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최초로 전차를 운용했던 건 북한이다. 북한은 전쟁 발발 3년 전부터 전차를 운용하기 위해 준비했다. 한반도에 주둔중인 소련군 제10전차사단에서 3개월 과정의 전차교육을 받은 인원을 주축으로 1947년 12월 제208전차훈련연대를 창설했다. 그 뒤 전국 고등학교에서 학생 400명을 선발, 전차병 교육을 시켰다. 

 

1948년 소련군 제10전차사단이 철수하면서 전차와 자주포, 싸이드카, 차량 등 장비를 인계받는다. 원래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500대의 전차를 공급 받기로 돼 있었다. 이걸 가지고 2개 전차사단을 편성하려고 했지만, 개전 초에 500대를 다 편성할 순 없었다.

 

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소련으로부터 청진항을 통해 전차 100대, SU-76 자주포 60문, 트럭 150대를 추가로 지원받고, 6월 초에는 나진에서 T-34를 추가로 더 공급 받는다. 

 

War_Memorial_park.jpg

T-34

 

북한군의 전차운영 방식은 집중적으로 전차를 모아서 전선 하나를 뚫는 방식이 아니라 전선 이곳저곳에 적당히 분산 배치해서 진격하는 보병사단 첨단에서 창끝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1사단에 203 전차연대, 4사단에 107 전차연대, 3사단에 109 전차연대, 105 전차여단은 의정부 축선전선을 돌파하게 했다. 

 

전차 한 대 없었고, 변변한 대전차 화기도 없었던 한국군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은 90여 대의 전차를 포천-의정부-서울 축선으로 밀어붙여서 국군 7사단의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1950년) 6월 26일 저녁 때 탱크가 나타나 서있는데 우리 특공대 중에 5명이 탱크 위로 올라가고 나는 바로 그 밑에서 보고 있었는데, 탱크 뚜껑이 열리더니 바로 닫혀버리고는 탱크 포신을 빙빙 돌리니까 화염병을 탱크 속에 넣을 준비를 하던 탱크 위의 특공병 5명이 모두 떨어져 전사해버렸다. 

- 안교창 상사(당시 수경사 18연대 본부중대)

 

한국군이 전차에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105미리 곡사포를 직사로 겨눠서 탱크를 격파하는 방법, 아니면 박격포탄이나 수류탄을 들고 육탄돌격을 하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박격포탄이라도 준 경우에는 양반이었다. 화염병에 모래를 넣어서 건네는 경우도 있었다. 속절없이 밀리던 와중에 M20 수퍼바주카가 등장했고, 드디어 한반도에 북한 탱크 말고 다른 탱크들이 등장한다. 

 

초반에 채피 경전차를 보냈다가 호되게 당한 미군은 M4 셔먼과 90미리포를 장착한 M26 퍼싱을 한반도에 보낸다. 이게 신호탄이 돼서 미군 사단들은 1950년 8월 이후 사단 당 1개 전차대대, 즉 90대 씩의 전차를 편제한다.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 중에 각 보병사단에 100여 대가 넘는 전차를 운용했던 거다(기갑사단이 아니라 보병사단이 이렇게 전차를 운용했다. 북한군 기준으로는 거의 기갑사단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전력이었다).

 

전차를 어떻게 운용했을까? 간단하다. 미군도 북한군처럼 전차를 운용했다. 집중 운용이 아니라, 분산해서 공격축선의 전면에 내세웠던 거다. 미군 사단장들은 한 공격축선에 1개 전차중대(22대의 전차)를 운용했고, 간혹 2개 전차중대를 운용했다. 그 이상을 운용하기에는 지리적인 여건이 받쳐주지 않았다. 

 

“만약 북한군이 기갑부대를 종심 깊게 돌파하고 전과확대를 할 수 있도록 편성하고 독일의 구데리안 장군 방식으로 대담하게 운용했더라면 UN군이 부산 교두보에서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한반도를 석권했을 것”

 

역사가이자 전차 전문가인 리델 하트의 평가다. 그런데 이게 가능했을까? 라주바예프 보고서 등 소련 자료에는 북한군이 개전 초반 포천 축선에 전차, 자주포, 야포, 견인용 차량을 너무 많이 투입해 교통 체증이 발생해 공격이 지연됐다는 표현이 나와 있다. 북한군의 전차 운용이 미숙했다는 것도 있지만, 도로 사정도 있다. (기갑부대의 공격개시선에서 교통혼잡은 의례 있는 일이다. 낫질작전 당시 아르덴 산림 안에서 서로 도로를 차지하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인 걸 생각해 보라)

 

북한군은 독일군의 그것과 다르게 운용상의 한계, 도로의 미비, 보급의 한계, 제공권 확보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차 대전 초반 화려한 전격전의 포문을 연 낫질작전 당시, 독일군의 대서양으로 향한 진격속도는 1일 평균 39마일(62.76킬로미터)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 점령 때까지의 1일 진격속도는 평균 15마일(24.14킬로미터), 서울 점령 이후 낙동강 전투가 개시되는 1950년 8월 4일의 진격속도는 평균 5~7마일(8~11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독일을 상대해야 했던 프랑스군에는 전차도 있고, 대전차화기도 있었으며, 전투기나 폭격기도 있었다(물론 그걸 운용해야 할 사람이 문제였지만). 그러나 한국군에는 이 모든 게 없었다. 그런데도 서울까지 3일이 걸렸다. 38도선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불과 48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았지만, 운용미숙과 도하장비 미비(당시 한강다리가 끊기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등에 따른 한계였다. 

 

그래도 북한군은 초반 얼마간 전차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문제는 새로 등장한 대전차화기(M20 수퍼바주카)와 제공권 상실에 따른 공중공격(네이팜탄에 많은 전차가 녹았다), 새로 등장한 미군 전차, 그 중에서도 90미리포를 장착한 퍼싱의 등장이었다. 거기에 도로사정이 북한군의 발목을 붙잡았다.

 

전차란 것이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가는 건 아니다. 전투지점 근처까지는 트럭이든, 열차든 실려서 가는 게 일반적이다. 전차는 생각 외로 예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해 엔진이 퍼지거나 궤도가 끊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탱크.jpg

(출처: 국가기록정보원, 이하 동일) 

 

한반도의 도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도로의 대부분은 비포장이었으며, 그 폭도 좁았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몇 킬로미터나 죽 늘어서서 이동하는 전차부대는 공군 조종사들에겐 탐스런 먹잇감이었다. 아니, 공군의 공격이 없더라도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는 전차의 적이었다. 툭하면 엔진이 과열됐고, 궤도가 끊겼다. 

 

북한군이 꾸역꾸역 낙동강 방어선까지 갔을 때 전차전력의 상당수가 녹아내린 후였다. 야지 기동의 후유증으로 고장이 계속 발생했고, 수리부족을 보급 받지 못해 전차운용에 문제가 생겼다. 

 

여기에 미군 전차가 등장한 거다. 이제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전차와 전차의 전투가 벌어진다. 

 

1950년 7월~11월 전차들끼리 전차포를 발사한 총 119건의 전투를 분석해 봤다.

 

한 대와 한 대가 대결한 사례 36건

미군 전차 2대 북한군 전차 2대의 교전 13건

미군 전차 2대와 북한군 전차 1대 사례 10건

북한군 전차 2대와 미군 전차 1대가 대결한 사례 7건

북한군 전차 3대와 미군 전차 2대가 대결한 사례 6건

북한이든 미군이든 어느 한쪽에서 5대 이상의 전차가 참가해서 전차전을 벌인 사례 7건

 

이 모든 것이 나타내는 건 간단하다. 

 

“전차 수십 대가 뭉쳐서 회전을 벌인 만 한 공간이 마땅치 않다.”

 

미군 전차 2개 소대(10대), 북한군 전차 2개 중대(8대) 규모의 전차가 사격전에 가담했던 경우는 단 한차례뿐이었다. 한반도는 굴곡이 많은 지형이라서 많은 전차를 동원한다 치더라도 4대 이상의 전차가 동시에 사격할 수 있는 공간이 흔치 않다. 이런 경우에 후속하던 전차들은 전투에 참가하더라도 전차포 쏠 위치를 찾을 수가 없다. 

 

전차끼리의 교전거리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포탄(초탄) 발사 시 양 전차의 거리는 시계가 유지될 때 평균 840미터, 나쁜 시계에서는 620미터였다. 러시아 평원이나 유럽에서처럼 2킬로미터 밖의 전차를 찾아내서 원거리 포격전을 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나마 평평한 지역이라고 하면 거의 다 논과 밭인데, 논을 통과할 때는 엔진에 무리가 간다. (한국 지형에서 하천 도섭과 논의 존재는 전차 운전병에게 지옥을 안겨줬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미군 기갑장교들이 한국에서의 전차전을 “소대장들의 전투”라고 부르게 된다. 중대단위 이상의 대규모 전차전은 꿈도 못 꿀 상황이니 말이다. 

 

아군탱크진격.jpg

진격하는 아군 탱크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다부동 전투. 대구의 현관이라 할 수 있는 다부동을 뚫기 위해 북한군은 14대의 T-34를 포함해 가지고 있는 자주포와 보병들을 모두 쏟아 부었다. 바로 다부동 기갑전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한반도에서의 기갑전의 주도권은 UN군에게 넘어간다. 

 

이미 낙동강 전선이 그어진 이후에는 방법이 없었다. 북한군은 공세종말점에 가까운 상태였고, 피아간의 병력과 전력차는 2대1이 됐다. 여기에 제공권도 빼앗긴 상태에 장비의 질은 UN군과 한국군이 압도적인 상황이다. 북한군에게 유리한 건 없었다. 

 

초반 3개월 동안 무적의 이미지로 한국군을 괴롭혔던 T-34이지만, 이후에는 초반의 맹위를 떨칠 수 없게 됐다. 1951년 이후 지루한 고지전이 이어지면서 전차의 운용방식도 상당부분 제한 받게 됐고, 단장의 능선 전투 이후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도 사라지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차전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6.25전쟁에서 첫머리로 나오는 게 북한의 탱크라고 교육 받았던 시절이 있다. 탱크가 남침의 증거처럼 말해졌고, 탱크 한 대가 없어서 육탄돌격을 해야 했던 한국군의 사정을 설명하며 북한군에 대한 증오를 교육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이후로 탱크 부대를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하긴 초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 잔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겠지만, 이후에는 우리도 잘 싸웠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