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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꿀로 만들어진 감옥

 

미국 회계법인은 이직이 잦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컨설팅 쪽은 특히 이직률이 높다. 17명의 입사 동기 중 아직도 회사에 다니는 건 나밖에 없을 정도니까.

 

가장 큰 원인은 상대적으로 낮은 연봉 때문이다.내 경우 회계법인에서 받는 연봉이 비슷한 직종의 일반 기업에서 받을 수 있는 연봉보다 20% 적었다. 핵심은 20%의 디스카운트(연봉격차)다.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7년 동안, 이 디스카운트 비율은 거의 매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연봉이 지나치게 낮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던 해에는 연봉이 대폭 올라갔고, 반대로 연봉이 만족스러웠을 때는 좀 더디게 인상됐다. 이처럼 디스카운트 비율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업계보다 약간 싼(디스카운트된) 연봉 + 각종 부가 혜택으로 핵심 인력을 오래 잡아둔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우리 회사 인력관리의 핵심이다. 회계법인이 업계보다 높은 연봉을 줄 수는 없다. 아무리 큰 대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재무팀 직원의 수는 보통 수 십, 수 백 명을 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대형 회계법인의 직원 수는 수 만 명을 넘어간다. 연봉을 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직원 수의 단위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스카운트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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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회계법인은 디스카운트가 일정 수준 이상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큰 노력을 들인다. 회사는 이직자들이 새 직장에서 받게 된 연봉정보를 수집한다. 해당 직원이 회계법인에서 받던 연봉과 새 회사에서 받게 될 연봉을 비교하면, 디스카운트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회계법인은 매년 헤드헌팅회사에 위탁하여 업계연봉을 지역, 직군별로 조사한다.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각 직원의 적정연봉 범위가 산정된다. 대다수 직원의 최종 연봉은 이 적정 연봉 범위 내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디스카운트가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이를 메우기 위해서 회계법인에서는 직원들에게 각종 부가혜택을 제공한다. 부가 혜택에는 물질적 (통신비, 접대비, 복지카드 지급 등)인 것뿐만아니라 비물질적인 형태로도 존재한다. 그중에서 내가 받았던 가장 값진 부가 혜택은 '자유'였다. 여기서 자유는, 근무하며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7년 회사에 다니는 동안 내킬 때 출·퇴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정해진 일만 기한에 맞춰 해주면 근무 시간 도중에 PT를 받든, 애를 태우러 나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간 딴지일보에 수많은 기사를 연재하고 책까지 낼 수 있었던 건, 업무 동안 내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덕분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설명하자면, 자유가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다. 구성원 모두가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조직은 없다. 자유가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빡빡한 데드라인에 맞춰 나 자신을 일하는데 갈아 넣어야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자유는 얻어내는 것이다. 전쟁 같은 비지 시즌을 치르고 나면, 직원들에게 휴식 시간 그러니까 자유가 주어진다. 상사들도 직원들이 빡세게 굴렀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직원들이 쉬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인카드를 쥐여주고 직원들끼리 술 사 먹고, 노는 것을 독려한다. 특히 빡세게 일을 많이 한 직원일수록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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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일을 잘 못하는 직원(혹은 다른 이유로 눈 밖에 난 직원)에게는 엄격한 근무태도 기준을 들이밀어 못 견디게 만드는 경우도 본 적이 있으니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

 

나는 자칭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일을 열심히 많이 하는 직원은 아니었지만, 상사가 해야 할 일을 줄여주는 요령은 있었다. 상사들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연봉과 막대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꿀 빨았단 얘기다. 그동안 직장생활 참 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 꿀을 너무 오래 빨았다. 7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까. 나는, 내가 여기에 더 머물러봤자, 파트너가 될 수 없단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난 번 이직 면접을 통해, 내가 밖에선 얼마나 좁밥인지를 확인했다. 현재의 달콤함에 익숙해져서 시간을 더 끌었다간, 나는 앞으로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나에게 꿀로 만들어진 감옥인 셈이다.

 

이곳이 나의 평생직장이라면, 그동안 얼마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해고가 너무나도 쉬운 미국이다. 지난 7년 동안 무수한 해고를 목격했다. 이때 가장 먼저 갈려 나가는 건 부장급들이었다. 나이가 들어 생산성은 떨어지는 반면, 받아 가는 연봉은 높기 때문이다. 그동안 회사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해왔는지와 상관없이 회사는 앞으로 쓸모가 있느냐를 가지고 해고를 결정한다. 아직 나는 젊어서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해고되리라. 지금은 꿀로 만든 감옥이지만, 언젠가는 사형장이 될 수도 있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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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펙을 올려보자

 

내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커리어의 부족한 성장 가능성을 채워넣는 가장 빠른 방법은?

 

스펙을 올리는 것이다. 스펙은 말 그대로 눈에 드러나는 지표일 뿐이다. 스펙이 올라간다고 해서 실제 성능, 그러니까 업무 판단능력 혹은 전문지식도 향상되는 건 아니다. 주변에 명문대 나와서 어버버대는 직장동료 한 명쯤은 다들 알지 않는가. 그럼에도, 실력은 겉으로 여간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이후 면접 썰 풀면서 관련된 얘기를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실력을 쌓는 것도 상당히 애로사항이 꽃피는 일이다. 일단 지능과 관련 (판단력, 분석력, 창의성) 부분은 성인이 되어서 향상하긴 어렵다. 나처럼 어수룩한 사람은 아마 죽을 때까지 어리바리하리라.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는 부분도 있다. 어리바리한 이등병이 빠릿빠릿한 상병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숙련의 영역인데 숙련도와 전문지식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이다. 이직 (혹은 취업)을 위해서 실력을 쌓는 건데, 실력을 쌓으려면 먼저 실무경험이 필요하다니! 그에 반해 스펙은 구체적으로 향상할 방법이 존재하고, 향상된 스펙은 겉으로 바로 드러난다. 이러니, 구직자들이 자꾸 스펙에 목을 매는 것이다.

 

스펙에는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의 예를 들면, 내가 졸업한 학부다. 내 나이도 이제 서른을 넘었는데 대학교를 다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다.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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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은 큰돈이 들어가는 투자다. 일반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박사과정과 달리, 문과생들의 석사과정은 자가부담이 기본이다. 프로그램에 따라 달라지지만, 미국 대학원은 1년의 학비와 생활비로만 1억이 넘게 깨진다. 여기에, 석사과정 2년 동안 일을 못하는 점을 고려하면, 2년 치 연봉이 기회비용으로 더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가 산정한 대학원 최소 진학비용은 5억이다.

 

투자라는 것에는, 그에 상응하는 수익이 있어야 한다. 이때,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받게 될 연봉이, 대학원을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받게 될 평균 연봉보다 늘어난 만큼이 수익이 된다. 이렇게 얻어진 수익과 투자금을 비교하면, 투자수익률을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 투자대비수익률 (ROI) = 수익 / 투자금 = (대학원 졸업 후 앞으로 받게 되는 평균 연봉 - 대학원 진학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평균 연봉) / (2년치 학비와 생활비 + 대학원 진학으로 포기한 2년치 연봉)

 

앞으로 평균 10만불의 연봉을 받을 예정이던 직장인이, 대학원에 진학하여 평균 15만 불 연봉을 받게 되었다고 하자. 이경우 5만불의 수익이 발생한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50만 불을 투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수익률은 10%가 된다 (5만불 / 50만불).

 

이러한 계산이 현실에서 어려운 점은 대학원 졸업 후 연봉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도 알 수 없는데 (지난 2년 간의 코로나 사태를 통해 모두가 실감했으리라), 2년 뒤 취업시장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대학원 동기 중 누군가는 임원이 되고 누군가는 취직조차 버거울 것이다. 삶이 풀릴지 꼬일지는 미리 알 수가 없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이러한 계산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좋은 스펙을 쌓는 것이다. 학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스탠퍼드 MBA나 예일대 로스쿨이 얼마나 좋은지는 안다. 지금 언급한 프로그램들은 나같이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에게는 커리어는 물론 나아가서는 인생을 바꿔놓을 기회이다. 이 정도 급이 되면 자잘한 돈 계산은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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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아무나 명문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교는 브랜드이다(한국에서 예일대 로고를 단 옷이 얼마나 많이 팔려나가는지 보라). 명문대학교가 명문으로 남을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의 수준이 평균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명품이 심혈을 기울여 품질관리를 하듯 명문대는 졸업생의 수준을 유지한다.

 

명문대학원이 졸업생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인재들을 골라 뽑는 것이다. 입학 전부터 이미 잘나가는 애들을 최대한 가려 뽑아놓으면, 졸업해서도 아마 잘나갈 테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교들이 인재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학생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보다 능력 있는 학생을 뽑는 게 훨씬 쉬우니까. 물론, 대학교의 본래 목적은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 하지만 인재들은 상대적으로 같은 내용을 더 잘 알아먹을 가능성마저 높다.

 

직장생활 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이미 다양한 경력과 경험을 갖고 있다. MBA 합격자를 예로 들면, 학부졸업 이후 평균 5년 정도의 경력을 갖고 있다. 지원자의 학부와 커리어를 같이 놓고 보면, 얘가 될 놈인지 글러 먹은 놈인지가 대충은 드러나는 셈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명문대일수록 입학전 스펙(학부, 직장경력, 연봉, 심지어는 부모님의 사회적 지위)을 많이 본다. 다시 말해, 나처럼 평범하게 살아온 직장인은 톱 스쿨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펙을 쌓자고 대학원을 진학하려는데, 대학원을 가려는데도 또 좋은 스펙이 필요하단다. 젠장.

 

이미 지나간 일(학부, 지난 경력)은 어쩔 수가 없다. 대학원 입시에는 아직도 GRE(대학원 입학 시험)/GMAT(경영대학원 입학 시험)과 같은 시험성적, 입학 에세이, 면접 같은 부분이 남았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인 대학원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계속>

 

 

추신

 

딴지스 여러분 덕에, 『재무제표가 만만해지는 회계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전에 쓴 딴지 연재물을 확장하여, 이때다 싶어 열쒸미 공부, 정리하여 낸 책입니다. 아마, 현직 회계사 중, 저만큼 회계공부를 싫어했던 회계사는 거의 없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저만큼도 공부를 안 했다면 못 붙으셨을 테니까요). 회계 공부를 싫어했던 제가 스스로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계실 독자분들 상정해 쓴 책이다 보니 재밌습니다(아마도...). 그동안 회계 공부가 하기 싫었다거나, 회계에 관심이 없었던 독자분들(사실상 전원)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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