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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4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누군가는 이로써,

 

“한국의 미사일 주권이 회복됐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이제 한국도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며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 내려온 미사일 개발 제한 족쇄를 풀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분명한 건 환영할만한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이란 거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력이 이만큼 성장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외교 테이블에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미국의 對 중국 견제 조치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이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왜 만들어져야 했는가이다. 개인적으로 한반도 내로 특정한다면, ‘미사일’,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한반도의 입장은 간단하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한반도의 특이한 존재들”

 

한국과 북한이다. 정말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야 이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타인의 시선, 그러니까 다른 국가의 시선으로 보자면 상당히 특이한 국가가 한국이다.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국방력의 육성을 보면 특이하다 못해, 경이롭다는 표현까지 가능하다. 더 놀라운 건 진보세력이 ‘사대 외교’, ‘굴종 외교’라 말하는 와중에도 국방력 건설, 그리고 미사일이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있어서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으르렁거리고 미사일을 움켜쥐었던 게 한국이다.

 

북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과 북한은 자신들의 안위가 걸린 문제란 인식 때문인지, 이 험난한 4강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했는지, 미사일 개발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놀라운 건 그 누구도 이들 두 나라가 미사일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런 기술 토대나, 장비, 인력도 없는데도 알아서 미사일을 개발해 내고, 심지어 수출까지 한 게 북한이었다. 한국? 한국 역시 미사일 개발을 위해 미국과 대척점에 서서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 와중에 타협을 본 게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다.

 

(흔히 한국과 미국이 상당히 가까운 혈맹이며, 미국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는 나라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미국은 한국을 상당히 껄끄러워하고 불편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 입장에선 정말 골치 아프고 만만치 않은 특이한 나라였다. 대놓고 한국이 미국에 이빨을 들이민 적이 꽤 있었는데, 미사일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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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이 없었던 시절

 

1960년대,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존재는 주한미군이었다. 1958년 7월 당시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팬토믹 사단으로 개편하면서 어네스트 존을 정식으로 편제 하에 넣었고, 그 이듬해 마타도어(Martardor) 크루즈 미사일 1개 중대를 배치한 미국은 적어도 미사일에 있어선 한반도의 절대 강자였다. 이 당시 어네스트 존을 제외한 마타도어(Martardor), 메이스(Mace) 미사일은 북한이 아니라 북한 너머에 있는 소련과 중국을 겨냥한 무기란 건 다들 말은 안 했을 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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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건 어네스트 존이다. 미사일도 아니고, 그냥 좀 큰 로켓인 이 어네스트 존은 어떠한 유도나 조종이 불가능하다(대신 여기에 핵탄두를 달 수 있었다) 북한은 이 어네스트 존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히 있었고, 1969년부터 단계적으로 소련제 프로그(FROG) 3, 5, 7형을 도입하게 된다. 로켓에는 로켓으로 대항한다는 거다.

 

(이 FROG-7을 북한에서는 화성 3호라 부르는데, 지금도 한국에게는 성가신 존재다. 휴전선 인근에서 이걸 발사하면 수도권까지 2분 내로 날아온다. 사정거리 70킬로미터 내외인데, 여기다 핵탄두를 달 수 있다는 게 문제이다)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해 봐야 하는데, 미사일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처음 거론됐을 당시 나온 말들이 사거리 180킬로미터였다. 이때 180킬로미터는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직선거리였다. 즉, 평양을 직접 타격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건 대단한 발전이었다. 이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군의 최장거리 타격 체계는 어네스트 존 정도가 다였다. 이 어네스트 존의 사거리고 70킬로미터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 한미 미사일 양해각서 개정에 따라 여기에 족쇄가 하나 더 붙었다. 사거리 180킬로미터 탄두중량 500킬로그램까지라는 제한선이 그어졌던 순간이다.(이 부분은 차차 설명하겠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탄두중량 500킬로그램이란 대목이다. 요즘 등장한 어지간한 전폭기의 무장 능력은 4~5톤은 거뜬히 된다. 자, 그런데 1톤짜리도 안 되는 탄두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500킬로그램은 잘해봐야 공군 활주로를 타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면 된다. 탄두 중량이 1톤이 넘어간다면, 적 중심부의 벙커들을 타격할 정도는 된다.

 

그런데 이 1톤짜리 폭탄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리 많지 않다. 사거리 2천 킬로 이하에 탄두 중량 1톤 이하. 이 정도의 중장거리 미사일의 최대 효과는 기껏해야 이란-이라크 전쟁 후반기에 있었던 ‘도시전투’. 서로의 도시에 되고 스커드 미사일 변종들을 가지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양국의 수도 국민들은 패닉 상태에 몰려 도시를 떠나려 했었고, 도시는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엄청난 공포병기로서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그때 실제로 이들 탄도탄에 의한 피해는 여타의 다른 공격 체제에 비해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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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병기로서는 탁월할지 몰라도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사일이란 무기의 효용성이 낮은 것 같은데, 탄두 중량 1톤이 재래식 탄두가 아닌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사일과 찰떡궁합인 탄두. 바로 핵이다. 핵이 가지고 있는 약점, 즉 투발수단의 불안정성과 탄도탄이 가지고 있는 약점 ‘한방이 부족한 점’이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핵을 전투기나 폭격기에 달아서 투하한다는 것처럼 생존성이 떨어지는 짓은 없다. 이걸 일거에 해결한 게 미사일이다. 단, 미사일은 핵탄두를 싣기 위해선 최소한 1톤 이상의 탄두를 날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핵탄두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충 감이 왔을 거다. 미사일, 그것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겠다는 건 ‘핵’을 개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거다. 핵이 없는 탄도 미사일은 ‘앙꼬 없는 찐빵’인 거다.

 

그렇다. 한국은 핵을 준비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969년 8월 한미 정상회담은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은 대단했었고,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숫자만큼 미군은 피를 덜 흘려도 됐다. 한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례로 한국이 이처럼 ‘큰소리’를 쳤던 적이 있었을까. 

 

물론,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베트남 철군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왔고, 심지어 주한미군을 감축한다는 이야기도 떠돌던 그때. 박정희는 닉슨에게 물었다.

 

“주한미군 철수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 말 사실이야?”

 

“에이, 너희들이 우리한테 해 준 게 있는데... 아냐, 그거 헛소문이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주변에서 계속 이런 소리 들리니까 나도 슬슬 불안해지고, 네가 이 자리에서 약속해 주면 나도 확 믿음이 갈 텐데...”

 

“약속한다니까 그러네! 나 못 믿어? 주한미군 절대 철군 안 해!”

 

“역시! 미국 남자! 아주 그냥 패기가 철철 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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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정상회담이 끝나고 6개월 뒤인 1970년 2월 18일 닉슨은 한국 정부의 뒤통수를(?) 때렸다.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우방국이 핵 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책임을 져야 한다.”

 

박정희 정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주한미군이 철군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상황을 준비해야 했다. 충분히 그런 시절이었고 우려는 현실이 됐다. 1970년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

 

는 정식 통고를 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때부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970년 8월 대통령령 제5267호로 국방과학 연구소 창설. 이 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밀기관이 설립된다. 그리고 이듬해에 주한미군 제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수하게 된다.

 

같은 해 12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에 남을 지시 하나를 내린다.

 

“유도탄을 개발해라.”

 

우리가 지금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등장 한 거다. 아무 생각이 없는 이들이라도, 덜렁 미사일 하나를 개발한다고 자주국방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거다. 탄도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건 어딘가에 그 미사일에 달 ‘무언가’를 같이 개발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을 거다.

 

자, 문제는 아무런 기술이나 인력의 축적이 없었다는 거다. 이 부분에서 대단한 게 한국인들 아니, 더 나아가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절박감과 손재주, 창의성이다. 미사일 개발은 어쩌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인 증거일 수도 있다.

 

(놀라운 게 남북한 공히 미사일 개발에 있어서는 특유의 민족성을 보여줬다는 거다. ‘빨리빨리’, ‘손재주’, ‘절박함’, ‘맨땅에 헤딩’ 등등을 묶어 놓으면 어느새 뚝딱 미사일이 나온다는 거다)

 

한국은 어딘가에서 미사일을 들여올 수 없다는 걸 알고, 다방면으로 기술을 타전하다가 나온 게 당시 우리나라에 있던 지대공 미사일 나이키-허큘리즈를 지대지 미사일로 변환하자는 거였다.

 

원래 나이키 미사일은 지대공과 지대지 겸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들어졌다. 아울러 핵탄두를 장착하고 지대공 요격(대륙간탄도탄을 핵탄두 장착 나이키로 요격하겠다는)을 생각했던 미사일이다.

 

한국 입장에선 최고의 선택이었다. 지대공 미사일을 지대지 미사일로 바꾸고, 덤으로 핵탄두까지 장착할 수 있다니, 당시 한국 입장에선 복음이었다.

 

추신: 다시 한 번,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해제를 환영하며, 시대별로 계속 썰을 풀어나가 보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