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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라는 여론조사 기관은 지난달 17개 선진국의 19,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국의 답변 순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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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Pew Research Center 홈페이지(링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을 간추려 보면, 한국은 ‘가족(Family)’이 1위에 오르지 못한 세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보다 먼저 ‘물질적 풍요(Material well-being)’, 그러니까 돈이 1위를 차지한 유일한 나라다. 그러면서도 대만과 더불어’직업(Occupation)’이 5위 안에 들지 못한 유이한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어떤 나라보다 돈이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중이 큰데 막상 직업이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말이다.

 

위의 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설문 조사의 분석 내용을 보면 1순위에 중복 답변을 하지 않은 응답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역시 대한민국이었다. 돈이 1위를 차지한 유일한 나라의 조사 대상자 62%가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단순하게 바라봤을 때에는 정말 우울하기 짝이 없는 결과다. 한국인은 그토록 돈을 밝히는 습성을 가진 사람들인가. 물질주의에 가장 찌들어 있는 나라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말인가. 하지만 위의 결과만으로는 뚜렷한 답을 하기 어렵다. 후속 질문과 세부 분석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이 결과만 놓고 누가 어떤 해석을 들먹인다 한들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분명 이런 결과를 낳게 한 원인은 있을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동원될 수도 있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천 명가량의 대한민국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 돈이라고 답했다.

 

경제적 자유 혹은 자립

 

경제적 자유라는 표현을 여기저기서 참 많이도 듣는다. 언제 처음 접했는지 가뭇하지만 이렇게 흔하게 쓰이게 된 것은 불과 요 몇 해 사이 일어난 일이다.

 

코로나 이후 대거 늘어난 이른바 동학 개미들에게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유를 물으면 상당한 빈도로 언급되는 것이 경제적 자유다. 거기 대고 “아니, 그거 이미 우리한테 다 있다니까요?”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요즘 통용되는 경제적 자유는 ‘스스로 정한 수준의 사회적 품위를 지킬 수 있는’이라는 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준에서 그럭저럭 먹고 산다 하는 정도의 삶을 근로 소득 없이도 영위할 수 있는 상태. 그게 경제적 자유의 현대적 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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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유튜버 신사임당

출처 - <tvN D ENT 유튜브 화면캡처>

 

그런 면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자유란 ‘경제적 자립’에 가깝다. 경제적 자립이라고 하니 한두 해 전부터 매체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파이어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앞 철자를 딴 파이어(FIRE)족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 이른 나이에 은퇴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일하면서 돈 버는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경제적 자유의 시기는 대부분 비자발적 은퇴 이후다. 여기서 말하는 비자발적 은퇴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이 등의 조건 때문에 더는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근로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는 상황을 뜻한다.

 

기대 수명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반면 퇴직 연령은 점점 당겨지는 추세에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에 근로 소득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게 현실이다. 여기에 자녀의 경제적 기반이라는 짐을 하나 더 얹으면 그냥 부족이 아니라 턱없는 부족이 된다. 그래서 일찌감치 일과 투자를 병행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파이어족을 꿈꾸는 이들의 태세는 훨씬 적극적이다. 비자발적 은퇴 이후를 대비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발적 은퇴 시기를 최대한 앞당기는 데에 이들의 목적이 있으므로 최대한 많이 벌고 적게 쓰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이처럼 은퇴 이후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나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들은 근로 소득 없이 투자 수입과 자산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는 점에서 지향하는 바가 같다. 단지 그것에 도달하는 목표 시기와 그에 따른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해서 버는 돈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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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링크

 

 

각자도생의 길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까지만 해도 인간의 생존은 오로지 육체적 생존만을 뜻했다. 죽을 정도로 굶거나 다치거나 병들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게 생존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육체적 생존을 위협 받는 사람의 비율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낮은 수준이다. 여전히 사고를 걱정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 있고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하실 분들이 있을 줄 안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질병을 제외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육체적 생존보다 사회적 생존이 훨씬 중요한 문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이 우울한 근거가 되겠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극단적 선택은 연령과 성별을 가리지 않는 문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앞서 언급한 여론 조사 결과를 다시 떠올려본다.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돈이라고 답한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는 17개국 가운데 한국이 유일했다. 이 결과와 OECD 자살률 1위라는 통계를 같은 선상에 놓으면,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생존은 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장 돈이 없어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스스로 사회적 생존을 포기하게 만드는 데에 금전적 요인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다. 돈 이외에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들을 지켜내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는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와는 상관없이 이미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그러므로 은퇴 후의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사람이든 파이어족을 꿈꾸는 사람이든 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근로 소득 없이도 사회적 생존이 가능한 각자도생의 길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파이어족이 되어 자발적으로 근로 소득을 포기하고 모아 놓은 자산과 안정적인 투자 수익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증여나 상속받은 재산을 없다는 가정하에 파이어족이 되려면 당연히 소득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근로 소득 없이 경제적 자립이 가능한 자산 규모가 100이라면 1년에 10을 모으는 사람에게는 10년의 세월이 필요하고 4를 모으는 사람에게는 25년이 필요하다. 전자는 10년 만에 제 발로 직장을 뛰쳐나오는 파이어족이 될 수 있다. 은퇴의 시기를 앞당기는 데에 관여하는 조건은 소득 말고도 지출이 있으므로 파이어족 대부분은 고소득자(대부분 고학력이다)이면서 극단적 절약을 통해 소득의 대부분을 저축한다.

 

<머니투데이>에 소개된 파이어족의 예를 들면, 게임회사에 다니던 김 모 씨가 36세에 퇴사할 때까지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던 여자친구와 모아놓은 순자산이 18억이었다. 이들은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근로 소득의 최대 80~90% 이상을 저축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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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머니투데이 기사 캡처>

(관련기사 링크)

 

근로 소득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 은퇴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노려야 할 것은 투자 수익이다. <머니투데이>의 다른 기사에 소개된 파이어족은 맞벌이 월급의 50% 이상을 저축해 마련한 종잣돈 3억을 부동산 등에 투자해 3년여 만에 총자산 50억, 순자산 20억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혼집 판 3억으로 3년만에 자산 50억.jpg

출처 - <머니투데이 기사 캡처>

(관련기사 링크)

 

이것이 각자도생의 길이다. 남들보다 현저히 높은 수준의 근로 소득을 극단적으로 절약하거나 투자로 수백 수천 퍼센트의 고수익을 내서 파이어족이 되는 길. 당장의 소득이 넉넉하지 않으면 최대한 오랫동안 일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자산을 모으고 불려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각자도생의 길 말고는 없나

 

헌데, 이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난 7일 세계불평등연구소가 발간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 성인 인구의 평균 소득이 약 3843만원인데 반해 상위 10%는 약 1억 7850만원을 벌었다. 일해서 번 돈이든 투자해서 번 돈이든 우리나라 소득 상위 10%에 들지 못하면(그것도 꾸준하게) 파이어족은 말 그대로 꿈같은 이야기다.

 

정년에 가까운 나이까지 열심히 일하고 투자도 해서 은퇴 후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건 어디 쉬운 일인가? 앞서 말했지만 법적 정년과는 별개로 직장인들이 체감하는 정년은 그보다 10년 이상 앞서 있는 게 현실이다. 거기에 자녀를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이들에게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한다면 난이도는 몇 곱절로 뛴다.

 

투자는 더 어렵다. 누구나 주식으로 대박이 나고 부동산으로 자산을 열 배씩 불릴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가 온갖 매체에서 회자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투자에 따르는 개인 차원의 리스크 외에 사회적 리스크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나 부동산 투자가 그러한데, 부동산 투자 열풍으로 너도 나도 선량한 투자자가 되어 대부분 고수익을 내고 자산을 불렀다고 치자. 개인적 차원에서는 그보다 더한 해피엔딩이 없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그게 바로 부동산 거품이고 국가 경제의 위협이다.

 

근로 소득이 없이도 사회적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각자도생뿐일까. 개인이 스스로 노력이든 능력이든 운이든 총동원해서 쟁취하지 않고서는 닿을 수 없는 걸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원한다면, 보다 덜 위험하고 더 쉬운 길을 ‘함께’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에 대한 고민에 앞서 우리가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비하면 그나마 지금까지의 각자도생 난이도는 ‘쉬움’ 수준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지금까지는 직장이 나를 더 필요로 하지 않을까봐 불안했지만 앞으로는 많은 직장이 사람 자체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측에 대한 이야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