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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 Design

 

프랑스의 국민 가수였던 쟝 자끄 골드만이 하루에 10시간을 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교시절부터 직업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었다. 이왕 직업을 잡을 거라면 뭔가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도 높은 수익을 올리는 전문직스러운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꼭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그저 꿈일 뿐. 준비 없이 맞이한 현실은 전혀 달랐다. 돈을 벌려면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입사원서를 낼 때마다 서류에서 탈락하고, 또 어쩌다 면접까지 가더라도 번번이 떨어졌다. 뭐든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재를 몰라봐주는 더러운 세상을 탓하며 자꾸만 시니컬해져갔다.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거다’ 하는 분야가 생겼다. 바로 제품 디자인이었다. 제품 디자인. 그 이름만으로도 멋져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 조나단 아이브가 하는 무지 있어 보이는 그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땐 제품 디자인이 제품을 발명하는 일인 줄 알았다. 이 일은 마치 마술같이 느껴졌다. 이 길은 나의 천직 같았다. 원래 미대를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꼭 이 분야에서 내 꿈을 펼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력서와 말도 안 되는(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말 되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아이디어 스케치를 포트폴리오로 준비하여 마음에 드는 제품디자인 회사에 다짜고짜 우편으로 발송했다.

 

며칠 후 이력서가 잘 도착했는지 확인 전화도 했다. 받았다고 했다. 언제 면접 볼 거냐고 한 번 만나나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냐고 제안도 했다. 그렇게 인터뷰를 했고 며칠 후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제 출세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에게는 내가 먹여살릴 테니 결혼하자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원래 사람 뽑을 계획 따위는 없었는데, 마침 투자가 많이 들어와 회사에 여유가 좀 생긴 데다가 꼭 일해보겠다고 달려드는 당돌함이 눈에 띄어 한 번 기회를 줘 본 거였다고 했다. 내가 열심히 만들어 제출한 포트폴리오는 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약간 기분 나빴지만 나도 그냥 덮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아 모른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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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회사에 들어갔지만 디자인 일은 내 몫이 아니었다. 필자는 처음엔 디자인을 영업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영업은 외모가 출중한 직원들이 더 잘했다.

 

뭔가 할 일을 찾아 제 몫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트렌드를 조사하여 우리가 디자인할 제품이 담을 컨셉을 설득하는, 말하자면 ‘썰푸는 일’을 했다. 이 일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 일이야말로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중요한 일이라 확신했다. mp3플레이어의 두께를 줄이거나 혹은 더 얇게 보이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줄 알고 살았다.

 

고객사들도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디자인 회사는 처음’이라며 필자의 일을 높이 평가해 줬다.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디자이너들과도 많이 친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텃세에 밀려나기도 했고 또 잘리기도 했다.

 

처음 입사했던 디자인 전문 회사에서는 무지 황당한 이유로 잘렸다. 뭔지 모를 이유로 사장님과 부사장님이 며칠 동안 싸움을 했다. 나이도 지긋하신 분들이 유치하다 생각하며 강 건너 불구경 중이었는데, 결국 부사장님이 직원들과 인사도 안 하고 퇴사를 해버렸다. 근데 그 며칠 뒤, 부사장님이 주관하던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이유로 나도 같이 잘려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어렵게 제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황당했다. 하지만 그땐 젊었다. 남다른 일을 해왔기에 다른 곳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디자인 회사에서도 또 어이없게 잘렸다. 이직했던 회사는 제품 디자인 영역에서 꽤 잘나가던 중이었다. 나는 디자인 전략을 정리하고 시장 정보를 모아 디자인 매체로 발전시키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이 조직을 탄탄히 키우겠다며 갑작스레 몇몇 부서장을 데려왔다.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했지만 지금도 그때 대표님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림 팀에는 대표님의 중학교 후배이며 마케팅 전문가로 큰 성과를 냈다는 사람이 부서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기존에 진행하던 일은 모두 중단하고 새로운 업무를 지시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휴대폰 제조사의 휴대폰들의 정보를 모델별로 정리하여 우리 회사 웹사이트에 게시하라는 거였다.

 

부서장께서는 근무시간에 야동을 보시면서, 아무런 배경 설명 없이 이런 지시가 내려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그런 정보는 제조사 홈페이지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디자인 매체를 만들고자 한다면 오히려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 기사를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것은 마치 팀을 살리기 위해 팀을 먼저 죽여버리시려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개겼다. 결국 또 잘리고 말았다.

 

그 후, 함께 손발을 맞추던 디자인 실장님이 디자인 전문 회사를 차렸다. 합류해달라는 제의가 왔다. 세 번째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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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에 찾아온 IT 발 호황은 휴대폰, mp3플레이어를 비롯하여 디지털 카메라, 컴퓨터, PMP, 내비게이션, 보이스 레코더, 셋탑박스 등등 수많은 제품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냈다. 휴대폰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만 140여 개의 제조사가 있었다. 대부분 해외로 수출만 하는 회사들이었다. 우리나라의 휴대폰은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제품으로 대접받았다.

 

덩달아 한국의 제품 디자인의 위상도 함께 올라갔다. 수백 개의 중국 폰 제조사들이 한국의 디자인을 배우려고 너도나도 러브콜을 보내왔다. 당시 중국 고객사의 한국 디자인 사랑은 무조건적이었다.

 

실장님과 함께한 새 디자인 회사에서는 밀려들어오는 프로젝트를 쳐내느라 정신없었다. 신입사원들을 뽑았다. 젊은 감각을 가진 디자인 전문 회사, 잘하는 회사로 소문이 났다. 한국, 중국 가릴 것 없이 다양한 휴대폰, mp3 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PMP, 내비게이션, 세톱박스 등 수많은 제조회사들이 연락해왔다. 우리에게 디자인을 의뢰뿐 아니라 사용자 화면을 디자인하는 GUI 디자인, 제품 패키지와 로고 및 아이덴티티까지 우리의 영역이 확장되어 갔다.

 

디자인 품평 때 날아오는 ‘하오하오’와 쌍따봉에 우리가 마치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의 반열에 오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실장님은 낸 성과에 마냥 행복해했지만, 시장 상황을 조사하고 분석하던 나는 위태로운 상승세를 불안했다. 한 휴대폰 제조사가 함께 중국에 사무실을 내고 진출하자고 합작 제의를 해왔을 때 실장님과 의견 대립으로 밤새도록 설전을 벌였다.

 

나는 중국에 누구든 파견해서 참여하자는 의견을 냈고, 실장님은 그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지금 이대로 국내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회사들의 디자인 의뢰를 받는 것이랑 뭐가 다르냐는 의견이었다.

 

답답했다. 한국 제품을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는 중국 업체 뒤에는 저렴한 가격과 물량으로 그 중국 제조사를 공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수백, 수천의 중국의 디자인 업체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디자인 품질에서건 가격에서건 사업구조에서건 어떻게든 차별 우위를 가지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든든한 제조사와 장기적인 파트너가 관계가 되는 것, 중국 현지에서 수많은 제조업체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분명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작 제의가 온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장님은 생각이 달랐다. 이런저런 매체에서 주목받으며 늘 좋은 평가를 받아 오던 그는 시장을 낙관하는 편이었다. 굳이 합작하면서 직원을 파견해서 위험을 떠안는 것보다 지금처럼 국내시장에서 회사를 차곡차곡 키워가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실장님은 합작 제의를 거절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 클라이언트사들의 태도가 달라져 갔다. 한국 디자인 전문 회사들끼리 경쟁을 시키는 것 같았다. 점점 가격이 낮아졌고 디자인 비용의 결제도 점점 늦어졌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수주도 점점 어려워졌다.

 

그동안에는 한국 디자이너들에게 배워왔지만, 이제는 거의 다 쫓아왔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스타일링이라면 조금 과도한 것만 절제하면 중국의 디자인도 나쁘지 않았다. 중국 제조사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중국의 디자인은 비용이 우리의 10분의 1, 100분의 1 정도 밖에 안되는 어마어마한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한국 디자인이라고 대접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에서 견제 당하고 뒤로는 쫓기는 형국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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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때문에 상해에 갔다가 신천지(그 신천지 아니다.)라는 디자인 거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중국의 제조업은 더 이상 카피제품이나 만드는 수준이 아니었다. 카피캣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세계의 공장을 자처했던 중국은 하나의 거대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연구소처럼 보였다. 절대 끊지 못할 싼 가격과 좋은 품질로 전 세계의 제품 외주 생산을 맡아 진행하면서 사실은 세계 일류 제품의 개발 노하우를 뜯어보고 맛보고 배우며 차근차근 자신의 실력을 키워왔던 것이었다.

 

디자인의 본질이 기능적 스타일링이 아니라 축적된 철학을 제품의 형상과 사용성에 반영하는 문화상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중국의 문화적 자신감과 산업환경 -어떤 제품이든 쉽게 만들어 쉽게 출시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과 결합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위력을 갖고 시장을 좌우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설상가상으로 컨버전스라는 트렌드가 밀려왔다. 휴대폰을 중심으로 전자 제품들이 자꾸만 합쳐져 갔다. mp3 플레이어와 카메라는 휴대폰의 기본 기능이 되었고 PMP도 보이스레코더도, 전자사전도 그리고 내비게이션도 자꾸만 하나로 합쳐져 갔다.

 

세계시장을 석권할 것 같았던 국산 mp3플레이어는 아이팟에 그 기세가 꺾였다. 전 세계 휴대폰 시장규모는 점점 커지는데 우리나라의 휴대폰 회사들은 자꾸만 줄어갔다. 그럴수록 디자인 프로젝트들도 함께 줄어갔다.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가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동차용 PC 개발 프로젝트에 우리가 디자인 파트너로 참여하게 되었다. 외주 프로젝트가 아니라 디자인 파트너의 지위였다. 자동차의 오디오 자리에 설치하는 매립형 차량 컴퓨터였는데, 자동차라는 이동 공간을 인터넷에 연결하고 모바일 컴퓨팅을 구현하는 컨버전스의 끝판왕같이 느껴질 만큼 혁신적인 콘셉이었다.

 

디자인 초기 비용을 저렴하게 하는 대신 프로젝트에 디자인을 투자한 것으로 인정받아 아 제품이 판매될 때마다 러닝개런티를 받는 계약 조건이었다. 이것은 개발사와 디자인 전문 회사를 한 팀으로 묶어 지속적인 파트너십과 프로젝트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적이면서도 아주 영리한 포석이었다. 휴대폰 때 못했던 합작 프로젝트였기에 그만큼 더 큰 애착이 생겼다.

 

제품의 콘셉트도 혁신적이었고 알루미늄 소재를 적극 이용하여 제품 가격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한 디자인도 칭찬을 많이 받았다. 이 제품의 디자인은 그 해 대한민국 굿디자인상을 받았고, 나도 프로젝트 매니저로 참여하여 대한민국 디자인 도록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프로젝트는 10여 년 동안 제품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진행한 수십 개의 프로젝트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동시에,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아울러 이 프로젝트는 필자의 ‘다음 단계’를 있게 해준 고마운 프로젝트가 되었다.

 

첫 제품 발표 후 도처의 유통망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제품개발과 생산, 유통판매의 길은 멀고 험했다. 작은 회사다 보니 LCD, CPU, 메모리 등 핵심부품들은 현금으로 구매하는 반면, 완성품의 판매 대금은 어음 결제를 받아야 했다. 양산을 하려면 그 금융비용을 감당할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경쟁 제품들이 나타나 가격경쟁까지 시작되었다.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제조단가를 염두에 둬야 했다. 러닝개런티는 꿈도 못 꿨고 후속 모델의 디자인 초기 비용은 더욱 낮아져 0원에 수렴해갔다.

 

설상가상으로 자동차 인테리어의 트렌드도 변해갔다. 카오디오 별도 자리가 사라지고 튜너와 CD 슬롯 등 카오디오가 대시보드에 이리저리 떨어져 배치되기 시작했다. 카오디오의 형태를 따르던 카 PC는 새로 나오는 신차들에는 설치가 불가능해져버린 것이었다.

 

시장 전망이 어두워지자 투자 이야기도 슬그머니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제조사는 쪼그라들었고 필자네 디자인 스튜디오와의 파트너 관계는 유명무실해졌다. 로열티 계약으로 디자인을 브랜드화하고 디자인의 위상을 높여 장기적인 로열티 수익을 노렸던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다른 제조사들과 추진하던 프로젝트들도 엎어지기 시작했다. 휴대폰 제조사들도 mp3 플레이어 제조사도, 외장하드 제조사도, 내비게이션 제조사도 모두 사이좋게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살림을 장기적으로 개선할 체질 개선의 승부수였다. 성공했을 경우의 희망찬 미래를 장담하며 디자이너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다. 그렇게 디자인 로열티 계약을 주도했던 나는 회사에 면목이 없어졌다.

 

실장님은 당장 버틸 수가 없으니 디자이너들을 좀 내보내자고 했다. 나를 선배라고 믿고 쫄쫄 따르던 새내기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눈에 아른거렸다. 어려워진 책임을 차마 그들에게 미룰 수는 없었다. 내가 죽으면 새내기 둘셋은 살릴 수 있었다.

 

막내를 살짝 불러 고객들 꼬시던 시장 자료와 제품 기획 자료들을 몽땅 복사해 주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막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에 그냥 씩 웃으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회식을 하다가 막내랑 부둥켜안고 줄줄 울었다. 그렇게 10여 년의 디자인 회사 생활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