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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19가 다시 대규모 확산세를 보이고 있다. 되돌아온 거리두기 2단계 방역지침에 불현듯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친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연기된 12월마저도 수능을 치르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나.

 

수험생, 학부모, 교육 당국 모두에게 끔찍한 이 상상이 현실로 이뤄진 곳이 있다. 매일 2,000~6,000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지난 5월 대입시험조차 취소해야 했던 나라, 영국이다. 과연 이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영국 대입 제도 10초 요약

 

초등학교 6년, 중등학교 5년, 그리고 한국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입 준비학교(Sixth form college)에서 2년까지 도합 13년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영국 학생들(만 17-18세)은 매년 5~6월에 대입시험인 ‘A레벨(GSE Advanced Level)’ 시험을 치른다. 객관식 중심인 한국 수능과는 달리, 3개의 선택과목을 대부분 서술형으로 평가한다.

 

영국의 대입 시스템이 한국과 다른 점은 ‘선(先) 지원 후(後) 시험’이다. 학생들은 예상 점수에 따라 원하는 6개 대학에 먼저 지원한다. 이후 A레벨 등급결과에 따라 합불이 나뉘는 조건부 입학허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A레벨 시험 결과가 나오는 8월 중순은, 수험생의 희비가 엇갈리는 시점이다.

 

시험의 성격과 제도는 다르지만, 한국이나 영국이나 대입시험 점수가 있어야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지난 5월, 영국은 코로나 대규모 확산으로 A레벨 시험이 무산 위기에 봉착했다. 골때리는 사상초유의 사태였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고심책을 마련했다. 매우 영국스러운 방법으로. 그 해결책은 바로 '알고리즘'이다.

 

위대한 알고리즘이 너희의 등급을 정해줄 것이야

 

영국 시험감독청(Ofqual)은 학생들의 성적을 알고리즘으로 산출하기 위해 교사에게 두 가지 자료를 요청했다.

 

1) 학생들의 예상 A레벨 등급

2) 해당 등급 내에서 학생들의 상대적인 순위

 

사실 이 작업은 올해 시작된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다. 교사들은 매년, 학생의 모의고사 성적 등 자료와 자신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예상 성적을 제출해온 바 있다. 교사들은 대체적으로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대해 낙관적인 경향이 있다. 게다가 각 학교는 좋은 등급의 학생들을 많이 배출하고 싶어 한다. 자료의 신뢰성에 보강이 필요했다.

 

이에 시험감독청은 알고리즘을 통해, 최근 3년간 해당 학교 졸업생 성적을 기준 삼아 표준화 작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것 참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맞다. 한국 대학입시 3불 정책 중 하나인 ‘고교등급제’를 대놓고 실시한 것이다.

 

알고리즘이 매우 영국스러운 해법인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영국 교육의 특징은,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 동시에 매우 강도 높은 학교평가를 실시한다. 영국인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교육제도에 매우 익숙하다. 정량평가를 통한 차등 보상과 제재에 익숙하다 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영국 교육기준청(Ofsted)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교육기관의 업무와 실적을 평가하고 공표한다. 학교 운영, 학생안전, 교육의 질, 학업성취 등 다각적인 평가 결과가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고, 이에 기반하여 각 학교는 실질적인 보상과 제재를 받게 된다. 한마디로, 영국 교육당국은 비 행정부 정부기관으로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알고리즘의 교묘한 차별

 

새로운 정책은 큰 이견 없이 시작되었다. 급격한 학력 인플레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알고리즘을 통한 조정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A레벨 등급이 발표된 8월 13일, 단 2.2%의 학생들만 등급이 향상된 반면, 39.1%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예상보다 낮은 등급을 받게 되면서 큰 혼란에 휩싸였다.

 

단순히 등급이 낮게 나온 것에 대한 불만이라면 학생들의 생떼로 볼 수도 있지만, 알고리즘 조정 결과는 인종차별(Racist) 적이고, 계급 차별(Classist) 적인 문제가 있었다. 논란은 일파만파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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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etty Images>

 

이 이 논란의 핵심은 학급 규모에 따라 알고리즘이 다르게 적용된 데에 있다. 5명 이하의 소규모 학급은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15명이 넘는 학급인 경우에만 기존 학교의 3년간 평균 산출에 맞춰 성적이 조정되었던 것이다.

 

언뜻 학급 규모가 계급 및 인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매우 연관이 있다. 영국에서 5명 이하의 학급을 운영할 수 있는 곳은 대부분 비싼 등록금을 내거나 성공회 종교 기반의 명문 사립학교들이다. 반면, 지역 기반으로 운영되는 공립학교에서 한 학급이 15명 이하인 경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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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BBC>

 

이처럼 알고리즘 대책안에 교묘하게 구조화된 차별이 스며든 점이 영국스러운 두 번째 이유다. 알고리즘은 직접적으로 출신학교를 차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립학교의 최고 등급(A등급 이상) 학생 증가율(4.7%)은 공립학교(2.0%)에 비해 두 배가 넘는 결과를 산출했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본 학생은 공립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었다. 뉴스에서는 썩 좋지 않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의 슬픈 사연들이 매일 연이어 보도되었다. 이를테면, 영국 최빈곤 지역 공립학교의 한 학생은 담당 교사의 예상 등급으로 전 과목 A등급을 받았지만, 알고리즘 조정에 의해 전 과목 B 등급으로 바뀌기도 했다.

 

만약 수능이 취소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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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결과 번복은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인 영국정부는, 불과 이틀 뒤 결국 알고리즘 조정을 전면 취소했다. 교사가 최초로 제출한 예상등급(Centre Assessed Grade)으로 학생 성적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결국 알고리즘은 목표했던 등급 인플레이션과 불공정한 평가 모두를 예방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입 정책에 혼란만 가중하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만을 일으키고 말았다.

 

영국의 알고리즘 교육정책의 실패는 통계적 오류보다는 문화·윤리적 배경에 그 원인이 있다. 학생들이 교사들의 예측 등급을 수용한다는 전제부터 고교등급제 성격의 알고리즘을 적용은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 할 방법이다. 영국 교육당국이 대입정책에서 알고리즘 카드를 꺼내들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 다른 그들의 사회적 맥락이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 사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약 코로나19의 2차 확산세를 채 수그러뜨리지 못하고 11월을 맞이한다면, 우리는 수능을 대체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대한민국 교육부는 지난 8월 4일 시험실 입실 인원 축소, 칸막이 설치, 자가격리 수험생 별도 시험장 운영 등 계획을 포함한 ‘2021학년도 대입 관리방향’을 발표했다. 예방수칙을 준수하며 수능을 치르는 것 외에는 사실상 대안이 없음을 내비쳤다.

 

물론 예방수칙을 준수하면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영국처럼 불완전한 대안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한 수험생활을 해온, 예민해진 약 48만 명의 수험생을 대상으로 잡음 없이 시험을 운영해내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강남 학원가에서 수능특강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n차 팬데믹이 발생한다. 수능을 눈앞에 둔 교육부는 우왕좌왕하다 학생 안전을 우선시하는 전 국민적 여론에 수능을 연기한다. 연말까지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학생과 학부모는 불안감을 토로하고, 대학들은 입학 사정 업무 계획을 세울 수 없다. 해를 넘겨 어렵사리 수능을 실시해보지만 시험문제 유출, 감염자 시험환경 불공정 논란 등 방역과 보안 문제가 뒤엉켜 사태가 복잡해진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100만을 넘어섰다. 2020년 수능은 ‘코로나 수능’이라 불리며 역대 최악의 수능으로 역사에 회자된다.

 

가볍게 적어본 한 편의 상상이지만, 이 안에 드러나지 않은 수험생 개개인의 불안과 공포,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무기력함과 안타까움, 공정과 안전이 뒤흔들리는 사회적 혼란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대규모 전염병이 앞으로 보다 자주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감안하면, 이 문제는 올해만의 염려와 걱정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별일 없길 기도나 하며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 수능 시스템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걸맞은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 하루, 제한된 시공간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객관식 상대평가에 의구심을 던질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되었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간 응시, 채점, 정정, 대학 지원, 입학 허가까지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입시 일정 또한 관성에서 벗어나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

 

고려와 조선의 과거시험 때부터 우리는, 한날한시에 치러지는 평가에 대한 유서 깊은 신뢰가 있다. 반면 1년에 최대 7번 SAT 시험을 칠 수 있는 미국이 있고, 교사의 평가등급과 고교등급제 성격의 알고리즘을 시도했던 영국이 있고, 자격시험에 가까운 절대평가 대입시험을 운영하는 프랑스가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객관식 대입센터시험을 폐지하고 ‘제시문 및 정답이 있는 논술형’ 문제로 전환하는 일본도 있다.

 

전 세계 유학생이 530만 명이 넘는 현시점에도 각 나라의 대입 제도는 이렇게 다르다. 대입 제도는 그 나라 대중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전 지구를 덮친 바이러스로 일상의 모든 기준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는 지금, 대입정책 설계에도 새로운 변화와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다.

 

특히 대한민국은 2025년 고교 학점제 전면 도입으로 인한 중장기 대입 제도 개편을 앞두고 있는 현 상황이다. 교육, 행정, 그리고 보건 의료의 관점에서 이해관계자들의 보다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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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응시 횟수를 늘릴 것인지. 정시를 유지한다면 수능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야 할 것인지. 고교 학점제 내신 절대평가에서 우리 사회는 교사의 평가 권한을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는지. 팬데믹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된 논의에서 과연 수능은 지속 가능할지. 어떤 방법이 인생의 기로에 선 아이들에게 덜 한숨 쉬고, 덜 눈물 흘리는 대책이 되어줄 수 있을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제도에 대해 어른들이 머리를 맞댈 시점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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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