 썼죠.



 하나 마나 한 소리. 


1997년 대선에서 선생님은 호남에서 90% 이상의 득표를 한 반면,
영남에서는 10% 대의 득표를 기록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후보에 대해서도 이런 현상이 지속되었고

 

 

하다못해 정동영한테까지 그 파급력이 이어지고 있어.

84년 총선까지 호남 지역이 친정부적인 투표율을 보였음을 볼때

 

 


선생님이 지역감정을 어느정도 이용한 측면도 있지 않는가,
하는 비판이 나오는게 전혀 말이 되지않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상황은, 외로운 민주화 투사의 투쟁을
고향 사람들만이 알아주었다고 봐야겠지.


그러니까 이제. 지역감정이란 단어가 없던 시대로 돌아갔으면.
지역감정을 없애야 한다면서
오히려 지역감정을 조장하려는 일은 없었으면.
선생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없었으면.


이번에 북에서 조전도 오고
김 위원장님의 화환과 함께 특사조도 방문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북한 당국자가 남한을 방문하기는 처음이라지.
이를 계기로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되었으면 한다.
북한 특사의 방문은 선생님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며, 동시에 숙제가 아닐까.

 

Again 2000.



 그래도 잊지는 말자.


1976년의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도끼살해사건이 있었다.
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2002년의 제2연평해전에서,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들의 영결식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해군 합참의장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국가차원의 첫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바로 그날에, KBS 정연주사장이 배임죄 무죄판결을 받았다.
안그래도 우리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도 2004년에, 재심에서 내란죄 무죄판결을 받았었다.


 에필로그.


내가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이 둘이 있는데
한분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이시고
또 한분은 김대중 선생님이시다.

박정희는 대통령 뒤에 각하가 붙어야 하는데
김대중은 그냥,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그리고, 이 둘을 존경하는 이유도
내가 이 두분을 부르는 호칭에 모두 담겨져 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존경할 만하니까 존경한다.


박정희는 TK의 신앙이다.
신앙의 대상을 왜 존경하는지 설명하다보면
이유를 위한 이유가 된다.

나는 박정희는. 박정희니까 존경한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이유를 물으면
안타깝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것같다.

옳고 그른 것과, 좋고 싫은 것이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그게 일치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를 비롯해, TK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줬음 좋겠어.
 

나는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할 일은 없을것같다.


 

 

 

불기둥(bakky1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