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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일 공화국이 탄생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선언이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을 모태로 독일 공산당이 창당됐고, 독일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시작한다.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혹은 1월 봉기라 불리는 무장투쟁이다. 이때 이들을 진압한 것이 우익 무장단체 ‘자유군단’이다. 참전군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납치 살해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 그리고 이를 진압하는 자유군단의 등장. 그에 이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살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전간기(戰間期, Interwar period) 독일의 미래를 예언한 신탁이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등장과 봉기는 독일 사회 전체에 공산혁명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후 등장하게 될 히틀러는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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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18일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추모집회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한 자유군단의 존재도 눈여겨봐야 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10만으로 제한된 독일군은 국경 방어와 국내 치안을 유지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 빈틈을 파고든 퇴역군인들은 준군사조직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현역 때 입었던 군복과 무기를 꺼내 들고 가뜩이나 취약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을 위협했다.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무력이 등장한 거였다.

 

또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때로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결사체의 행동대’로 활약하기도 했고 자유군단이 되기도 했고, 철모단이 되기도 했다. 사회경제적으로 흔들리는 독일에서 통제되지 않은 무력 집단들은 이리저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휩쓸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나치의 돌격대(SA)에 모여들었다.

 

독일에 영향을 미친 빚 독촉의 낙수 효과

 

1,320억 금 마르크. 독일이 내야 하는 1차 세계대전 배상금이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독일의 지불 능력을 아득히 초월했다. 1921년 말, 독일은 첫 배상금을 냈지만, 곧바로 지불 불능을 선언했다. 문제는 배상금을 받아야 하는 프랑스에도 있었다. 프랑스 또한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1922년 4월 21일, 미국이 움직였다.

 

“프랑스가 미국에 진 빚 35억 달러에 대한 상환계획을 제출해 주기 바랍니다.”

 

미국의 빚 독촉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독일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푸앙카레 총리는 독일이 배상금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받아내겠다고 협박했다.

 

독일은 당장 현금이 없다며, 현물로 갚겠다고 나섰다. 독일산 석탄과 목재가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배상금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독일은 사람까지 보내겠다고 했다. 노동자가 프랑스로 넘어가 몸으로 배상금을 갚겠다는 거다. 프랑스는 독일의 인력송출 제안을 거절했다. 그동안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민족감정을 생각한다면, 독일 노동자 유입은 괜한 분란의 씨앗을 가져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결과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독일 경제는 무너졌다. 1920년 독일의 물가는 전쟁 직전인 1914년의 10배로 뛰어올랐다. 그 사이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갚고 정부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이 찍어냈다. 1921~1923년 사이 독일의 통화 공급량은 7,500배나 늘어났다. 독일 국민들의 일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1922년 독일 국민들의 식량 소비량은 1913년 식량 소비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독일인들의 감정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1922년 6월이 되면 1920년 물가의 10배가 다시 뛰어올랐다. 다시 6개월이 지나면 물가는 10배가 더 뛰어올랐다. 1921년 초부터 1923년까지 독일의 물가는 매달 66%씩 뛰어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갓 취임한 쿠노(Wilhelm Cuno) 총리는 배상금의 납부 기한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때마침 프랑스 제철소의 석탄 비축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프랑스 푸앙카레 총리는 결심한다. 직접 배상금을 받아내기로. 1923년 1월 11일 프랑스군 6만 명이 벨기에 보병 1개 대대와 이탈리아의 공병대까지 대동하고 루르 지방으로 진격했다. 벨기에와 이탈리아 군은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군은 자신들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는지 탱크도 끌고 왔다. 그리고 독일의 공업지대 루르를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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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공업지대, 루르 지역

출처 - 워싱턴 포스트

 

루르로 진격했던 프랑스는 금전적 목적을 달성했을까? 9월 말까지 프랑스군의 작전 비용은 7억 프랑이었는데, 루르에서 벌어들인 게 10억 프랑이었다. 즉, 3억 프랑의 이익을 얻었다.

 

당시 프랑스는 경제적 목적뿐만 아니라 다른 뜻도 품고 있었다. 1923년 10월이 되면 독일의 서쪽에 있던 아헨, 트리어, 코블렌츠 등의 도시에서 분리주의 폭동이 발생한다. 폭동의 배후에 프랑스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프랑스의 루르 진격은 독일과 세계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당장 독일의 경제가 요동쳤다. 프랑스가 루르 땅에 들어온 지 채 5일도 안 돼 달라 대비 마르크 환율이 7,260마르크에서 4만 9,000마르크로 급등했다. 당장 주권을 침탈당한 독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루르 지방 국민들의 저항을 지지한다는 선언 정도가 고작이었다. 독일 정부의 지지 선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루르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군에게 저항했다. 프랑스 점령 기간 루르에서만 100여 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프랑스군에게 죽었다. 이제 마르크화 환율은 달러당 15만 마르크를 뛰어넘어 8월 1일이 되면 100만 마르크까지 뛰어올랐다. 독일 경제는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독일인들은 굶주려야 했다. 독일인들의 인내심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회적 내구성이 심각할 정도로 훼손된 당시 독일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9월 중순부터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일어났고, 베를린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노동자와 경찰들 간의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좌파와 우파, 너나 할 거 없이 시위를 벌였다. 10월이 되면 작센, 뒤이어 튀링겐에서 좌파 노동자 정부가 들어섰는데 당시 슈트레제만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해 이들을 깨트리려 했다. 이 와중에 독일 공산당은 총파업과 동시에 봉기를 준비한다.

 

그러다 10월 23일 함부르크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독일 공산당 함부르크 지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거였다. 이미 소련 쪽에서도 이런 혁명적 움직임을 알고 있었고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함부르크 봉기는 너무 일찍 일어났다.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된 봉기는 독일 정부에 의해 곧 진압됐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자 입장에서는 ‘혁명의 시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고, 보수 우파의 눈에는 ‘이 혼란을 잠재울 초인이 등장할 타이밍’처럼 보였다.

 

히틀러의 롤 모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로마 진군(Marcia su Roma). 1922년 10월 28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리고 권력을 잡는다. 히틀러에 앞서 파시즘의 시작과 그 가능성, 정치적 파괴력을 제일 먼저 보여준 건 무솔리니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보여준 수많은 상징과 파시즘의 행태는 모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보여준 거였다.

 

히틀러는 몸이 달아올랐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했다면, 독일의 히틀러도 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물론 이때까지 히틀러는 무국적자이다. 독일인도 아닌데, 독일을 사랑하는 정말 이상한 존재가 히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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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히틀러

 

둘 간에 차이가 있다면 당시 히틀러에게는 에마누엘레 3세 같은 ‘바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에마누엘레 3세는 욕심이 있었다. 틈만 나면 파업과 정쟁이 일어나던 당시 이탈리아 정치 구도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어했다. 에마누엘레 3세는 정규군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불법적인 쿠데타 세력인 검은 셔츠단을 방조해 버렸다. 그리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한다. 무솔리니는 21년간 총리로 재임하였다. 

 

사실 무솔리니는 당시 일이 틀어지면 해외로 도망갈 준비를 모두 해놓았다. 무솔리니가 행진 당시 선두에 서서 검은 셔츠단을 지휘했다는 건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선전용으로 만든 사진 속 연출일 뿐이다. 실제 무솔리니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선 히틀러가 더 용감하다 할 수 있을 거다. 적어도 히틀러는 맨 앞에 나서서 팔짱을 끼었고, 그 때문에 다치기도 했다

 

히틀러는 기회주의적이다. 그는 어떤 거창한 신념 때문에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니다. 정치적 숙고로 쿠데타를 준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하긴, 쿠데타 대부분은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시절이 하 수상했고, 당시 히틀러에게는 롤 모델이 있었을 뿐이다. 히틀러에게 적기(適期)가 찾아왔던 것이다. 

 


 

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

강대국의 흥망/ 한국경제신문사/ 폴 케네디 전 이왈수 역

 

처칠회고록(제2차대전 발췌본)/ 까치/ 윈스턴 처칠 저 차병직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