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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허큘리즈

 

나이키 허큘리즈로 낙점한 한국 정부는 즉시 맥도널 더글라스(나이키 미사일 제조사)에 의사타전을 한다. 180km의 사거리를 240km로 늘리는 계약을 추진한 거다. 그런데, 여기서 맥도널 더글라스 社가 좀 ‘쎈’ 가격을 내놓는다.

 

“3천 만 달러는 내놔야 한다.”

 

이에 한국 정부는 꼼수를 쓴다.

 

“오케이, 인정! 그런데, 한두 푼도 아니고 이게 기술적으로 타당한지 우리도 알아봐야 할 거 아냐?”

“어쩌라고?”

“우선 예비 가능성 검토를 해보자. 그렇다고 우리가 아주 양심 없이 거저하자는 게 아니라 기술 가능성 검토 명목으로 180만 불짜리 계약 하나 할게. 그 뒤에 이게 가능하다 싶으면 본계약 하는 거 어때?”

“오케이!”

 

이렇게 ADD 요원 10명이 가서 MD사의 기술을 요령껏 배워왔고, 그 뒤의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배울 건 다 배웠다는 거다.

 

(비슷한 시기 북한은 4차 중동전 때 이집트에 Mig-21 1개 비행중대와 파일럿들을 파병했는데, 나중에 그 대가로 이집트 군의 스커드 미사일을 넘겨받는다. 이 스커드 미사일을 북한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내놓은 게 노동, 대포동 미사일이다. 훗날 이집트와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집트의 스커드 미사일 운용유지와 후속지원을 북한이 했으니, 한민족의 눈썰미와 손재주는...)

 

문제는 물밑에서 미사일 개발을 하더라도 결국 미국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거다. 프랑스 기술을 들여와 추진체를 개발하고 유도탄을 개발한다 하여도, 기본적인 설비는 미국의 기술을 도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미 국방부에서 군수물자 및 군수물자 제조용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MCB(Munition Control Board)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ADD는 미국과 협상을 했고, 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허가를 받는 대신에 미사일의 성능에 대한 조정에 들어갔다. 당시 국방과학연구소(ADD)와 주한 미군 사령관 스틸웰과 타협을 하게 된다. 이때 나왔던 타협안이 사거리 180km(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직선거리) 탄두 1천 파운드 미만이었다. 이후 한반도 미사일은 MTCR에 가입하기 전까지 대체로 이 정도 수준에서 미사일 개발을 한다.

 

 

MTCR(미사일통제체제)

 

이 대목에서 말 많고 탈 많은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 미사일통제체제)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핵무기가 NPT에 의해 규제되는 것처럼 미사일 역시 MTCR에 의해 규제되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 MTCR은 NPT와는 다른 형태의 비확산체제다. NPT가 핵물질 자체의 개발이나 보유를 금지하는 방식이라면, MTCR은 MTCR 회원국, 즉 일정 수준 이상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가지고 미사일을 개발한 국가들이 그렇지 않은 국가들에게 미사일과 미사일에 사용될 부품, 기술에 대해 수출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MTCR 회원국은 비회원국에게 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 이상의 미사일 완제품이나 부품, 기술을 수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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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CR 회원국

 

여기서 MTCR의 맹점이 나오는데, MTCR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에 대한 수출 통제만 가능하다는 거다. 달리 말해서 북한과 같이 자체개발해서 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은 ‘합법’이란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수출을 보고 놀란 미국은 서둘러 1990년 ‘MTCR 이행법’이라는 국내법을 만든다.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MTCR 비회원국 간에 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 이상의 미사일 또는 부품을 수출입할 경우, 미국이 쌍방 해당국가에 대해 일방적 무역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다.”

 

엄밀히 미국의 일방주의 법이다. 주권을 가진 다른 국가들의 미사일 수출입을 제3자인 미국인 간섭해 제재조치를 취한다는 자체가 NPT와 같은 불평등적인 요소가 강한 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런 불평등적인 미국 내의 ‘국내법’도 북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법의 내용이 MTCR 비회원국 간의 미사일 거래에 대해서만 제재를 한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수출용이 아니라 국내용(?)이라며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도 미국은 제재할 수단이 없다. 또 미국이 미사일을 수출한 국가나 수입한 국가에 대해서 수출입 제한을 한다 하지만, 그 수출입 제한 품목이 미국의 군수품에 한정되어 있다. 이 법을 위반하였다고 해도 북한이나 북한에서 미사일을 수입하였던 시리아나 이란 등에 별 실효성이 없다는 거다. 단적인 예로 1990년 이 법이 발효된 이례로 MTCR 이행법을 어긴 14건의 사건 중 9건이 북한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실효성 있는 제재는 없었다. 북한이 미국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나라도 아니기에 그저 MTCR 이행법을 어긴 불량국가라는 상징적인 의미만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2001년 MTCR에 가입한다. MTCR은 혜택이 의무보다 많다. 문제는 가입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MTCR 회원국 전원의 만장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2001년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의 개정은 MTCR 가입과 궤를 같이 한다. 한국은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을 초과하는 고체 로켓을 개발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미국 쪽에 전달했는데, 이건 MTCR 기준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이미 미국과 사전에 협의를 다했고, 거기에 발맞춰 미사일 지침을 개정한 거였다)

 

 

 

박정희의 미사일 개발과 전두환

 

다시 이야기를 한국의 미사일 개발로 돌리면,

 

1976년에 대전 기계창이 준공되고, 본격적인 유도탄 개발에 돌입한다. 문제는 한국이 개발한 추진체의 성능이다. 여기저기 기술이나 훔쳐서 얼기설기 엮는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거다. 미국은 즉시 대전기계창에 CIA 요원 2명을 상주시키겠다고 통보했는데, 박정희 정부가 단칼에 거부했다.

 

그리고 1978년 9월 26일, 국산 유도탄이 박정희 대통령 참관 하에 공개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한국 최초의 지대지 탄도탄 <백곰>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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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한국은 핵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로서는 절박했던 게 불과 20년 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바로 얼마 전 월남이 패망하는 걸 봤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에 있는 주한미군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 핵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인도가 한 발 빨랐다. 1974년 인도가 핵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곤 전 세계에서 핵개발을 준비 중인 나라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에 나섰고, 덜컥 한국이 걸렸다.

 

핵만 개발한 게 아니라, 이 핵을 날릴 수 있는 탄도탄까지 같이 개발하며 박정희 정부는 착실히 핵개발을 준비했던 거다. 아무런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1976년 12월 2일, 대전 기계창(국방과학연구소)을 만들었는데, 1978년 4월에 최초의 한국 유도탄 1호가 개발됐고, 9월 초까지 8호기를 생산했던 걸 보면 한국 정부는 총력을 다해 미사일 개발에 나섰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기술은 봉인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를 대신 할 신군부가 문제였다. 미국의 승인이 절실했던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유산을 버리기로 했다. 핵과 미사일을 넘기는 조건으로 미국의 승인을 얻은 거다.

 

1980년 8월 국방과학 연구소 소장이며 미사일 개발의 총지휘자였던 심문택 박사가 해임됐고, 뒤이어 30여 명의 핵심 기술자와 미사일 개발의 중추였던 이경서 박사, 강인구 박사 등이 줄줄이 숙청당한다. 이를 주도했던 건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 결과 얻은 반대급부는 전두환의 미국 방문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에 대한 미국의 집착은 상당했는데, 1982년 12월 국방과학연구소에 새로운 소장이 취임한다. 바로 육사 11기 김성진. 전두환과 같은 기수였던 인물이 왜 하필 여기에 들어왔을까? 결론은 간단하다. 숙청이었다. 김성진은 국방과학연구소의 2,400여 명 중 1/3이나 되는 800여 명을 감원하며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미국 측에 한국은 미사일 개발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였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 눈치를 봐야했던 거다)

 

전두환의 등장으로 한국의 미사일 개발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뒤집은 것도 전두환이었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보복을 생각하던 한국 정부가 내놓은 게 박정희 정부 때 내놓은 백곰 미사일의 실전배치였다. 문제는 실전 배치하기 전에 미국과 교통정리가 필요했다는 거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국방과학연구소 숙청작업에 앞장섰던 인물이 이제는 미사일 실전배치를 앞두고 미국과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니... 어쨌든 이때 주영복 장관은 장관의 공한으로 미국 측에 ‘사거리 180km, 탄두중량 1000파운드’라는 1974년 5월의 약속을 공식화한다. 말 많고, 탈 많은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공식화된 거다. 

 

자, 문제는 미국이 도통 한국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백곰 미사일의 실전형인 현무 미사일이 나오고, 이게 차곡차곡 배치되자 미국이 불안해진다. 다시 미사일 사거리 협정을 맺자고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현무 미사일이 실전 배치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략물자 및 기술자료 보호에 관한 양해각서를 맺자고 하더니,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바로 압박을 넣었다. 결국 1990년, 사거리 180km, 탄두 중량 500kg 이상의 어떠한 로켓도 개발하지 않는다는 개정안이 나온다. (‘어떠한’ 로켓을 만들지 않는다는 건, 산업용, 과학용 로켓도 만들지 않는다는 거다. 인공위성을 쏴올릴 발사체 같은 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사일 주권을 빼앗겼다는 표현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거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주권을 되찾아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북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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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21세기 초 북한은 미친 듯이 로켓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했다. 특히 이 중에서 우리의 이목을 끌었던 게 광명성 로켓이었다. 1998년 8월 31일에 발사된 북한의 이 인공위성(비록 실패했지만)은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인공위성 발사체를 군사적으로 전용하면 그게 ICBM(대륙간 탄도탄)이다.

 

한국이 들고 일어났고, 미국도 할 말이 없었다.

 

“북한은 노동에, 대포동에 이번에 광명성까지 쏴 올리는데! 우리 언제까지 사거리 180킬로미터에 걸려 있어야 하는데!”

“......”

 

미국도 양심은 있었는지, 한국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