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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3가지 유형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근무하면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

 

“국회의원들 보좌관이 써준 대로 읽기만 하는 것 아니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케바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300명의 국회의원들의 개성과 역량, 업무 스타일, 말하는 태도 등등이 모두 제각각이라 일반화하기가 힘들다.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가까이 지켜본 경험을 토대로 그래도 유형을 나누어 보자면,

 

1) 보좌진이 준비한 자료를 모두 이해하고 흡수한 뒤에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

 

2) 보좌진이 준비한 대본(?)을 틀리지 않고 겨우겨우 읽어내는 사람(사실 이 정도만 소화해도 양반이다. 현장에서 돌발 변수가 많다. 이런 유형이 그나마 왜 양반인지는 윤석열 후보를 보면 알 수 있다).

 

3) 써준 것도 못하는 사람.

 

어떤 4선 중진 의원은, 보좌진의 자료는커녕 본인이 직접 몇 글자 끄적인 간단한 메모들만 가지고 장관들을 상대로 7분씩 꽉꽉 채워 질의하기도 한다. 장관의 답변에 즉흥적으로 재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보좌진들이 연극 대본에 가깝게 상세히 토시 하나하나 다 써줘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의원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8대 국회 때 어느 보수정당의 의원님께서는,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친다) 장관!! 그게 말이 됩니까!

 

라고 보좌진이 써준 걸, 괄호 안의 문장까지 읽어버린 적도 있었다. 실화다. 아마 그 의원실 보좌진들은 그날 여의도에 숨을 쥐구멍이 어디 없나 하루 종일 찾아 헤맸을 것이다. 이런 사례를 찾자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MS오피스를 왜 마이크로소프트와 독점계약했느냐’고 따져 물었던 새누리당 이은재 의원은 그해 국정감사 최고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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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의는 사실 한국MS오피스 판권을 가진 총판 아래의 ‘여러 파트너사’들이 공개경쟁입찰을 해서 계약을 따지 않고 하나의 업체랑 수의계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니까 질의 내용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보좌진이 써준 것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국회의원이 어떻게 망신을 당하는지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는 선수와 스탭의 관계라고 하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예컨대, 한 명의 스포츠 선수가 있다고 치면 그 선수의 감독, 코치, 트레이너, 스태프들이 함께 팀을 꾸려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스탭들이 아무리 서포트를 해도, 결국 그라운드에서의 플레이는 온전히 선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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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언어

 

윤석열 후보 이야기를 해보자. 언론에 알려진 바로는 국민의힘 중앙선대위에는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 일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코칭스텝과 프론트가 윤석열이라는 선수 한 명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실과 비교할 수 없는 스케일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후보는 말실수 혹은 망언을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내고 있다. 세려면 손가락 발가락을 합쳐도 부족할 정도다. 사실 더 많지만 일단 유명한 것들만 모아보자.

 

‘일본 후쿠시마 원전수 과거엔 문제가 아니었다’

 

‘세금을 걷어서 나눠줄 거면 안 걷는 게 제일 좋다’

 

‘주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씩 바짝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19가 대구에서 시작 안됐으면 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부정식품이라는 것은, 없는 사람도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거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정치공작을 하려면 인터넷 매체가 아닌 메이저 언론을 통해 하라’

 

‘임금의 차이가 없으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큰 의미가 없다’

 

‘사람이 사람이 손발로 노동을 해서 되는 거 하나도 없다, 그건 인도도 안 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

 

‘인문학이라는 건 대학원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집이 없어서 주택청약통장을 만들어보지 못했다’

 

‘주택청약을 모르면 치매환자’

 

‘손바닥 王’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

 

‘반려동물과 식용 개는 따로 있다’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모르고 필요성을 못 느낀다’

 

‘휴대폰에 앱을 깔면 구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민주당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부득이 국민의힘을 선택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따른 것이 아니고 외국에서 수입해온 이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국민의힘 경선 때 토론을 누가 많이 봤느냐. 정책토론을 많이 하는 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 같다’

 

‘한국 청년들은 중국을 싫어한다’

 

‘무식한 3류 바보들을 데려다 나라를 망쳐놨다’

 

수백 명의 스탭들이 서포트 하는 대선 후보가 이렇게 말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은, 윤석열 후보는 앞서 말한 분류 중 ‘3) 써준 것도 못하는 사람’의 유형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그랬다

 

김종인 위원장이 윤석열 후보에게 '우리가 해준 대로 연기만 좀 해 달라'라는 부탁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제발 혼자 뭔가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스탭들이 써준대로라도 읽으라는 뜻이다. 김종인 위원장도 알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가 ‘써준 것도 이해 못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그래서 실수만 하지 않아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재명 후보와 비교했을 때 최근 일주일 간 윤석열 후보 행보의 가장 큰 특징은, 생방송 일정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유튜브같은 엄청나게 편리한 플랫폼도 많다. 웬만하면 언제든 라이브로 소통할 수 있다.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유튜브 라이브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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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간단하다. 해봤자 손해, 할수록 마이너스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의 즉흥적인 발언은 지속적으로 문제를 만들어왔다. 거의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생방송을 줄이고 약속된 플레이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종인 위원장의 ‘연기만 해달라’ 발언에 윤석열 후보가 매우 불쾌해 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윤석열 후보의 공식 일정 대부분은 즉흥연기 없이 정해진 대본대로 약속된 플레이만 하는 엄격한 연극 무대들이다.

 

지난 4편(보좌진 시선으로 본, 김건희 인터뷰)에서 김건희 리스크가 낸 작은 균열이 윤석열 호의 미래에 불안요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최근 며칠간 유혈낭자했던 국민의힘의 내홍을 지척에서 바라본 바, 윤석열 호는 작은 균열의 문제가 아니라 배 자체에 치명적 결함이 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침몰하고 있다. 설상가상, 어떻게든 배를 수리해서 전진하게 만들어야 할 선원들 마저 항해는 집어치우고 파벌을 나누어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선원들 중 일부는 자의던 타의던 배에서 뛰어내렸다. 어제(6일) 의총에서 극적으로 뜨거운 따봉 화해식을 거행하며 휘청이던 키를 겨우 잡긴 했지만, 위태로운 항해는 그대로다. 현재 시점에서 김건희 리스크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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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일이 이지경이 됐을까. 시작할 땐 다들 그럴싸한 계획은 있으니 아마 윤석열 후보도 그럴싸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망언, 말실수, 선대위의 심각한 내부 갈등, 지지율 하락, 심지어 안철수의 광값을 잔뜩 올려놓은 것도 모두 윤석열 본인의 작품이다.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캠프에서 윤석열 후보는 어떤 위기관리 능력을,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 것인가. 확실한 건 후보 스스로가 '써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유형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항해는 갈수록 절망적일 것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