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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는 졸라 골 아프다. 

 

사료도 없고, 연구자도 없다. 그나마 있는 연구자들은 종이 쪼가리를 이어 붙여 그럴싸한 책으로 만들어야 하는 난이도 별 5개짜리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뿐인가? 연구 좀 하려고 하면, 뭐든지 ‘내 꺼는 당연히 내 꺼! 남의 꺼도 사실은 내 꺼!’라고 주장하는 왕 서방의 갑질에 발암약을 탈탈 털어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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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는 동북아시아의 5개국, 즉 한국·북한·중국·일본·러시아가 모두 다 제각각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발해의 영토는 현재 사분오열되어 있고, 발해의 유민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발해인들이 스스로 남겼던 기록은 어느 집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되어 증발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떠한 이론이 옳다고 주장해도, 국제 역사학계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그 이론은 트럼프의 헛소리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써 본다. 동북아시아의 5개국이 바라보는 발해사, 찍먹해 본다. (그렇다. 난 찍먹파다)

 

 

발해사를 골칫덩어리로 만든 두 가지 문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에서는 발해 유적을 고증하며 연구를 시작했고, 일본에서도 발해를 연구한 텍스트들이 등장했으며, 조선에서는 유득공을 필두로 본격적인 발해사 연구가 시작됐다. 

 

하지만, 젠장, 일제강점기라는 너굴맨이 조선 학자들의 발해사 연구를 끊어 버렸고, 우리나라의 많은 학문이 그렇듯 발해사도 좋든 싫든 일제강점기의 유산을 이어받은 면이 있고, 비판하면서 발전해왔다.

 

수백 년의 논의 끝에, 우리는 발해에 대해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을 규합해 발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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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표준영정. 대조영의 후손인 태씨 집성촌의 80여명 후손 남성들의 DNA를 추출하여 공통적인 특징을 모아서 그린 그림이다.

 

교과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발해의 민족 구성이 대체로 고구려 유민 + 말갈인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차이가 난다.

 

1. 발해의 지배 계층은 고구려계였으며,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었다는 썰 (한국+일본)

2. 발해의 지배 계층은 고구려계였으며, 피지배층은 말갈인뿐 아니라 고구려인도 많이 있었다는 썰 (한국+북한)

3. 말갈인이 다 무어냐, 고구려인이 다 해 먹었다는 썰 (북한)

4. 고구려는 엿이나 바꿔 먹고 사실상 말갈인이 다 해 먹었다는 썰 (중국)

5. 고구려, 말갈 다 있었으나 우리는 말갈에 집중하련다. 근데 어우... 유적 또 나왔네. 삽질이나 해야지~ (러시아)

 

역사는 지배 계급만의 것이 아니다. 당대 사람들이 어떠한 역사적 인식을 가졌는지가 무척 중요하다. 발해의 지배자들이 스스로 고려의 후예임을 천명한 것이 그래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말갈인들의 입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애시당초, 말갈인 안에도 무수히 많은 가지치기가 있었을 텐데, 이들을 그냥 퉁쳐서 말갈인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어떤 말갈인들이, 

 

‘우리는 저들과는 다른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지녔으며, 우리의 역사도 저들과는 분리돼.’

 

라는 생각을 굳건히 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말하지만  러시아의 경우, 발해사에 대해 일부 학자들의 관심만 있을 뿐이고, 그 관심도 발해의 말갈인들이 어떤 말갈인이었냐 정도로 자세히 집중하진 않는다. 중앙아시아 민족 역사의 일부분으로 뭉뚱그리는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발해를 구성했던 그 말갈인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다) 

 

아주 거친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일제강점기의 한반도사는 한국사가 아니라 오로지 일본사다”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일본 학자가 등장했다고 쳐 보자. 그 즉시 유니클로가 세 번은 망하고도 남을 일본 불매 운동이 펼쳐질 것이다. 즉, 실제 역사가 위의 1번 학설 또는 2번 학설이라고 하더라도, 발해사는 고구려를 계승한 역사일 뿐 아니라, 동시에 말갈인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해 버렸다는 거다. 과거 발해의 구성원으로서 존재 인정은 하나 현재 발해에 관한 역사적 연구, 토론에 그들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만약 말갈인이라는 집단이 현재까지 존속하여, “발해사는 그 어떤 나라의 역사보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가깝다!”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리 고구려사가 명백한 한국사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정면 반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갈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중화’ 속으로. ‘다민족 통일국가’를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반달리즘을 행하는 중국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결말인 것이다. 이 말갈인에 대한 규정문제가 첫 번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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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의 후예인 우데게인. / 출처-<한겨레> 

 

두 번째 문제는, 사료의 문제다. 

 

『발해사 자료집』에 따르면, 한국·중국·일본의 정사(正史)에서 발해와 관련된 기록은 중국 > 일본 > 한국 순이다. 고고학적 발굴 비율을 따지면, 중국 > 러시아 > 북한 순이다. 부동산도 알 박기 하면 답 없듯이, 역사도 알 박기에는 답이 없다. 속지주의의 강력함은 당최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다. 

 

저쪽에서 사료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가지고 지지고 볶은 뒤에 널리 퍼뜨려서 교육 과정에 편입해 버린 이후에나, 우리는 간신히 그 소식을 듣고 제한적인 자료만을 분석하여 대응을 시작한다. 노답 그 자체다.

 

그렇다면, 역사로 슈퍼 갑질을 하고 있는 왕 서방들의 입장은 어떨까?

 

 

발해사에 대한 국가별 입장

 

1. 중국의 입장 

 

한 줄 요약 : “응 안 들려~ 말갈인들은 다 중국인이라해~ 발해는 우리 꺼다해~”

 

익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해놓았다. 그런데 그 시도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해 80년대에 거진 완성을 했고, 그 이후로는 더 심하면 심했지, 쇠퇴한 적이 없다.

 

그래서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식으로 발해사를 기술한다.

 

“수레도 말도 원래 한 가족”

 

“수·당 시기 우리나라(중국) 동북의 송화강, 흑룡강 유역에 말갈족이 살고 있었다. 7세기 말, 말갈족의 한 갈래인 속말말갈이 말갈을 통일하고 정권을 세웠다. 후에 당 현종이 그들을 발해군왕으로 봉했다. 이때부터 속말말갈은 국호를 발해로 했다. 훗날엔 개쩔어서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수레도 말도 원래 한 가족”이라는 단원명에서 보듯, 중국사에서 당나라는(사실 한나라부터) 중화의 완성, 즉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완성 시기였다. 그때 당나라 땅이었고 당나라 사람이었으면, 지금도 중국 땅이고 중국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교과서 어디에도 ‘대조영’이나 ‘고구려’를 찾아볼 수 없고, 발해와 당이 한때 심각한 갈등을 빚어 투닥거렸다는 내용도 없다. 그냥 말갈인들끼리 잘 먹고 잘살다가 어느 날 뚝딱 ‘정권’, 즉 자신들만의 정치집단을 세웠는데, 당나라가 “그래 어디 함 잘 해봐”라면서 작위를 줬고 그 결과, 발해의 모든 것이 당나라의 양식으로 채워졌으며, 중화롭게 되었다는 얘기다. 애시당초 원래 국호도 ‘말갈’이었는데, 당나라의 승인을 받은 이후에 ‘발해’로 고쳤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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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선왕(대인수) 시절 발해의 전성기 영토.

 

그러니까 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렇다.

 

“말갈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래서 말갈사는 중국사다. 발해는 말갈인들의 역사이므로, 발해사는 당연히 중국사다”

 

이러한 논리를 완성한 후, 한국 학자들의 발해 유적 연구를 대놓고 거부하며 발해사 독점 행위를 수십 년 동안 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 심지어 어떤 한국의 연구자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인 연구자로 위장하고 들어가야만 했다는 웃픈 썰도 있다. 

 

게다가, 중국의 연구자가 대놓고 이런 글을 썼다.

 

“발해사 연구는 그 특수성 때문에 학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가지고 있으며 중화민족과 중국의 국가 이익에 관련되어 있다.”

 

역사 연구가 국가 이익과 연결되는 것이 빈번한 일이라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어필할 수 있는 나라는 몇 없다. 특히, 요즘같이 합리성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에선, ‘뽕 맞은 사람들’이라는 비아냥을 듣기 딱 좋다.

 

그렇지만, 가장 무서운 사람들도 바로 뽕 맞은 사람들이다. 우리 주변에도 있다. 주체사상이라는 뽕을 사발로 말아 잡수신 북한의 발해사를 보자.

 

 

2. 북한의 입장 

 

한 줄 요약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대적 노예 정신을 버리지 못한 신라를 민족의 원쑤 국가로 규탄하시면서, 발해야말로 고구려의 주체적 정신을 계승한 한반도의 정통 국가라 하시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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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맺어진 혈맹이라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과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합동 발굴 조사도 했는데, 이 보고서를 가지고 각자 다른 해석을 하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80년대부턴 북한 학자들도 중국의 북한 유적을 직접 조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혈맹 수듄,,

 

그렇다면, 북한 역사 교과서의 발해 건국 기록은 어떨까? 『조선력사 3』을 보자.

 

“696년 영주라는 지방에는 지난날의 고구려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었다. 이때 영주지방에서는 당나라의 통치를 반대하는 다른 종족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고구려인민들은 696년에 지난날 고구려장수였던 대조영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698년 천문령에서 판가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폭동군의 공격이 얼마나 드세였던지 적의 우두머리 리해고는 패잔병들을 수습하지도 못한채 황급히 뺑소니치고 말았다. 대조영은 각지에서 벌어지던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하나로 련합하여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그리고 698년에 <발해> 라는 나라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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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조영>에서 이해고 역을 맡은 배우 정보석.

 

‘발해사는 말갈사’라는 중국의 입장과는 완벽한 대척점이다. 

 

북한은 말갈인들을 역사에서 싹 지워 버린 채, 오롯이 고구려를 계승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발해인들의 대당 투쟁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면서 ‘리해고를 뺑소니치게 만들었음’을 찬양한다.

 

북한은, 한국의 일부 사람들처럼, 신라를 중국에 머리를 조아려 민족을 배신한 천하의 원쑤로 규정하고, 고구려 – 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중심 사관을 만들었다. 따라서 한반도 최초의 통일은 신라가 아니라 고려가 된다. 

 

그리하여 발해의 모든 것들은 뽐뿌질의 대상이 되는데, 이를테면 발해의 양식은 당나라와 완전히 다른 것들이며, 당나라에게 문화적 영향을 받은 것이 있더라도 개무시해도 되는 수준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이 모든 논리적 모순의 원인은 말갈이다. 

 

첫 번째는, 발해사에서 차지하는 말갈인의 비중을 높일 경우, 중국의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것이 어렵다. 

 

두 번째는, 말갈인을 피지배 계급으로 인정할 경우,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에 대항해 승리하는 것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계급 투쟁적 사관 때문에, 발해의 멸망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 진보라는 결론으로 귀결한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골 아프니까, 그냥 날려버린 것이다. 역시 답은 Alt + F4다.

 

그나마도 최근엔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함경도 지방을 비롯, 일부 발해 유적이 북한에도 있지만, 아무래도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하면 양과 질 모두에서 떨어진다. 최근에는 발굴을 할 능력이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곧 죽어도 한국 연구자들에게는 못 맡기겠다니까 뭐,,, 통일될 때까지 제발 무사히 보존되기를 천지신명께 바라는 수밖에.

 

 

3. 일본의 입장 

 

한 줄 요약 : “아노~ 그때 우리 일본이 국제적으로도 이렇게나 잘 나갔다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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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연구자가 본 발해와 일본의 교역로 / 출처-<오마이뉴스>

 

한국과 일본은 고대사에서 근현대사까지, 적잖은 부분에서 충돌해왔다. 그렇지만, 발해사 부분만큼은 대체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함께해 오고 있다. 발해사를 조망할 수 있는 알짜배기 기록들이 일본에 상당히 많이 남아있고, 파편적인 유물도 산재해 있다.

 

일본인들이 발해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건 역시 일본제국 시절이다. 

 

만주국을 꿀꺽 삼킨 뒤로 ‘대동아 공영권’의 완성을 위해 각 민족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 과정에서 발해사가 주목되었는데, 그들 입장에선 어차피 한국사나 만주사는 일본사를 거들뿐 정도였으니, 건국 주체가 누구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관심 가졌던 부분은 다른 영역이었다. 

 

일본의 교과서 기술을 통해 그들이 바라보는 발해사를 살펴보자.

 

『일본사』 중 “견당사” 파트

 

“한편 북방의 중국 동북부 등에 사는 말갈족과 구고구려인을 중심으로 건국된 발해와 일본 사이에서는 친밀한 사절의 왕래가 이루어졌다. 발해는 당, 신라와의 대항관계 때문에 727년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여 국교를 구하고, 일본도 신라와 대항관계 때문에 발해와 우호적으로 통교했다. 8세기 후반 이후 발해와의 관계는 교역이 중심이었지만, 발해의 사자와 일본 문인 사이에는 한시문을 통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도 주목된다.”

 

일본 측 사료에는 발해와의 교역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물론 일본 사료 특유의 국뽕이 수십 사발은 들어가, ‘발해의 사신이 조공 왔는데 공손한 태도가 쩔더라?’라는 느낌의 표현들 일색이다. 그래도 어쨌든 발해의 왕들이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일본도 그들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측 사료 덕분에 남은 귀중한 사실이다.

 

한편, 건국 주체나 민족 구성에 대해선 ‘말갈족과 구고구려인을 중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대충 퉁쳤다. 고구려 유민 지배층 + 말갈 피지배층이라는 학설을 던진 것은 일본이었지만, 일본 입장에선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서, 국제 사학계의 첨예한 논쟁이 될 수 있는 표현을 버리고 퉁쳤다.

 

대신, 교과서 기술에서 보듯, 그들은 발해와의 교역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1700년대부터, 일본에서 발해를 조망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과거 일본이 얼마나 국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까?’ 즉, 한국사나 중국사의 일부로 발해사를 편성시키는 것보다, 제3의 독립적 세력으로 보는 편이 고대 일본의 세계사적 위상을 더 드높이는 해석일 것이다.

 

 

4. 러시아의 입장 

 

한 줄 요약 : “러시아사인 부분도 있는 것 같은데... 큰 관심은 없다. 그나저나 어우~ 유적 또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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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공동 발굴 사업으로 발굴한 러시아 크라스키노 성터의 발해 온돌 유적. 온돌은 누가 뭐래도 K-난방시설이다.

/출처-<중앙일보>

 

중국, 일본, 한국, 북한이 문헌 연구에 기반하고 있다면, 러시아의 발해 연구는 거의 고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한자 문화권이 아니니까 당연하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많은 부분들, 이를테면 출토된 소뼈를 분석해서 그들도 소를 졸라 많이 키웠다는 사실 등을 알아냈다.

 

러시아의 발해사 연구는 그들이 이쪽 지역을 꿀꺽했던 19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본격적인 연구는 구쏘련 시절인 20세기 중반부터였다. 중국과 쏘련, 이 자존심 강한 두 친구의 대결은 발해사에서도 펼쳐졌다. 중국 중심의 발해사 해석을 두고, 소련의 학자들은 ‘중국 중심주의’, ‘아시아 중심주의’라며 비판했었다.

 

그렇지만, 발해사를 한국사로 보지 않는 것은 러시아의 학계도 동일하다. 사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의 중심 역사가 아닌 발해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이 발해사 관련 연구를 하는데, 그들은 발해사를 제3의 세력으로 보는 쪽이며, ‘연해주의 역사’라는 인식을 기본으로 둔다. 또한, 유목민족인 말갈인들을 주목하면서, 중앙아시아 민족의 역사라는 측면도 강조한다. 

 

중심 역사는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러시아에 속해있는 여러 민족들의 자잘한 역사 중 하나니깐,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러시아사라는 얘기다. 다만, 중국처럼 국가적으로 발해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덤벼들진 않는다. 러시아 학자 중엔 ‘발해사는 러시아사다’라며 강경하게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러시아 국가전체적으로는 큰 관심을 갖진 않는다. 

 

그래도 러시아 학자들은 중국보다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성을 더욱 인정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러시아의 합동발굴조사도 여러 차례 있었고, 주목할만한 성과도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에서도 발해사는 듣보 중의 듣보인 영역이라, 연구자들이 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다.

 

 

5. 한국의 대응 

 

한 줄 요약 : “동북아역사재단과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역사학”

 

정리하면, 이렇다.

 

발해사는 한국사다! : 한국, 북한

발해사는 중국사다! : 중국

발해사는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다! : 일본, 러시아

 

이렇게 보면 대략 밸런스가 잡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북한은 국제 학계에서 논외니 사실상 한국 혼자 발해사는 한국사라고 주장하는 중인데, 연구자 수에서도 논문 수에서도 턱없이 밀린다. 서두에서 말했듯, 발해의 유적을 단 하나도 보유하지 못한 한국이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것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그래도 워낙 인접국들의 역사 도발이 많았던지라, 한국에서는 정부 주도로 이런 문제를 연구하고 대응하는 재단을 만들었다. 바로 동북아역사재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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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동북아역사재단 블로그>

 

동북아역사재단은 그 설립 기획을 볼 때 국뽕이나 민족주의적인 재단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열린 자세로 학문을 대하고 있다. 특히, 발해사에 관해선 러시아나 일본의 학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표방하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이란, 국경 그거 때문에 연구가 산으로 가니까 벗어 던지자, 라는 얘기다. 임진왜란은 한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본사이면서, 또 중국사이기도 하다. 그동안은 한국의 사료들만 살펴봤지만, 지난 십여 년 간 각국의 텍스트들이 발굴되고 공유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많다. 

 

그처럼, 발해사도 한국사라고 줄창 주장해봐야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발해 그 자체만을 조망하는 목적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하자는 이야기다. 발해사를 열심히 파면서 연구를 진행해 나가면, 그들에게 고구려 계승 의식이 더 강했는지, 아니면 말갈인들의 주체적 인식이 더 강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와의 공동조사를 진행했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는 고구려에서 자연스럽게 발해로 이행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러시아가 발해사를 제3의 역사로 보면서도, 고구려와의 관계성을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근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이라는 게 유럽에서 비유럽과 자신들을 구별 짓기를 위해 도입된 개념이기도 하듯, 동일본이니, 서조선이니 하는 건 동북아시아에선 쉽지 않다. 게다가 이제는 발해와 고구려의 관계성을 강화하는 것도 잘 안 먹힌다. 왜냐면, 왕 서방이 고구려까지 자기들 지방 정권이라며 ‘중화 속으로’ 삼키려고 하니까.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유럽에서 출발한 개념으로 유럽 내부의 복잡한 관계를 떠나서 역사를 연구해보자! 라는 의미로 출발했지만,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경계를 만들기 위한 의도도 숨어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체성을 허물자면서 사실은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의도도 있는 것. 허나 동북아시아는 워낙 각국의 정체성이 뚜렷해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의 논리가 먹혀들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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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 꺼거든~

 

그래도 별수 없다. 옆 동네가 뽕을 한 사발 들이켜도, 우리는 제정신을 차리고 연구다운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법이다. 러시아와 일본, 나아가서는 북한과 공동 연구를 지속해서 진행하는 것이 한국에서 발해사를 챙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또한, 발해사를 제3의 역사로 보는 것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발해가 한국사인가, 혹은 제3의 역사인가가 아니라, 발해가 중국사로 땅땅해버린 중국의 행보를 저지하는 것이다. 국제 학계가 연대하여 ‘발해사 그 자체’를 복원해나갈수록, 중국의 행보는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발해의 아이덴티티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기록이, 다름 아닌 중국 측의 사서에 있다. 초강대국 당나라 현종에게 개빡친 발해 2대왕 무왕(대문예)가 보낸 국서다.

 

“대국은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디서 사쿠라여?”

 

이것이 발해사에 대한 한 줄 요약이며, 지금에도 유효한 말이다.

 

 

 

참고문헌

 

(1) 『발해사 자료집』

(2) 구난희, 「텍스트 구조와 수사 표현으로 본 한중일 교과서의 발해사 서술」, 사회과교육연구

(3) 임상선, 북한 『조선력사』 교과서의 발해사 내용

(4) 김정희, 「발해사의 귀속 문제와 당대의 기미제도」, 북방사논총 10호

(5) 송기호, 「발해사, 남북한중일러의 자국중심 해석」, 역사비평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번엔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이 나왔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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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