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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커피 중에는 더러 뜨겁기만 하고 맛은 지지리도 없는 것이 있다. 대개 역의 구내식당에서 사람들을 몰살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는 보온병 재질의 플라스틱 컵에 따라 마시는 고약한 혼합물 말이다.

 

그런가 하면, 가정이나 조촐한 간이식당에서 베이컨을 곁들인 달걀 지짐과 함께 대접하는 증기 여과 커피는 아주 맛이 좋고 맛이 좋아서 마치 물처럼 마실 수 있다. 다만, 물처럼 그렇게 마시다 보면 심장 고동의 이상 급속이 유발될 수 있다. 그런 커피 한 잔에는 에스프레소 네 잔보다 많은 카페인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커피 중에는 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 구정물 커피가 있다. 대개는 썩은 보리와 시체의 뼈, 매독 환자를 위한 병원의 쓰레기 장에서 찾아낸 커피 콩 몇 알을 섞어 만든 듯한 이 커피는 개숫물에 담갔다 꺼낸 발 냄새 같은 그 특유의 향으로 금방 식별할 수 있다. 이 구정물 커피는 감옥과 소년원뿐만 아니라, 열차의 침대 차량이나 일급 호텔 등에서도 마실 수 있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 중

 

시큼하고 묽은 미국식 커피(아메리칸 커피)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평이다. 에스프레소나 터키 커피 등이 익숙한 문화권에서 본 미국식 커피에 대한 익살스럽지만 신랄한 표현이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커피나무 열매를 말리거나 물에서 씻어내는 방식 등을 통해 과육을 벗기고 씨만을 말린 것을 '생두'라 부르고, 이를 볶는(가열하는) 것을 ‘로스팅(배전)’이라 한다.

 

같은 원두라면 로스팅을 연하게 (약배전, 낮은 온도, 짧은 시간) 할수록 신맛이 더 많이 나고, 로스팅을 진하게(강배전, 높은 온도, 오랜 시간) 할수록 쓴맛이 많이 난다. 물론 원두의 특성에 따라 신맛과 쓴맛의 차이가 있지만, 신맛의 정도는 로스팅 한 정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몇 년 전부터 (특히 전 세계의 힙스터들에게) 세계적으로 인기인 '스페셜티 원두를 사용한 일본식 드립 커피'를 에코가 마셔 보았다면, 이에 대해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한국인은 정말 커피의 산미를 좋아하지 않는가

 

한국인이 커피의 산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특히 드립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은 산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소규모 카페나 스페셜티 커피는 강배전보다 중배전(시티-풀시티 정도)의 커피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인이 신맛의 커피보다 쓴맛의 커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통계로 입증된다. 한국인의 카페인 섭취 경로는 인스턴트커피 71%, 전문점 등의 침출 커피 17%, 캔커피 등 커피음료 4% 순이다.(2013년 식품안전처 보도자료).

 

그런데 인스턴트커피 중 믹스커피 판매량을 살피면, 강배전으로 볶은 ‘맥심 모카골드’와 ‘맥심 화이트골드’가 87.6%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고, 블랙 스틱커피의 경우 스타벅스 커피보다도 강배전 경향이 강한 ‘카누’가 90%를 점유하고 있다(2020. 11. 7. 신동아).

 

커피전문점의 매출을 살펴보더라도, 산미 있는 커피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스타벅스가 2위(투썸)부터 10위까지 커피전문점의 매출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매출을 내고 있고, 5위 안의 다른 브랜드 중 커피빈, 이디야의 경우 거의 강배전 커피를 제공하며, 투썸플레이스와 할리스 역시 대부분 강배전 커피가 중심이다. 소규모 카페들이나 로스팅 원두 판매점의 매출 정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한국인 전체로 볼 때 대부분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신맛이 적고 쓴맛과 구수한 맛이 나는 강배전의 커피’라는 점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해보자.

 

1. 신맛은 산과 발효식품의 맛으로, 쓴맛(식물의 맛)과 함께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맛을 보조하고 소화를 돕기 위해 사용된다. 한국은 다른 국가 대비 생야채를 많이 먹고 신맛의 김치를 많이 먹기에, 한국인들은 굳이 음료에서 신맛을 먹을 이유가 없어서 신맛 음료에 익숙하지 않다. 이는 커피라는 음료의 맛 선호에도 영향을 미쳤다.

 

2. 커피가 얼마나 쓰고 얼마나 신지는 커피가 그 음식문화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관련이 있다. 식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영미의 커피가 더 신데, 이는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프랑스, 이탈리아의 와인이 더 신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커피는 식사와 함께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식후 입가심으로 마시는 음료에 가깝기에 신맛을 선호할 가능성이 적다.

 

즉, 한국인들이 신맛의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음식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인의 '입가심'이라는 습관이다. 커피가 한국인의 식문화로 파고들 수 있었던 공략지점이기 때문이다.

 

식후땡엔 역시

 

한국인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다. 예컨대 미국의 카페는, 일반적으로 오전 9시 경을 가장 붐비는 시간으로 본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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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에서 카페가 가장 붐비는 시간, 사람들이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시간은 '점심식사 이후'이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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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시간이 아침과 (대개 졸음이 오는) 오후라면, 한국인들이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시간은 점심시간 또는 그 직후인 것이다. 그 의미를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한국인들은, (특히 점심) 식사 이후 입가심을 위해 커피를 마신다"라고 해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입가심의 생활사

 

한국인들이 원래 입가심을 마시던 음료는 따로 있었다.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기원전부터 온돌을 사용했다. 소빙하기로 극한의 추위를 겪은 경신대기근 이후부터는 남부지역까지 전국의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었다. 온돌은 세지 않은 불을 오랫동안 켜서 방바닥(구들장)을 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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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불이 올라오는 곳 위에는 가마솥을 걸어서 요리용 화력으로 썼다. 별도로 요리만을 위한 화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보니, 온돌 난방에 맞추어 강불이 아닌 중불로 불을 때게 되었다.

 

송나라 이후 중국은 석탄의 이용으로 '센 불로 빠르게’ 볶거나 튀기는 요리가 발전했다. 반면, 온돌을 위해 중불을 켜 두는 한국에서는 '중불(약불)로 오래오래’ 만들 수 있는 방식의 음식 문화가 발전했다. 그래서 여러 재료를 가마솥에 넣어 오래 ‘푹 고아 낸’ 탕류나 수육 등이 일반적인 한국 음식이 되었다. 궁중음식을 제외한 ‘따뜻한 한국 음식’ 중에 튀김, 볶음, 구이 등의 비중이 옆 나라들에 비해 매우 낮은 이유, 한국인이 모든 음식을 뜨끈~한 국밥화하는 것(마라국밥, 까르보나라 국밥, 똠얌꿍 국밥)은 온돌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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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온돌-가마솥 방식은, 요리를 다 하고 나서도 불을 끄기 힘들다는 특성이 있다. 가마솥은 무겁고 (열전도율이 높아) 뜨거우니 무거운 가마솥을 들어내어 매번 설거지를 할 수 없다. 결국 음식을 만든 이후 가마솥을 들어 설거지하기보다는 가마솥을 그대로 둔 채 물을 넣어서 끓여 씻어내야 했다. 그렇게 씻어낸 귀한 밥알은 버리기보다 먹는 것이 이익이었다. 가마솥에 밥을 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누룽지가 들러붙는다. 이를 떼어 내기 위해서는 물을 부어 끓여야 했다. 탄 밥(누룽지)를 끓인 물, 이것이 숭늉이다.

 

숭늉의 흥망성쇠

 

숭늉은 한국 음식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음식이었다. 음식을 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숭늉이 생기기 때문에 흔히 먹어야 했다. 강한 불을 만들기 힘든 온돌-가마솥에서 마이야르 반응(당류나 아미노산이 타면서 특유의 구수한 맛을 내는 것) 또는 캬라멜화(caramelized)에 의한 맛을 기대하기 힘들다 보니 숭늉은 마이야르 반응이나 캬라멜화에 의한 맛을 맛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짠맛과 매운맛이 종종 들어가는 한국 음식의 입가심에 적합한 음료이기도 했다. 김치와 생야채로 '신맛'이 충분했고, 곡물 중심에 고기를 적게 먹어 '단 맛' 중심이되 정제당이 없던 한국 음식의 입가심으로 적당했기에, 숭늉은 한국 음식 문화의 ‘후식’으로 절대적이고 공고한 지위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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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 방식의 온돌이 급격히 사라지고, 석유 곤로나 가스레인지 등 ‘조리를 위한 별도의 불’이 도입된다. 자연스럽게 가마솥도 없어졌고 냄비밥을 하게 되었다. 냄비에 밥을 해도 누룽지가 생기지만, ‘불을 끌 수 없는 온돌’과 달리 불을 끌 수 있기에 꼭 숭늉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 혼분식 장려로 밥을 안 먹는 식사가 늘어나면서, 숭늉이 밥상에서 점점 사라지게 된다.

 

결정적인 것은 전기밥솥의 등장이었다. 전기밥솥이 처음 개발된 것은 1921년이지만, 실제 한국에 전기밥솥이 일반화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이후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모든 가정에 전기밥솥이 보급되고, 1994년에는 전기밥솥 보급률이 94%에 이르게 된다.

 

전기밥솥은 그 특성상 누룽지를 만들기가 어렵고, 만들 필요도 없었다. 누룽지를 만들지 못하니 만큼 숭늉을 만들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숭늉을 찾았지만, 슈퍼마켓에서 따로 누룽지를 사거나 따로 번거롭게 만들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료가 되어버렸다.

 

숭늉을 마시기가 어려워진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식후 숭늉을 대체할 수 있는 음료, 따뜻하고 구수하면서 기왕이면 '탄맛'을 느낄 수 있는 음료를 찾았다. 가정에서는 곡물을 볶은(태운) 음료, 즉 보리차를 마셨다. 당신의 회사에 구비된 세 가지 음료를 살펴 보라. 아마 (블랙이나 믹스)커피, 현미녹차, 둥굴레차 셋이 있을 것이다. 모두 구수한 맛의 음료들이다. 이 3대장 뒤에 이어질 것이라면 코코아, 율무차(내지 호두율무땅콩차 등), 옥수수수염차, 미숫가루, 쌍화차 정도가 있을 터인데 모두 구수한 맛의 음료들이고, 커피나 코코아 등 마이야르 반응에 의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음료들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단 맛이 아닌 음료’로 일본과 중국에서는 주로 녹차를 팔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구수한 차(옥수수수염차, 보리차, 헛개차, 17차 등등)가 인기이다. 이것 역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에서 선호되는 대부분의 음료와 마찬가지로, 커피는 숭늉을 대체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은 숭늉과 흡사한 마이야르 반응 또는 카라멜화에 의한 탄 맛과 구수한 맛 등을 선호했으며, 숭늉에 없는 맛인 산미는 선호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한다.

 

그렇다 해도 질문은 남는다. 숭늉을 대체하는 수많은 구수한 후보자 중에 어째서 커피가 보리차, 미숫가루 등의 다른 음료를 밀어내고 공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인가? 한국에 커피가 도입되고 소비되어 온 방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계속>

 

 

편집자 주 

 

본 글은 저자와의 긴밀하고 내밀한 협의 하에

원글에 약간의 수정, 보완을 거쳐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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