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프랑스는 전통적인 군사강국이다. 압도적인 국가의 면적(유럽에서 3위로,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크다), 풍부한 물산,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키운 군사력. 프랑스는 언제나 유럽의 ‘육군강국’이면서 군사강국이었다. 

 

02.jpg

 

그러던 것이 아쟁쿠르, 제2차 대전의 낫질작전, 베트남 전쟁 등 임팩트 있는 몇 번의 패배로 군사적으로 약소국의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프랑스 역사 전체를 보면 승리의 역사가 더 많은데 말이다(역시 임팩트가 중요한 거 같다). 

 

툭 까놓고 말해보자. 프랑스는 여전히 군사강국이다. 

 

냉전 시절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유럽의 군사강국이었다. 군사적으로 독자노선을 걸었지만, 전쟁이 터지면 나토 지휘체계 안으로 들어가 영국, 서독과 유럽 지상군의 핵을 이뤘다. 냉전 당시 서독이 징병제로 48만의 병력을 모집했던 걸 생각하면, 60만 가까운 병력을 운용한 프랑스가 어느 정도 위치인지 알 수 있을 거다. 

 

프랑스는 머릿수만 많은 군대가 아니었다. 기술적으로도 프랑스는 성숙단계를 넘어서, ‘꽤’ 잘나가는 나라였다. 

 

무기 수출에 있어선 미국,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며(냉전시절 제3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무기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해군에 몰빵한 영국이나, 육군에 집중한 독일군과 달리, 육/해/공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즉, 유럽 내에서 가장 균형 잡힌 군대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미국과 함께 핵추진 항공모함을 운용하는 국가이며, 유럽에서 유일하게 정규항모를 운용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핵무기 체계를 안정적으로 운용중이며, 해외파병이나 대외 투사력을 안정적으로 구사할 수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로 나간 이상 대외투사력을 구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다. 

 

xf3jrxajukw21.jpg

 

프랑스는 대놓고 해외 투사력을 위한 부대인 '외인부대'를 운용한다. 프랑스 해병대(Troupes de Marines)도 분쟁지역에서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유럽에서 가장 활발히 얼굴을 내비치는 군대가 프랑스 군대다.

 

(1980년대 이탈리아가 ‘최소한 지중해권 안에서는 우리가 짱이다!’란 각오로 대외적인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경 항공모함을 막 뽑아내고, 지중해 권역 안의 이런 저런 일들에 고개를 빳빳이 들곤 했다. 다 ‘과거’의 일이지만 말이다. 이후 EU의 탄생, 유로화 통일에 더해 여러 문제가 겹쳐 이탈리아 경제는 폭망했다. 따라서 옛 ‘로마’의 영광을 되살려 보겠다는 헛된 꿈은 완전 박살났다)

 

 

사르코지의 큰 그림?

 

2009년 3월 11일,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프랑스의 나토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한국인 입장에선 이 뉴스가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을 거다. 필자 역시도 “사르코지가 사르코지 했네.”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사르코지는 2007년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프랑스의 나토 복귀'를 추진해왔고, 친미주의자란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에 이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이 때문에 반(反)사르코지 진형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지켜온 프랑스의 자존심이 사르코지 때문에 날아가게 생겼다. 이제 프랑스는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게 됐고, 독립적인 행동이 불가능해졌다.”

 

사르코지와 지지자들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나토에 복귀하더라도 프랑스의 운명은 프랑스가 결정할 수 있다!”

 

이 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도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냉전이 끝난 뒤 프랑스는 징병제를 포기했고, 60만이던 병력은 20만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병력이 줄어들었으니 소수정예로 전투력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군사력을 확충하기도 애매했던 차 나온 게 나토 복귀였다. 

 

사류코지.jpg

 

1966년 드골이 나토 통합군사령부로부터 프랑스의 탈퇴를 결정한 뒤 43년 만의 복귀였다.

 

당시 드골은 호기롭게 외쳤다.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프랑스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걷기 위해서라도 나토를 탈퇴해야겠다!”

 

이 때문에 냉전시절 프랑스가 ‘무기 장사’를 쏠쏠하게 했다. 국제사회에서의 발언권도 만만치 않게 챙겼다. 앞에서도 언급한 『비례억지전략』으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배짱도 튕겼다. 

 

“나 건들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주마. 어디 건드려봐!”

 

프랑스가 가진 핵무기가 미국과 소련을 압박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강자 사이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가 핵무기를 들고 있다는 건 전력 이상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냉전은 끝났고, 프랑스가 싸워야 할 대상은 몰락했다. '군사강국' 이라는 타이틀이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던 시기도 지났다. 예전엔 미국제 무기를 살 수 없어서 프랑스제 무기를 샀었는데, 이제는 시장에 넘쳐나는 게 미국제였다. 

 

프랑스가 두 팔을 들었다. 

 

“나토에 복귀하겠다.”

 

프랑스는 자존심보다 실리를 택했다. '냉정하게' 보면 프랑스가 국방의 일부를 미국에 의탁하겠다는 것이다. 나토는 미국의 돈으로 움직이는 군사 방위체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가 그동안 나토와 인연을 끊어왔던 건 아니다. 프랑스는 나토에 계속 연락장교를 보냈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시절엔 나토 사령부에 100명 이상의 프랑스 연락장교와 군인이 있었다. 즉, 나토와는 계속 교류를 해왔고 손발을 맞춰놓은 상태란 거다. 사르코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나토에 복귀해 공동방위를 하겠다 말한 거다. 친미주의자라고 욕을 먹었지만, 장기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프랑스가 독자적인 방위력을 행사하긴 어려웠다. 대표적인 사례가 올랑드 대통령 시절 있었던 IS 근거지 폭격이다.

 

bata.jpg

 

2015년 11월 13일 파리 바타클랑 콘서트홀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다. IS의 테러였다.

 

이 사건을 전후로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인한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프랑스는 서방세계 중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전체 프랑스 인구의 8%를 차지하며, 대충 500만 명이 넘어간다. (영국도 무슬림이 많기로 유명한데, 프랑스와는 인구 구성에 차이가 있다. 프랑스의 무슬림은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서 넘어온 이들인데 반해, 영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출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무슬림 역시 높은 실업률과 사회적인 차별에 절망했다. 그런데 그 숫자는 많다. ‘외로운 늑대(Lone Wolf)’로 자라나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또한 고향땅에서 이들을 ‘전사’로 만들러 온 자들도 넘쳐났다.

 

올랑드 대통령 시절 연쇄적으로 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올랑드 대통령은 IS에 대한 보복을 말하며 공습작전을 펼쳤다. 

 

2015년 11월 15일 요르단과 아랍에미리트연합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 10여 대가 IS의 실질적인 수도라 불리던 시리아의 라카를 타격했다. 16일에도 라팔과 미라주전투기 10대를 동원해서 폭격했다.

 

17일에는 프랑스 국방장관이 TV에 나와서, 

 

“샤를르 드 골 항공모함을 해당 해역에 급파했다.”

 

라고 말했다(테러가 터진 다음날인 14일 샤를르 드 골 호는 출항했다). 프랑스가 동원할 수 있는 투사력을 다 동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거다.

 

샤를르 드 골이 해당 해역으로 가던 때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 상하원 합동 연설을 하고 있었다. 

 

“테러를 뿌리 뽑겠다!”

 

이 말을 한 올랑드 대통령도, 이걸 듣는 상하원 의원들도, 국민들도 믿지 않았다. 올랑드 대통령이 IS에 대한 보복을 말했을 때 '기껏해야 공습 몇 번 하고 끝나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실제로 그랬다.

 

11월 17일 프랑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대외 투사력의 한계를 보여줬다. 샤를르 드 골 호에 실려있는 전투기 26대에 아랍에미리트와 요르단에 배치된 12대의 전투기를 합쳐 총 38대의 전투기. 이게 프랑스가 끌어 모은 대외 투사력의 총합이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어마어마한 전력이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된 시리아 하늘 위에서 프랑스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자존심의 프랑스, '엘랑비탈'을 말하던 프랑스가, 그 한계를 확인한 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