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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판의 情

 

대학 졸업하고 입사한 첫 회사가 망했다고 가정해보자. 나름의 부푼 꿈과 기대를 안고 사회 첫발을 내디뎠고, 대학에서 갈고닦은 역량을 뽐내고자 최선을 다했고, 이제 겨우 회사 분위기에 적응했고, 회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곳에 뼈를 묻겠다.” 뭐 그런 굳은 의지와 각오를 다지던 청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는 거다. 갑작스러운 부도로 백수가 된 그 청년은 어떤 기분일까. 당장 백수 된 건 둘째 치고, 엄청난 상실감이 밀려오지 않을까.

 

지난해 여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속해있던 목수팀이 깨졌다. 어느 조직에나 있을 법한 내부 갈등이 싹텄다. 그걸 수습하지 못했다. 고름처럼 터져버렸다. 나로선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게, 나에겐 첫 번째 목수팀이었다.

 

‘개잡부’ 시절, 같은 현장에 있던 목수팀 오야지와 친하게 지냈다. 오야지는 날 마음에 들어 했다. 기술 배울 생각 있으면 다음 현장 갈 때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망치를 들었다. 줄곧 그 오야지 밑에서 망치질 배웠다. 예로 든 청년만큼은 아니었겠으나, 나 또한 상실감이 제법 컸다.

 

내 마음이 더 복잡했던 건 함께 일했던 형님들 때문이었다. 형님들 대부분이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각자 살길 찾아 다른 현장으로 떠났다. 한 형님에게 툴툴거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다.

 

“야 인마~ 노가다판이 다 그런 겨. 수시로 사람 들고나는 게 이 바닥 아니냐. 팀 하나 깨지고 또 새로 생기는 거?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여. 그때마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쥐어짜고 있을래? 당장 처자식이 밥 굶을 판인데? 너도 망치질 계속할 생각이면 빨리 다른 팀 알아봐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질질 짠다고 어디서 돈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상은 멀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하는 수없이 가깝게 지냈던 형님 꽁무니를 따라나섰다. 회사원으로 다시 비유하자면 같은 직종의 다른 회사로 이직한 셈이다. 내가 망치질한다는 걸 제외한 모든 환경이 바뀌었다. 당연히 현장도 바뀌었고, 오야지도 바뀌었고, 작업반장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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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팀에 적응하랴, 무더위와 싸우랴,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났을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휴~ X발, 재미없어.”

 

한숨처럼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랐다. 황급히 입을 막았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두었던 진심이 ‘툭’ 튀어나와 버린 거다.

 

'목수 일, 그만둬야 하나?'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괜히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더니… 재미없다고 징징거리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새삼, 목수 일 처음 시작하던 때가 떠올랐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기만 하던 그때 말이다. 먼저 손 내밀어 준 건 창수 형님(지금은 내가 친형님처럼 따르는)이었다. ‘개잡부’로 일하다 목수팀에 들어간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점심 먹고 쉬던 참이었다. 집에 김치 떨어진 게 생각나 핸드폰으로 주문하고 있었다. 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 창수 형님이 이렇게 말했다.

 

“야! 너 김치 사 먹냐?? 김치를 왜 사 먹어. 이따 일 끝나고 형 집 들러라. 김치 싸줄 테니까.”

 

“아니에요. 안 그러셔도 돼요.”

 

“군소리 말어. 끝나고 형 차 따라와.”

 

그때까지 창수 형님과 난 얘기도 몇 마디 안 나눠봤었다. 근데도 형님은 가타부타 묻지 않았다. 그저 같이 일하는 동생이 김치 사 먹는다고 하니, 마음 쓰였던 거다. 일 끝나고 형님 집으로 갔다. 형님은 김치 한 봉지, 밑반찬 두어 개, 사과 세 알, 김 서너 봉지를 종이백에 담아줬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다.

 

“집에 쌀은 있냐?”

 

“아예~ 쌀은 있어요. 이렇게 안 싸주셔도 되는데,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김치 떨어지면 또 얘기해. 형이 챙겨줄 테니까.”

 

형님이 챙겨준 종이백을 들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각오로 맺었던 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노가다판에 왔던 거다. 각오는 그렇게 했었지만, 실은 무척이나 외롭고 두려운 나날이었다. 자려고 누워있으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그게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 때였다. 아마도 그래서 형님 손길이 더 따스하게 느껴졌던 거 같다. 내가 세상을 향해 다시 고개 내민 것도 그즈음이었던 거 같다. 나는 그때부터 창수 형님을 친형처럼 따랐다. 자연스럽게 다른 형님들과도 친해졌다. 주말이면 함께 캠핑도 다니고, 여름엔 다 같이 물가 가서 백숙도 끓여 먹었다.

 

일할 때도 무척 즐거웠다. 목수 일 자체도 물론 재밌었지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더 즐거웠다. 농담 따먹으면서 하하, 호호, 껄껄껄 하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났다. 누구는 목수 일 처음 배울 때 그렇게 힘들고 어렵다던데, 난 비교적 쉽게 배웠다. 모두 형님들 덕분이었다.

 

나에게 첫 번째 목수팀은 그런 팀이었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마음을 내어준 사람들.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손 내밀어 준 사람들.

 

그런 팀이 갑자기 깨져버린 거다.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해서 새로운 팀에 가긴 했다만, 적응이 안 됐다. 늘 겉도는 느낌이었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 안 하고 망치질만 한 날도 있었다. 그러니 목수 일이 아무리 좋아도 흥이 안 날 수밖에. 그날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목수 일, 그만둬야 하나?’

 

무얼 먹느냐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먹느냐

 

길지 않은 인생이었다만,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랬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기준은 늘 행복이었고, 그 행복을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취직한 잡지사 때부터 그랬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다들 멋졌다. 그들은 잡지 한 권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리하여 함께 호흡하는 매 순간이 모두 즐거웠다. 원고 마감한다고 몇 날 며칠씩 밤을 새워도, “이게 기사냐? 다시 써!!!”라는 말로 매번 혼이 나면서도(그 순간엔 입이 삐죽 나왔지만) 웃으며 일할 수 있었던 건 역시, 그들 덕분이었다.

 

연애할 때도 항상 그랬다. 남들은 데이트할 때 뭘 먹을지, 뭘 해야 할지, 늘 고민이라는데 난 그런 게 없었다. 애인이 묻거든 언제나 너 먹고 싶은 거 먹자고 말했다. 그럴 때면 “오빠는 나랑 하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 없어?”라고 되묻기도 했다.

 

물론, 나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 근데 굳이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지 않아도 괜찮다. 나에게 무얼 먹느냐보다 중요한 건 누구와 먹느냐니까. 그러니 애인이 먹고 싶은 파스타든, 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이든, 맛집 유튜버가 추천하는 쌀국수든 상관없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먹는 건데, 아무렴 어떠랴. 그게 설령 똥인들 내가 못 먹을까.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 있…… 있겠지!!?? 있을걸?

 

그런 거 같다. 노가다판 와서 새삼 깨달은 이치. 결국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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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그건 그렇고 나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목수 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그날, 결국 현실 앞에 무릎 꿇었다. 그 뒤로도 씨팔, 저팔 찾아가며 억지로 망치질을 했다.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지난겨울, 창수 형님에게 연락이 왔다.

 

“눈칫밥 먹어가며 일하려니 힘들지? 푸하하하. 형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던 거 기억나냐? 우리 원년 멤버들 주축으로 새롭게 팀 하나 꾸렸다. 일주일만 있다가 합류해라. 고생 많았다.”

 

그렇게 요즘 난, 그때 그 시절처럼 하하, 호호, 껄껄하며 즐겁고 재밌게 망치질하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