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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성생활을 엿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사생활은 있었습니다. 사생활 중에서도 제일 사적 영역인 성생활도 있었구요. 그래서 우리가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들의 성생활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글을 몰랐던 대부분의 평민들은 성생활을 떠나 남긴 기록 자체가 별로 없고, 유교적 선비정신이 중요했던 양반들은 기품있고 점잖아 보이는 체통이 중요한지라 성생활에 관한 기록을 자체적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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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EBS1<역사채널e>

 

하지만 그런 양반 중에도 일기 속에 솔직하게 자신의 성생활을 솔직하게 고백한 이도 있고, 직접적으로 고백하진 않았지만 성생활의 흔적을 남겨놓은 이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양반들의 성생활은 어땠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19세기의 문인,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은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항상 그렇듯,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일기 번역문에 윤색과 편집을 가했습니다)

 

1804년 3월 27일 - 『남천일록(南遷日錄)』

 

내 평생 가장 괴로웠던 건, 남들보다 훨씬 더 성욕이 많다는 것이었다. 서른 살 이전엔 거의 미친놈처럼 성욕에 집착해서, 세상에 창피한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때마다 진심으로 반성했지만, 결코 성욕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대체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성욕에 대해서는 나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는 회고합니다. ‘기생들과 놀 땐 좁은 골목이나 개구멍도 가리지 않아,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심노숭이 누구일까요? 비록 그는 고관대작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의 아버지 심낙수(沈樂洙, 1739~1799)는 문과 장원급제자 출신으로서, 노론 시파(時派)의 중추적 인물이었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중대한 역할을 한 노론은 사도세자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당연시하는 ‘벽파’로 갈라졌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 가닥 하던 명문가의 자손이었고, 어릴 때부터 예(禮)를 기계처럼 익히던 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간판을 걷어보면, 좁은 골목에서도, 개구멍에서도, 아무튼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쳐 살던 ‘섹스 중독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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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하다. 허나, 멈출 수가 없다.

 

심노숭의 자기 고백은 가히 파격적입니다. 양반들은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해 대체로 솔직한 일기를 썼지만, 전술했듯 스스로의 성생활을 이토록 솔직하게 담은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조선은 관청이 법으로 기생을 관리하던, 어떻게 보면 ‘전근대형 공창제’를 유지하던 나라입니다. 지방으로 발령된 공무원이 스리슬쩍 현지처(現地妻)를 만들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게다가 첩(妾)을 들이는 것도 윤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양반들, 비록 갓끈을 졸라맨 채 정절을 부르짖었지만, 아랫도리는 너무나 솔직했다는 게 그들의 일기에서 드문드문 드러납니다. 특히, 전방으로 발령된 무관들의 일기에서요.

 

 

집 떠난 유부남, 탕아가 되다

 

1605년 12월 8일 - 『부북일기(赴北日記)』

 

현감이 나를 들어오라 청했다. 저녁에 관아에 들어가, 모임에서 기생들과 함께 나그네의 회포를 풀었다. 내 짝이 된 여인은 은씨(銀氏)이고 나이는 18세였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의 초심을 돌처럼 지켜, 끝내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선조 때의 무관 박계숙(朴繼叔, 1569~1646)은 어느 날, 전방 중의 전방, 회령으로 발령받아 고향인 울산을 뜨게 됩니다. 전방으로 향하는 부임 길은 마치 유배길처럼 멀고도 고된 시간이었죠. 박계숙은 지역을 거칠 때마다 관아에 들러 회포를 푸는데, 종종 접대를 받아 기생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초심(初心)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절세 미녀인 ‘은씨’라는 기생을 곁에 두고도 나름의 윤리적 소신을 지켜 그녀와의 밤을 보내지 않죠. 이때가 집 떠난 지 58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굳은 초심이 흔들리는 ‘운명적 만남’이 다가옵니다.

 

1605년 12월 26일 - 『부북일기(赴北日記)』

 

아침에 애춘이가 아리따운 여성과 함께 나를 찾아와,

 

“나으리. 어젯밤에는 너무나 바빠서 오늘 찾아왔답니다.”

 

라고 하여, 방으로 들라고 했다. 따라온 아름다운 여성분의 나이는 16세. 그 미모는 역사 속 미녀들이 모두 울고 갈 정도였다. 가을 구름에 숨은 달 같은 자태와, 봄 연못에 비친 연꽃 같은 미소를 가진 그녀의 이름은 금춘이었다. 그녀와 함께 저녁 때까지 얘기를 나누니, 내면에서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초심을 돌과 같이 하여 끝끝내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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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이 잦아지다 보면, 합석했던 기생들과 안면을 트게 됩니다. 박계숙이 거나하게 마신 다음 날, 어젯밤 어울렸던 기생이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나타나죠. 그 여성을 보자마자 박계숙은,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녀의 손짓 하나, 목소리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첫사랑에 빠진 소년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리죠. 그렇게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다시금 ‘초심’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의 굳었던 결심은 바로 다음 날에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1605년 12월 27일 - 『부북일기(赴北日記)』

 

새해가 가까워져 마음이 영 싱숭생숭하던 차에, 금춘이 스스로 나를 찾아와 말했다.

 

“낭군님, 어제는 밤이 늦고 사람들이 많아 긴히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이렇게 다시 찾아왔답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나 또한 호탕한 기운의 사나이인데, 반년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니 어찌 욕구가 없으랴. 결국엔 초심을 버리고 그녀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띄웠다.

 

제 발로 찾아온 금춘과 함께 그는 찐하게 썸을 타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때쯤이면 박계숙의 머릿속에는 온통 빨간색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시를 통해 나누는 그들의 썸, 이랬습니다.

 

미인을 경계할 것을 철칙으로 삼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미인은 못 잊을 것 같구나.

-박계숙

 

이치에 모두 통달한 똑똑한 사람은 어디가고

방향도 제대로 못 잡는 헛똑똑이가 여기 있네.

-금춘

 

나 또한 성 밖을 나온 나비 신세라오.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돌았는데,

이제 변방의 이름난 꽃가지에 앉아봐도 되겠소?

-박계숙

 

여자의 농담을 곧이곧대로 들으시다뇨.

문과 무를 겸비하신 것은 저도 아옵니다.

하물며 용맹한 무사님을 어떻게 그냥 보내겠습니까.

-금춘

 

말랑말랑하면서 뜨거운 썸타기 끝에, 박계숙은 그날 밤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금춘과 함께 동침하여 잊을 수 없는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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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양반 남성이 여행길, 혹은 부임지에서 ‘우연 같은 만남’을 통해 그들만의 로맨스를 펼쳐가던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박계숙은 그나마 ‘초심’ 운운하며 나름대로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훗날 똑같이 회령으로 발령된 박계숙의 아들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은 20대의 왕성한 피지컬을 증명했습니다. 1644년 12월 11일부터 1645년 10월 25일까지, 박취문은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스무 명이 넘는 여성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의 동침 상대는 기생, 여종, 주막집 주인 등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대체로 일회성 만남에 그쳤죠.

 

그중에서도 박취문이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성은 설매라는 방기(房妓)였습니다. 

 

<계속>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 나온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절찬리 판매 중이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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