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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유쾌한 웃음이 뒤엉킨 ‘웃픈’ 이야기의 강렬한 기억과 함께 한 그런 날이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를 빙 둘러싼, 산 중턱에 촘촘히 들어선 이른바 ‘슬럼가(빈민 지역)’ 한 귀퉁이에서 있었던 아주머니들의 수다였다. 족히 10년도 훌쩍 넘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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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바리오 빈민가

 

레티시아> “몇 년 전만 해도 여기까지 택시는 오지도 않았어. 저 아래에서 걸어와야 했는데, 택시가 여기까지는 위험하다고 들어오려고 하지를 않으니 별수 있나. 승차 거부를 한다니까. 그에 비하면 지금은 감지덕지야. 그래도 이제 버스도 다니니까.”

 

다야미> “맞아 맞아. 한번은 버스에서 내려 걸어 올라오는데 갑자기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 게 아니겠어! 그냥 바닥으로 몸을 던져서 미친 듯이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잖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구~~(가슴을 쓸어내리며). 차 밑에서 바들바들 떨었어. 오줌도 지렸다니까~ 까르륵(웃음).”

 

유독 지역 활동을 열심히 하는 넬리 아주머니도 있었다. 집 앞에서 놀던 그녀의 둘째 아들이 갱들 총격전에 날아든 유탄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기에, 누구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 수다가 있었던 때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1999년 집권하고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빈민가 사회통합 프로그램 “주민자치위원회” 조직화가 시작한 직후였으니, 대략 2007년 정도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연히도 2006년은 마이크 데이비스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기조 하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전 세계적 슬럼 현상을 다룬 “Planet of slums”를 세상에 내놓았고, 국내에서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2008, 돌베개)로 번역하여 소개한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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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라틴아메리카를 뒤덮다 

 

마치 인류의 새로운 도약을 앞둔 것 같았던 21세기 시작의 실상은 번영이 아닌 지구촌 곳곳에 들어선 대규모 슬럼가의 처리 문제로 골치가 아팠다. 빈곤과 범죄의 ‘환상적’ 이중주가 만들어 낸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 즐비한 그 슬럼가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녀들의 이야기가 웃프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총알이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살벌했던 슬럼가의 과거가 이제 지역 아주머니들의 유쾌한 무용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변화는 그렇게 빈민가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내내 세계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를 팔아치우는 동안, 베네수엘라는 소위 ‘번영’의 시대였다며 지금의 어려워진 베네수엘라 경제에 빗대어 뒤틀어진 ‘번영’의 기억을 소환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시대 베네수엘라에서는 브라질 다음으로 가장 거대한 슬럼가가 만들어졌고, 그곳은 출생증명서도 없고 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 지내는 일이 태반이었다.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접근이 힘들었던 산 중턱 슬럼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기 시작한 그 시기를 누군가는 ‘번영의 시대’로 부르고 싶어 한다. 

 

슬럼 현상이 가난과 범죄의 악순환이 만든 결과라면, 이를 잉태한 것은 사회적 배제다. 불평등을 수반한 차별은 자양분이 되고, 우후죽순으로 성장한 대규모의 슬럼은 그들만의 세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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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카스 바리오(슬럼가) 주민들이 비영리 단체가 진행하는 아이들의 ‘영양 결핍 테스트’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의 많은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죽는다. 네 아이의 엄마인 Idalia Gutierrez는 2016년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일주일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마약이나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큰 만큼 스무 살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청년이 되기도 전에 사망할 확률이 높다. 넬리 아주머니의 둘째 아들처럼 갱들의 총격전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범죄와 빈곤, 빈곤과 범죄의 앙상블이 만들어 내는 슬럼가의 자아 증식 능력은 공격적이고 대담하며 거침이 없다. 심지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국가마다 각기 다른 ‘세례명’으로 이 빈민가를 칭하고 있으니 그 독보적 존재감은 인정할만하다.

 

브라질은 파벨라, 칠레는 까얌파스, 멕시코는 콜로니아 프롤레타리아, 페루는 바리아다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는 바리오라고 부른다. 

 

 

지배층의 논리가 된 ‘펠레 스토리’

 

다음은 슬럼가의 평범한 삶을 사실적으로 다룬 편지형식의 에세이이다.

 

내 이름은 엘프야. 태어나보니 주위가 온통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어. 하루 생계 해결이 가장 큰 일이었던 엄마는 이른 새벽 어디론가 나가셨고, 내가 잠들고 나서야 돌아오곤 했지. 가끔 집에 오는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어. 항상 집안 살림을 던지고는 했는데 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지. 

 

내 친구들 대부분의 집도 비슷한 상황이었어. 그래서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구나 생각했지. 우리는 매일 낮에 함께 몰려다니며 놀고는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갑자기 자기보다 몇 살 위인 동네의 형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어. 주변에서는 그 형들이 마약을 팔고 다닌다고 수군거렸어.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내 친구는 더는 보이지 않았어. 

 

그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아무도 몰라. 이 동네를 떠났다는 말도 있고, 동네 형들에게 밉게 보여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몰라. 그 누구도 더는 궁금해하지 않았거든.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금방 잊혔으니까.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말야.

 

신(神)의 ‘의지’가 아닌 이른바 인간의 보편 이성은 인간 사회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가져왔고, 신분 세습이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으며 이는 족히 1세기도 넘은 일이다. 그렇게 인간은 동등한 기회와 자유를 누리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더는 태어나면서 세습되는 신분이 없으니 모두가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들이 슬럼가에서 태어나든 스카이캐슬에서 성장하든 중요한 건 개인의 노력과 자유 의지라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기회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헛된’ 믿음을 갖게 한 것이다.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몇 안 되는 소수는 찬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성공 신화는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된다. 그들의 ‘노력’과 ‘의지’는 대다수가 쫓아야 하는 삶의 모델이 되며, 개인의 불행과 실패는 그저 개인의 의지와 노력의 부재일 뿐이다. 그렇게 개인의 모든 불행은 오롯이 개인만의 책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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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펠레는 파벨라(브라질 슬럼가를 부르는 표현) 출신으로, 그의 성공담은 심지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가 브라질 빈민가 출신이라는 점은 그의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나 브라질 빈민가의 수천, 수백만의 청년들이 모두 펠레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 사례는 마치 “모두가 펠레가 될 수 있다”가 되었고, 펠레가 될 수 없는 99명의 평범한 우리는 지배층의 논리에 따라,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자’가 되었다. 

 

엘프는 세기의 축구선수 펠레가 될 가능성보다는 어느 순간 마약을 팔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유년 시절 친구와 비슷한 운명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엘프는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환경인 슬럼가의 한 가정에서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엄마와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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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마약 운반책을 하면 용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을 항상 받으며, 지금으로서는 학교 가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엘프의 개인적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는 그가 처한 객관적인 상황은 이러했다.  

 

엘프는 이 같은 사회경제적 환경과 조건을 ‘신분’ 대신 물려받았을 뿐이다. 엘프의 부모도 엘프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교육을 받기에는 너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기회라는 것이 쉽게 주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슬럼가 대다수 주민의 삶은 이렇게 확대 재생산된다. 

 

 

신도 버린 도시, 영화 “시티 오브 갓” 

 

쌈바와 카니발 축제의 화려하고 경쾌함을 느끼기엔 브라질의 거대 도시 리우데자네이루 만한 곳이 있을까.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어김없이 도시 외곽을 둘러싼 파벨라(슬럼가)의 모습 또한 압도적이다. 

 

2002년 이곳 파벨라(브라질 슬럼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제목은  신의 도시(Cidade de Deus). ‘신이 버린 도시’라는 제목이 어울릴 것 같은 이 영화는 브라질 슬럼가를 다룬다. 영화 촬영을 위해 그곳 갱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실제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물들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짐작하겠지만, 맞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목으론 <시티 오브 갓>. 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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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은 1960년대 브라질 정부가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도시개발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거주지역이다. 하지만 실상은 도시가 감당하지 못하는 빈민 계층의 잉여 인간을 한곳으로 모아놓는 정책이었다. 

 

<시티 오브 갓>은 실화에 바탕을 둔 원작 동명 저서(1997) “신의도시”에 기반하여 적나라한 슬럼가의 현실을 드러냈고, 2002년 개봉되자 브라질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리얼한 슬럼가의 이야기다. 등장인물 중 그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행운아’는 부스카페 뿐이다. 신의 도시를 주름잡는 갱 두목 다징유를 ‘괴물’로 만든 건 신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다징유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신의 도시라는 공간이 던지는 질문이 가볍지 않다. 그리고 다징유를 잇는 꼬맹이들의 미래까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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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티 오브 갓> 中 어린 시절의 ‘다징유’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 다른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브라질이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는 후기를 남겼다. ‘설마 저런 세상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브라질 슬럼가 파벨라의 잔인한 현실은 영화의 ‘탁월한’ 연출력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물론 인간이 주변 환경의 일방적인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사회환경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가 맺는 사회적 관계는 우리를 정의하고 때로는 규정하며, 이는 엘프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슬럼가를 벗어나기 어려운 조건일 수도 있다. 개인의 노력 혹은 의지가 부족해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한편, 신의 도시(시티 오브 갓)처럼 남미 전역에 퍼져있는 슬럼가는 그 잔인한 현실과 끝을 알 수 없는 가난과 폭력의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의 기회와 삶을 희망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기회이지 펠레의 개인 성공담과 같은 극적 스토리가 아니지만 말이다.  

 

이들의 삶을 바꾸는 그 기회라는 것, 대체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이 영화의 궁극적인 질문이 아닐까 싶다.   

   

정이나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중남미 사회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