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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에게 칼같이 잡힌 전투복 줄은 명예요, 간지요, 짬의 상징이다.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군인들의 세계에선 정말 중요한 일이다. 어느 계급부터 다림줄을 몇 줄 넣을 수 있다든지 하는 지엄한 기준이 부대마다 전해내려오곤 했다.

 

하지만 휴가만 나와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민간인 시선에선 군복에 주름을 두 줄 잡든 세 줄 잡든, 아무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무의미한 뻘짓이라는 거다. 그런데, 군인의 세계로 돌아가면 전투복 주름은 다시 지엄해진다. 매섭게 잡혀있는 전투복 줄에는 그 사람의 계급과 권위가 가득 베여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도 군복 줄잡기처럼 외부의 시선에선 하등 쓸모없지만 자기들끼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국회의원 선 수 따지기다.

 

이해찬은 왜 레전설인가

 

“저분은 무려 재선 의원이시고, 3선 의원이시고, 어쩌구 저쩌구.....”

 

국회의원 당선 횟수가 4선, 5선을 넘어가면 당내 원로로 대접 받는다. 사실 일반 국민의 시선에선 그 국회의원이 몇 번 당선됐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 없다. 그냥 다 똑같은 국회의원으로 보일 뿐이다. ‘니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국회의원이라니 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 정도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의도 바닥에선 그렇지 않다. 이쪽 업계 사람들에게 선수는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회의 이런 선수 따지기 문화의 저변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 환경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회의 임기가 바뀔 때마다 현역 의원 교체율이 약 48%에 이른다. 이 말은 현역 국회의원 2명 중 1명은 다음 선거에서 무조건 떨어진다는 의미다. 국회의원 임기가 짧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국회의원 입장에서 4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4년 뒤엔 나 혹은 내옆에 있는 누군가 반드시 낙선한다. 어떤 초선 국회의원은 자신의 4년 임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배지를 달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2년 정도 간다. 정신 차리고 보면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았더라.”

 

세계적으로도 의원 교체율이 이렇게 높은 나라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을 국회로 보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교체율이 높은 만큼 국회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국회의원 교체율이 매우 높은 한국의 정치 환경은 국회의원들을 극심한 스트레스로 몰아세우는 요소가 된다. 국회의원들의 1차 목표는 무조건 ‘한 번 더 당선’이다. 국회의원들의 모든 활동에는 다음 당선에 초점이 맞춰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의원에게 당선 외에 다른 건 부수적이거나 중요한 목표가 아니다. 대부분 임기 내내 한 번 더 당선되는 것만 고민하는 사람들이다(극소수지만 아닌 사람도 물론 있다).

 

선거라는 과정은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자신이 그동안 쌓은 모든 돈과 명성, 가족, 친구, 모든 걸 베팅해야 된다. 총 칼만 안 들었을 뿐이지 사실상 서로 모든 걸 걸고 벌이는 전쟁이다.

 

그러니 2번 당선된 사람, 3번 당선된 사람 등등 다선 의원들이 초선 국회의원들의 눈에는 좀 과장해서 전쟁 영웅 정도의 경외심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인다.

 

TK에서 보수정당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호남에서 민주당 계열로 당선된 국회의원보다 스윙 보트 지역에서 살아돌아온 국회의원을 더 높이 평가해준다. 지역 상황이나 정치 상황이 자당에 아주 불리하거나 거친 환경에서 당선되고 국회로 돌아온 사람일수록 그에 대한 경외심은 더 커진다. 전설의 레전드 7선 이해찬 전 대표나, 현 국회의장 6선 박병석 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받는 존경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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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이렇듯, 어떤 지역에서 몇 번이나 당선됐는지는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서로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정치인이 갖는 아우라가 되며, 그 정치인의 말의 무게가 되기도 한다.

 

'0'선 당대표의 탄생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는 여러모로 한국 정치사에 독특한 인물이다. 정계에 입문한 과정도 중앙 정계에서 성장해온 과정 또한 전례가 없는 루트다. 그런 그가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그가 출마한 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거다. 0선의 30대 당 대표의 등장. 파격적인 결과였지만, 그의 당선은 한국 정당정치의 구조상 리더십의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국민의힘은 정치이념도 보수적이지만, 정당을 이끌어가는 방식도 보수적이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보수적인 문화가 강하다. 그들에게 당선 수는 곧 계급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 번도 당선되어 본 적 없는 30대 당 대표의 말에 힘을 실어줄 동료 의원들은 거의 없다. 선수 따지기에 익숙한 국회의원 문화 속에서 '0'선 이준석이 당내에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최근 대선 정국에서 폭풍처럼 지나간 국민의힘 내홍의 진앙은 소속 의원들이 '0선 대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해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판단했겠지만, 당내 분위기는 그 요구를 수용할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당내 어르신들은 이준석 대표가 전면에서 당 전체를 이끌어가길 원하지 않았다. 이준석 리더십이 잘 먹히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선대위의 이준석 당 대표 패싱은 팩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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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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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이준석 당 대표를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당선된 인물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는 정황들이 곳곳에 있다. 여의도 바닥 정치인들의 눈에는 이준석 대표의 뒷덜미에 ‘0선’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는 것이다.

 

제갈량 놀이

 

이준석 대표의 리더십 문제는 단순히 부족한 '경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준석 대표의 다른 불안요소는, 본인이 스스로를 ‘전략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이준석 대표가 윤석열 후보에게 했던 발언을 돌아보자.

 

“윤 전 총장이 당에 들어온 뒤, 부인이나 장모에 대한 공격이 들어온다면 윤 전 총장에게 비단 주머니 3개를 드리겠다. 급할 때마다 하나씩 열어보면 된다”

 

신묘한 비책을 담아 놓았다는 저 비단 주머니의 정체에 대해서, 국회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놀라는 사람은 많았다. 무협지에 푹 빠져있는 중학생같은 이준석 대표의 멘탈리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준석의 첫 번째 비단 주머니가 윤석열 후보와 맞춰 입은 빨간 커플티인 것이 밝혀졌을 때, 여야를 막론하고 말문이 막힌 보좌진들이 내는 '얽.. 얽..' 소리가 국회 복도를 가득 메웠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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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일보>

 

이준석 대표가 선대위에 풀어오라고 내준 ‘연습문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당 대표-후보와의 관계를 족집게 과외교사와 학생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는 이준석 대표의 비대한 자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당 대표로서 '지금 대선 정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이다.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한 번의 재보궐 선거에서 낙선한 경력으로 대선의 족집게 과외 선생 노릇을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생이 자신만이 '판을 읽고 있다'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 연습문제의 정체는 ‘지하철 인사’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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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신문>

 

 

이런 태도는 당 대표로서 리더십에 치명적이다. 당장 국민의힘 내부에 10년 이상 베테랑 보좌진들의 눈에 이준석의 행보는 위태롭고 치기 어려 보일 수 밖에 없다. 이준석의 ‘제갈량 놀이’는 본인은 신나고 즐겁겠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재미있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정치는 밥그릇 싸움이다. 평생을 몸담고 사력을 다해온 직장에 어느 날 무협지를 많이 읽어 가슴이 웅장해진 청년이 CEO로 와서 회사의 명운을 쥐고 흔들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선거 승리보다 '선거 전략의 귀재'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면모를 뽐내는데에 더 관심이 많은 당 대표는, 보좌진들 입장에선 밥그릇을 위협하는 조마조마한 존재인 것이다.

 

초식이 다르다

 

이준석 대표는 지금까지 본인이 패싱 당할 때마다 당무를 거부하고 잠행하거나, 언론을 돌아다니며 선대위를 공격하는 카드를 썼다.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다. 당 대표직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씨알도 안 먹히는 자신의 말빨을 보여줄 수 있는 묘수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힘 내부와 윤석열 선대위 입장에서 보면, 나이도 어린 '0'선의 당 대표를 무시하고 가만히 두자니, 자꾸 밖에 나가서 내부 총질하며 시끄럽게 구니까 어쩔 수 없이 달래서 급히 봉합한 상황이다. 판을 엎을 수는 없으므로.

 

그러고 보면 이준석은 정말 새로운 정치인이긴 하다. 이만큼 당 대표를 흔들었으면, 계파 이해관계로 누르든, 싸우든, 딜을 하든, 물러서든 답이 나올 텐데, 그냥 '시룬뒈?'하고 버텨버린 것이다. '0'선의 힘이랄까. 국민의힘 어르신들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이 자는 초식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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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