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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는 남자

 

얼마 전, 친형한테 전화가 왔다. 여전히 집 안에서 담배 피우는 아빠 때문에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야! 니 형수가 아주 미칠라 한다. 아빠는 나름대로 창문도 열어놓고 방에 공기청정기도 갖다 놓았으니 괜찮지 않냐고 하는데, 괜찮을 리가 있냐? 거실로 담배 연기가 솔솔 새어 나오는데. 니 조카들이 다 거실에서 놀잖냐. 니 형수는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밖에서 피면 안 되냐는 거고, 아빠는 모르쇠로 일관하니까, 중간에서 내가 죽겄다. 니가 아빠한테 좀 말해봐~”

 

“아니, 형은 아직도 아빠를 몰라? 아빠 고집을 어떻게 꺾으려고. 쉽지 않을 거 같은데? 푸하하하. 엄마 아빠가 원한 것도 아닌데, 굳이 굳이 형이 모시고 살겠다고 한 거니까 형이 감당해야지 뭐.”

 

“지난번에는 나도 참고 참다가 아빠한테 몇 마디 했더니만, 그럴 거면 왜 같이 살자고 했냐면서, 혼자 원룸 가서 사시겠데. 어떡하냐 진짜?”

 

“아버지가 백 년 천 년 사시는 것도 아니고. 이제 길어야 이십 년 사실 텐데, 그냥 피우시게 냅둬. 그나마 담배 피우는 낙으로 사는 사람한테 그걸로 자꾸 스트레스 주면 뭐 할 겨. 그런다고 아빠가 밖에 나가서 피울 사람도 아니고. 우리도 어릴 때 다 아빠 담배 연기 맡으면서 컸잖아.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잖아.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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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기억 속 아빠는 매우 엄한 어른이었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많이 하거나 매를 자주 드는 건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노(怒) 기를 드러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만큼 무뚝뚝하고 과묵했다.

 

주말에 아빠와 단둘이 축구를 했다거나 영화관에 다녀왔다는 친구들 얘기가, 내겐 딴 세상 얘기처럼 들렸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단 한 번도 아빠와 단둘이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난 아빠를 잘 몰랐다. 어릴 땐 어떤 아이였는지, 20대 땐 어떤 꿈을 꿨었는지, 엄마는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사랑했는지, 살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언제였는지, 또 언제 제일 행복했었는지, 아빠는 한 번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늘 거실에 가만히 앉아 신문을 읽고, 담배를 피우면서 뉴스를 봤다. 그게 다였다.

 

그런 까닭에 나에게 아빠는 언제나 그냥 ‘아빠’였다. 철부지였던 학창 시절에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20대 때도 그랬다. 그런 아빠가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보이기 시작한 건 노가다판에 들어와서다.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것

 

대충들 아는 것처럼 노가다판의 절대다수는 50대 중후반에서 60대 중반이다.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후 세대, 특히 1955~1963년에 태어난 세대)

 

우리 팀만 해도 16명 중 11명이 60세 안팎이다. 그러니까 현재 나는 친구,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아버지, 삼촌뻘 어른들과 함께 보내고 있는 거다.

 

돌이켜보면 대학 때도, 회사 다닐 때도 이 나이대 어른들과 가깝게 지낼 일이 없었다. 물론, 대학 때도 친한 교수가 서넛 있었고, 회사에서도 상사, 부하직원 이상의 교감을 나눈 사이가 몇몇 있었지만, 노가다판에서처럼 형님, 아우 하면서 격 없이 지낸 적은 없었단 얘기다.

 

형님, 아우? 그렇다. 노가다판에선 나이 차가 많든 적든 무조건 형님이다. 처음엔 아버지뻘 어른한테 형님이라고 하는 게 영 어색해 주저했다. 그랬더니만 벼락같은 호통이 날아왔다.

 

“얀마!!! 그냥 형님이라고 혀~ 노가다판에선 나이 많으면 형님, 적으면 아우여.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격식 따지면 한도 끝도 없는 겨~”

 

아무튼 그 뒤로는 “형님.”, “형님.” 하면서 살갑게 따라다녔다. 그랬더니 술자리에도 끼워주고, 낚시 갈 때도 곧잘 날 데려갔다. 그때마다 형님들은 “이야~ 너는 태어나기도 전이니까 상상도 못 할 거다. 그때는 말이다.” 하면서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과묵한 아빠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아주 생경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를테면 그 시절이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 하루 세 끼를 먹는다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지 하는 것들. 또 어릴 때 꿈꾸고 상상했던 나름의 이상향이 현실 앞에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자신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참아가며 버텨내야 했던 삶의 무게라는 게 도대체가 얼마큼이었는지 하는 이야기들...

 

형님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러니까 아빠한테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거꾸로 아빠를 생각했다. 그 고민, 그 무게, 그 시련과 좌절, 모르긴 몰라도 다르지 않았겠거니, 하면서.

 

집이 가난해 배울 수 없었고, 그래서 노가다판에 뛰어든 형님들처럼, 학교 다닐 형편이 못돼 중학교까지만 다닌 아빠는 회사택시를 몰았다. 하루하루 손목이 부서져라 망치질해서 받은 일당을 모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융자 받아 집을 산 형님들처럼, 우리 아빠는 밤낮없이 회사택시 굴려 사납금 채우고, 그렇게 받은 월급으로 형과 나를 먹여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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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삶을 생각했다

 

그렇게 10여 년 회사택시를 무탈하게 굴린 아빠는 개인택시를 한 대 받아 나왔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얘기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빠의 ‘로열 프린스’ 택시 앞에 가족 모두 모여 고사 지냈던 장면, 내색은 크게 안 해도 무척이나 밝아 보였던 아빠의 얼굴.

 

아빠가 개인택시를 운전한 건 불과 몇 년이었다. 병원에 몇 달이나 입원했을 정도로 큰 사고가 났다. 아빠의 청춘, 어쩌면 그 자체였던 로열 프린스는 그렇게 폐차됐다.

 

개인택시 면허를 판 아빠는 자그마한 이불 가게를 차렸다.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으련만, 불과 1년 남짓 만에 IMF가 터졌다. 어려서 잘 몰랐던 IMF 당시의 풍경은 친한 형님에게 들었다.

 

“영원할 것 같던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는데, 이러다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닌가 싶더라니까. 노가다판이라고 사정이 달랐겠냐? 올스탑이었어. 공사 현장 자체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때 9개월을 놀았다. 9개월. 그때는 진짜 죽겠더라. 나중에는 담뱃값도 없어가지고 마누라한테 돈 좀 달라고 하려는데, 아휴~ X벌~ 입이 떨어져야 말이지.”

 

아빠는 결국, 이불 가게를 접었다. 그때도 아빠는 아무 말 없었고, 그래서 난 잘 몰랐다. 묵묵히 가게를 정리하던 아빠의 뒷모습만 기억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아빠에게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큰아들과 곧 중학교에 입학할 막내아들이 있었다. 16평짜리 아파트에 딸린 융자금과 1.5t 탑차에 딸린 자동차 할부금, 가게 유지하느라 융통한 자잘한 빚도 있었다. 아빠 나이 44살이었다.

 

담뱃값이 없어서, 그 몇천 원이 없어서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하고 구차스러워서 끝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던 형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빠를 생각했다. 아니, 그 남자의 삶을 생각했다.

 

자식들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속이 오죽했을까 싶은, 그런 세월을 견디고 견뎌가며 두 아들을 키워낸 55년생 일영(日永) 씨의 삶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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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통화한 다음 날,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 멀리 사는 것도 아닌데,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녀석이 어쩐 일이냐며 엄마가 날 반겼다. 오랜만에 집 밥 먹고 싶어서 왔다고 둘러대고는 얼른 아빠 방으로 갔다. 품에 숨겨온 담배 한 보루를 건넸다. 형이랑 형수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빠, 이제 날씨 좀 풀렸으니까 번거로워도 어지간하면 밖에서 피우세요. 건강 생각해서 좀 줄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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