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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벌써 100일이 지났다. 국제적으로 미얀마 군부에 대해 강경한 비판도 나오고 개별적 경제제재안을 하는 국가들도 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대표적 국제기구인 UN은 적극적 개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군부의 강경함은 변함이 없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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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연합뉴스 사진

 

시민들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공공병원 의사, 일부 정부 기관의 젊은 공무원, 경찰 및 군인들도 시민불복종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CDM)에 참여하며 쿠데타에 반대 의사를 표한다. 시위를 주도하는 Z세대는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거리 시위를 조직하고, 미얀마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미얀마 민주진영은 쿠데타 직후, 군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정통성 있는 위원회를 수립했다. 연방의회대표위원회(Committ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 CRPH)이다. 작년 미얀마 총선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연방의회대표위원회는 국민을 합법적으로 대표하는 건 자신들이라 천명했다. 

 

이후 연방의회대표위원회는 4월 16일 국민통합정부(National Unity Government, NUG)를 출범했다. 윈민(Win Myint)을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아웅 산 수찌(Aung San Suu Kyi)를 국가 고문으로 추대되며 쿠데타로 전복되기 이전의 NLD 행정부 인사를 대부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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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민(Win Myint)과 수찌

 

이와 함께 연방의회대표위원회는 새 헌법인 연방민주주의헌장을 발표했다. 2008년에 제정된 군부 위주의 헌법을 폐지하고, 연방헌법을 제정하여 연방민주국가를 설립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얀마 국민통합정부 구성엔 놀라운 점이 있다

 

지금의 미얀마는 약 30년 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여 민주진영과 시민사회가 과도 정부를 구성하고, 쿠데타 세력의 정통성을 부정한다. 우리의 6월 항쟁 같았던 미얀마의 1988년 민주항쟁(일명 ‘8888 항쟁’)과 곧이어 일어난 신군부 쿠데타 이후의 미얀마 모습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소수 민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고 있다.

 

국민통합정부에는 15명의 장관이 있다. 이 중 6명이 카렌(Karen), 까친(Kachin), 친(Chin)족 같은 소수민족 정치인으로 구성되었다. 12명의 차관 중 6명이 소수민족 출신이다. (카렌, 까친, 몬(Mon), 까얀(Kayan), 카레니(Karenni), 따앙(Taang)족) 

 

한계점을 꼽자면 수많은 민족 집단 중 6개의 소수 민족만 과도 정부 인사로 구성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정도도 전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다. 하나 놀라운 점은 통합정부를 구성하는 민족 중 카렌족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카렌족은 영국 식민시절부터 카렌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자치권 및 소수 민족 권리 보장을 주장하였고, 독립 후엔 땃마도(미얀마 군대)와 무장 항쟁을 벌이며 저항하고 있는 강경한 소수 민족이다. 땃마도에게 가장 위협적인 소수 민족 세력은 강한 군대를 보유한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 KNU)이다. 

 

이번 쿠데타 정국에서도 땃마도와 카렌민족연합은 (국지적인) 내전을 하고 있다. 이런 카렌족이기에 우리 언론에서도 쿠데타에 대항하여 버마족 민주세력과 카렌족이 뜻을 같이한 걸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카렌족의 합류로 민주 세력의 힘이 매우 커져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래서 국가적 규모의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는 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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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동아일보>

 

본 기사 시리즈에선 이 카렌족이 누구인지 다루며 미얀마 소수 민족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카렌민족연합 5여단 대변인 Mahn Mahn 장군과 온라인 인터뷰를 진행했고, 과거 현지 조사 할 때 만났던 Zipprorah 전 카렌민족연합 부통령의 생각을 기사에 담았다. (카렌족 지도자로 인터뷰에 응했으나, 두 사람의 응답이 반드시 카렌족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다)

 

 

카렌족은 누구인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포털을 통해 카렌족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미지는 주로 태국 북부의 산지에 거주하는 긴목 카렌(Longneck Karen)의 모습이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목이 길수록 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금으로 된 링을 목에 두르고, 그 수를 늘려가며 긴 목을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거주하는 마을은 트레킹, 소수 민족 전통 체험 등과 같은 관광 상품에 포함되어 외부에 잘 알려져 있다. 

 

본 기사에서 다루는 미얀마 내 카렌족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미얀마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 지역에서부터 동남부의 카렌주에 넓게 퍼져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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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북부의 긴목 카렌족(좌)과 미얀마의 카렌족(우)

 

미얀마에서 카렌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인구는 약 360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샨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소수민족이다. 그들은 대략 서기 300-800년 사이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들이 다른 종족 집단과 공존했던 시기는 사실상 짧지 않다. 

 

외부 세계에 그들이 노출되기 시작한 건 영국의 승리로 끝난 영국-버마 전쟁(1824-1885)을 거치면서이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침례교)로 개종했다. 영국은 그들에게 고등 교육도 제공하는 등 당시 엘리트 대우를 해줬다. 그렇게 형성된 카렌족 엘리트들에 의해 1881년 카렌족의 첫 대표 기관이 설립된다.

 

그것이 현 카렌민족연합의 전신인 카렌민족협회(Karen National Association, KNA)이다. 그들은 범카렌 정체성(Pan-Karen identity)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부터 카렌족은 종교적 색채, 종족의 대표성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카렌족과 버마족의 갈등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세계 웬만한 곳이 그렇듯 여기에도 역시 영국이 얽혀있다. 영국은 1824년부터 1885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버마-영국 전쟁’을 통해 결국 미얀마 마지막 왕조인 ‘꼰바웅(Konbaung) 왕조’를 무너뜨렸다. 순탄치 않았던 과정이었던 만큼 영국인에겐 버마족의 끈질긴 저항 정신이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인도 식민 통치에도 사용했던 특기(!)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미얀마에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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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에 체포된 버마군들이 나무 구조물에 묶여 있다. / 출처-<북폴리오> 

 

영국은 버마족을 억누르고 변방(Frontier)에 있는 소수 민족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식민 정책을 폈다. 소수 민족을 이용하여 버마족을 지배했다. 소수 민족 중에서도 카렌족은 꽤 지위를 보장받았다. 1923년에는 영국이 설립한 버마 입법부(Legislative Council of Burma)에 소수 민족으로 유일하게 카렌족 대표 5명이 포함될 정도였다. 

 

영국에 의해 보장받았던 카렌족의 정치, 사회적 위치는 후에 버마족과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미얀마에선 1900년대 초반부터 버마족의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는데, 이때부터 형성되는

 

“친영국 성향의 카렌족 VS 반영국·친일본 성향의 버마족”

 

구도의 대립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서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수의 버마족으로 구성되어 일본군과 연합한 버마독립군(Burma Independence Army, BIA)에게 카렌족 군대는 달갑지 않았다. 

 

후일 버마독립군이 버마국립군(Burma National Army, BNA)로 명칭을 바꾸고 재정비를 할 때 카렌군 1개 대대도 포함되긴 하였으나 다수는 바마족 군인이었다. 버마국립군은 독립 이후 재정비되어 현재의 미얀마 군대로 계승되었다. 

 

 

왜 카렌족은 버마족과 전쟁을 시작했나

 

독립이 다가왔을 당시, 아웅 산 수찌의 아버지이자 미얀마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의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는 버마연방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변방의 소수 민족들에 도움을 요청하며 자치권을 보장할 테니 하나의 연방국가로 뭉치자고 설득했다. 그 시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하나는 1947년 2월 열린 ‘삥롱 회담(Panglong conferen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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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롱 회담에 참여한 대표자들

 

하지만 카렌족은 이미 그들만의 ‘민족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연방 자치주가 아닌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다. 그들에겐 삥롱 회담은 독립 이후 통일된 버마 연방을 구성하고자 하는 버마족의 정치적 수사로 느껴졌다. 

 

카렌족은 독립이 다가올 무렵 일찍이 영국에 사절단을 보내 독립 카렌 국가에 대한 의사를 밝히고 지원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 국가 건설 협상의 주도권은 아웅 산 장군으로 대표되는 반파시트스인민자유연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AFPFL)으로 넘어갔다. 

 

이후 카렌민족협회는 카렌민족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헌법 제정단 등 버마연방국가의 준비를 위한 참가를 거부하며 독립만을 요구했다. (삥롱 회담에도 결국 참여하긴 했으나 샨, 까친, 친족과 같은 실질적 참여가 아닌 참관인으로 참가했다)  

 

이 시기 미얀마는 큰 혼란에 빠진다. 독립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아웅 산의 암살(독립 6개월 전), 연방제 수립에 대한 이견, 독립정부의 내부 갈등 등의 문제로 인해 이 혼란은 독립 이후에도 한참 지속된다. 

 

미얀마가 독립하며 연방국가가 건설되었으나, 소수 민족들이 주장한 연방제 안은 제대로 고려되지 못했다. 재정 자치권을 포함한 완전한 연방제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소수 민족 내에 있던 강경파 세력들의 주장이 세지며 카렌족 외에 샨족, 와(Wa)족, 까친족, 친족 등도 독립을 요구 했다. 독립 국가 건설이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렌족은 결국 미얀마 독립 다음 해인 1949년도부터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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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민족연합의 군대 '카렌민족해방군(KNLA)'

 

 

전쟁이 시작된 후의 카렌족

 

카렌민족연합 5여단 대변인 Mahn Mahn 장군은 독립을 요구하는 카렌민족주의의 동기와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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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n Mahn 장군

 

“소수 민족으로서 바마족과 다르게 차별 대우받으며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음이 카렌민족주의의 근본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정서는 다른 소수 민족 집단도 다를 바가 없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다른 소수 민족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카렌민족주의라고 해서 다른 소수 종족과의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독립 이후 출범한 정부의 근간이 된 1947년 헌법을 보게 되면 연방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 소수민족에게 연방제를 보장하지 않았다. 이후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카렌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무장항쟁을 병행하게 된 것이다.”

 

카렌민족연합과 미얀마 정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미얀마에는 1962년 쿠데타가 일어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 중반 이후엔 카렌민족연합과 미얀마 정부 사이에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내전을 피해 많은 카렌족 민중들은 태국 국경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미얀마 정부군은 1984년 이후 대대적인 공격 작전을 감행했다. 이를 피해 카렌족은 대규모로 국경인 모에이(Moei)강을 넘어 태국으로 이주했다. 미얀마 정부군이 계속 후퇴하지 않자 이들은 몇몇 지역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국경 지역을 따라 난민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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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지구촌나눔운동>

 

(미얀마 지역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첨언하자면, 미얀마 내 소수민족 연구는 쉽지 않다. 그동안 미얀마는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얀마 카렌주의 태국 국경지역 쪽에 거주하는 카렌족들의 독립·저항 투쟁은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잘 연구되었다. 태국은 학자, 인권 및 인도적 지원 단체의 접근이 비교적 쉬워서 태국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렌족 난민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실상을 알릴 수 있었다) 

 

정부군과 내전은 계속되었다. 1995년에는 미얀마 카렌족의 수도 역할을 했던 마너플로(Manerplaw)가 미얀마 정부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면서 또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다. 마너플로는 카렌족이 열망했던 독립 국가의 수도가 될 곳이었다.   

 

태국과의 국경지역에 카렌족 난민은 계속 증가하다 2005년부터 시행된 유엔난민기구(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UNHCR)의 제3국 재정착 프로그램으로 감소세를 맞이했다. 수많은 카렌족 난민이 미국, 호주, 핀란드,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스웨덴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2010년도 총선 즈음 다시금 내전이 격화되었다. 난민촌으로 이주한 난민의 수는 다시 증가하였다. 현재 미얀마에는 수많은 카렌족 사람들이 거대 난민촌들에 살고 있으며, 이 외에도 많은 난민촌에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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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경 근처 미얀마 난민캠프

 

문기홍 (시드니대학교, 정부 및 국제관계학과 박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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