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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에 리뷰 노예로 납치된 불가사리. 거액의 제작비로 복수하겠다. 다짐했지만, 딴지가 던져준 주제는 온통 싸구려들.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는 ‘맛집 리뷰’를 하라고 불가사리를 설레게 했으나, 굳이 ‘돈까스’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돈까스로 유명한 성북동과 남산을 들른 불가사리는, 기사식당식 돈까스 이전의 한국식 돈까스 스타일을 찾아 떠난다. 과연 불가사리는 성공적으로 딴지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을까?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기대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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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아내의 역습

 

돈까스를 먹으며 살이 몇 킬로나 찐 불가사리,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게 자고 있는 주말 오전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전날 술을 마시고 잠든 불가사리를 깨우기 위해 어린 두 아이들이 아침부터 불가사리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귀에 대고 소리를 치기도 했지만 불가사리는 개의치 않고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섬뜩한 기분에 빠르게 일어나 앉은 불가사리 앞에 팔짱을 낀 아내가 아무런 말 없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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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요즘 맨날 혼자 돈까스 먹으러 다니니까 좋아?

 

불가사리: 응??

 

아내: 주말인데 이렇게 늦게 일어나고, 맨날 돈까스 먹으러 다니면서 나랑 애들은 한 번 데려가지도 않는 게 말이 돼?

 

불가사리: 아 안 그래도! 오늘같이! 돈까스 먹으러 가자고 하려고!!

 

아내: 정말? 어디를 생각했는데?

 

불가사리: 아... 그거.... 아 거기 있잖아. 서울역 그릴이라고 알아? 거기가 우리나라에서 돈까스 제일 먼저 판 곳이라던데! 하하하!

 

아내: 거기가 아직 있어? 없어진 거 아냐? 

 

불가사리: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역사의 장소에 애들도 데려가고 교육에도 좋겠는걸??

 

이렇게, 어느 주말 갑자기 서울역 그릴로 향했다.

 

서울역 그릴, 한반도 최초의 양식당?

 

서울역 그릴은 흔히 ‘한반도 최초의 양식당’으로 불리고, 서울역 그릴의 메뉴판에도 쓰여 있었다. 공식적으로 1925. 10. 19. 서울역사가 준공된 직후 문을 열었고, 일본의 고관들과 해방 후 대통령들도 즐겨 찾는 음식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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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직후, ‘그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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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4. 10. 조선일보 기사

 

다만 당연한 것이지만 한반도에 최초로 생겼던 양식당은 아니다. 한국 최초의 호텔로 1889년 개장한 ‘대불호텔’에도 서양식 식당이 있었고, 1901년 개장한 ‘팔레호텔’, 1902년 개장한 ‘손탁호텔’은 프랑스 요리사가 상주하는 식당이 있었다. 기록상 확인되는 것들만 그러할 뿐, 이 시기 이전에도 양식당이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아관파천(1897년) 이전에 이미 커피는 양반들에게 유행하는 문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릴’이 개장한 1925년에는 이미 ‘레스토랑’, ‘카풰(카페)’ 등으로 불리는 양식당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평양 양식당’ 등 많은 양식당들이 문을 열었다. 지난 커피 기사에서 이야기했듯 다양한 카페와 서양식 식당들이 생겨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양식당’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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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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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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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레스토랑 베란다의 모습

 

현재까지 존재하는 식당 중 가장 오래된 식당이라고 하기에도, 1914년 조선호텔이 생겼고 개장 시점부터 프렌치 양식당이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므로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이는 현재 조선호텔의 ‘나인스 게이트’로 이어지는데, ‘나인스 게이트’는 1924년 문을 연 조선호텔 내 ‘팜코트’를 전신으로 하는 한국 최초 양식당이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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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과 황궁우의 모습.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을 철거,

그 자리에 지어진 호텔로,

이후 미군정 사령부, 이승만 대통령 집무실로도 사용되었다.

지금도 조선호텔 주변에 있는 한옥 풍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출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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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최승희가 조선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는 유명한 사진.

최승희의 나이와 전성기 등을 고려할 때

1930년대 초반의 사진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최초의 경양식 식당’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경양식이라는 용어는 당시 존재하지 않았고, 서울역 그릴은 돈까스와 오므라이스, 함박스텍 등을 파는 식당이 아니라 비프스테이크를 메인으로 하는 정식 양식당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반도 최초로 역 내에 생긴 양식당이라는 말은 분명한 사실이고,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최고급 양식당임은 분명하다. 더 정확히는, 호텔 양식당과 비슷한 수준의 음식을 제공하나 호텔 양식당보다는 접근성이 좋고, 여행을 가면서 한 번 기분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곳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호텔 양식당 등에 비교하여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았고, 방송 등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했다.

 

‘서울역 그릴’은 무슨 뜻인가?

 

Grill: 

an informal restaurant that sells grilled food such as hamburgers, steak, and chicken (Cambridge dictionary)

그릴 grill:

호텔이나 클럽의 간이식당. 그릴 룸. 순화어는 ‘양식집’ (Oxford Languages)

 

식당을 ‘그릴’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별로 없는 현대에는, 서울역에 ‘그릴’이라는 이름의 식당이 있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서울역 그릴’에서도 이런 뉘앙스로 작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반만 사실이다. ‘그릴’은 애초에 '양식당‘과 비슷한 의미의 일반 명사이고,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즉 서울역에 ’그릴’이라는 상호를 가진 식당이 생겼던 것이 아니라, 서울역에 ’그릴(양식당)‘이 생긴 것이고, 특별한 상호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그릴(양식당)’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서울역에 있는 그릴‘, ’서울역 그릴‘정도로 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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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9. 14. 동아일보 기사,

유엔군이 출입할 수 있는 그릴의 추천을

한국 측에 의뢰했다는 내용의 기사로,

‘그릴’이라는 단어는 일반명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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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6. 14.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에는 1962년 통화개혁 직후 소비가 위축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여기에는 ‘요식가’라고 하여 따로 외식업과 술집을 언급했는데, 그 카테고리를 ① 캬바레와 고급요정, ② 빠, ③ 그릴, ④ 대중식당, ⑤ 삐어 홀, ⑥ 다방, ⑦ 대포집의 7개로 나누고 있다. 즉 당시만 해도 ‘그릴’이라는 단어는 ‘레스토랑’이나 ‘경양식’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더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릴’은 서울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고, 서울역, 부산역, 대구역 등 큰 역에 존재했으며, 특급열차와 새마을 열차 같은 고급의 열차에 있는 양식당도 ‘그릴’이라고 불렀다.

 

이 전통은 생각보다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예컨대 1970. 6. 13. 경향신문 기사에 보면 ‘경양식그릴’이라는 말을 ‘레스토랑’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했다. ‘청탑 그릴 경양식’, 노량진의 ‘이젠 그릴’, 충무로 ‘미장 그릴’ 등의 식당도 있었다. 대개는 경양식집보다는 좀 더 높은 급이나 ‘고급 레스토랑’보다는 조금 낮은 급의 식당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고급 그릴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말도 충분히 통용되었다. 90년대만 해도 호텔마다 ‘그릴’이라는 이름의 식당이 있었고, 예컨대 하얏트호텔의 양식 뷔페 이름은 ‘파리스 그릴’, 르네상스 호텔의 스테이크집은 ‘노블리스 그릴’, 리츠칼튼 호텔의 양식당은 ‘세자르 그릴’이었다.

 

이렇듯 ‘그릴’은 고유명사(상호)가 아닌 일반명사였지만, 이 단어가 널리 알려진 것에 서울역 그릴이 이바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서울역 그릴의 역사가 한국의 근현대사

 

서울역 그릴의 역사를 보면 한국의 근현대사가 보인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는 흔히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은 시절‘)’라고 부르는 시기로, 비록 식민지 경제에 기초하기는 했으나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대가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물론 이 경제 발전은 석탄과 석유의 사용과 연관이 있으니, 굳이 땅속에 있는 탄소를 끄집어내어 지구 온난화를 야기한 시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의 성장은 주춤했으나, 승전국인 일본은 더 높은 경제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고, 식민지인 조선도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1910년 후반부터의 풍요로 인해 ‘모던 보이’로 상징되는 서구 문화의 유입이 급격히 이루어졌고, 기차 여행도 유행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풍요의 중심이었던 1925년에 서울역사가 건립되고 ‘그릴’도 생겨난 것이다.

 

이 경제적 풍요 또는 거품은 1931년 금본위제 포기, 만주국 수립으로 절정을 찍었으나, 그 아래 경제 기반의 문제와 모순, 극심해지는 빈부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0년대 중반부터는 권위주의 정권이 필요해졌고 이후 모두 아는 대로의 파멸을 향해 가게 된다.

 

광복과 6.25전쟁 이후에도 ‘그릴’은 존속했다. 과거 존재했던 양식당들 태반이 폐업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고, 연회장 등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한 1960년대가 되면 다시 상류층의 문화가 생겨나는데, 캬바레와 요정, 빠, 그릴, 비어 홀 등의 인기, 그리고 재개된 여행 인기와 더불어 서울역의 ‘그릴’도 다시 인기를 끈다. 박정희는 5.16 이후 이러한 풍조를 ‘사치, 낭비’라고 전략적으로 배격했고, 5.16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했던 화폐개혁으로 이러한 문화는 일시적으로나마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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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6. 12. 조선일보 기사. ‘허영과 사치를 일소하며’,

‘퇴폐한 국민도의를 재건하여’ 등의 표현이 보인다.

 

이렇듯 박정희는 검소를 기치로 정권을 잡았으나, 이후 군사정권의 문제 중 하나가 대두된다. 바로 부정부패이다. 서울역 그릴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71년, 서울역 그릴에는 꽤 큰 스캔들이 발생한다. ‘그릴’의 지배인이 150만 원을 횡령하고 250만 원을 철도청 간부들에게 상납하여 업무상 횡령으로 처벌받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생각보다 꽤 큰 스캔들이 되는데, 횡령액의 두 배 가까운 돈을 상납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를 모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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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1. 12. 매일경제 기사

 

이를 계기로 ‘그릴’의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서울역 그릴의 적자 폭보다 많은 외상값, 미수금이 발생하고 있었고 이 대부분이 철도청 및 국가 기관의 간부들이 갚지 않는 외상값임이 드러난 것이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외상값이 650만 원에 달했고, 그중 철도청 간부들의 외상값이 450만 원이었다. 다시 말해 ‘높으신 분’들은 ‘그릴’에서 공짜로 먹고 마셨던 것이고, 상납금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부정부패와 방만한 영업으로 ‘그릴’은 만성 적자에 시달렸으나, 독재정권은 이득을 거둘 수 있는 식당의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설령 적자를 보더라도, 품위 있는 식당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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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울역 그릴 광고.

광고 주제에 무려 ‘철도청 공고 제120호’라는 제호를 달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시대가 지나고 80년대가 왔다. 비슷한 군사정권 같지만 70년대와 80년대는 전혀 달랐다. 우선 역사상 최대 호황에 따라 중산층이 생겨나고 ‘서구적인 것’이 일반화되었으며, 그전까지 사치와 향락이라 부르던 문화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4공화국이 국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했다면, 5공화국부터는 민간과 기업의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국가는 기업 하나쯤 얼마든지 조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행동의 주체는 이미 기업이 되어 있었고, 민영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물론 그 혜택을 받은 기업들은 대부분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업들이다.

 

방만한 경영과 공무원들의 나눠 먹기, 부정부패로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서울역 그릴 역시 민영화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5공의 실세, 전두환 정권 최초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서정화의 사위인 김승연이 운영하던 주식회사 한국화약(현재의 한화그룹)이 ‘플라자 호텔’의 명의로 8억 원에 ‘그릴’을 인수한다. 단순히 ‘서울역 그릴’만 인수한 것이 아니라, 새마을호, 특급열차, 서울역, 부산역 등 철도청이 관리하던 양식당 전체를 인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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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 운영 시절, 80년대의 서울역 그릴.

‘그릴’을 둘러싼 부정부패는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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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약이 운영하던 시절 열차 식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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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롯데 등에 미치지 못했던 한국화약이

‘그릴’의 운영을 바탕으로

영등포역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 만한

재벌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기사다.

1986. 7. 1. 동아일보 기사.

 

당시 기사를 보면, 1983년 ‘그릴’과 열차 식당의 비프스테이크가 원래 5천 원에서 민영화 후 7천 원~8천 원으로, 정식은 1만 3천 원으로, 함박스테이크가 2천 5백 원에서 3천 원으로, 커피가 250원에서 4백 원으로 올랐다고 한다. 현재 비슷한 위상의 식당 커피 값이 7,000원 내외임을 고려하면, 대략 15~20배 정도 체감 물가가 올랐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즉 열차 식당에서 현재 기준 10만 원이 넘는 비프스테이크, 20만 원 정도의 정식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차 운영권을 바탕으로 한국화약은 한층 성장할 수 있었고, 1988년 서울역 민자역사를 준공하고 ‘갤러리아 백화점 서울역점’까지 유치하지만, 너무 비싼 가격 등으로 열차 식당은 생각만큼 인기를 끌지 못했다. 부산역, 동대구역 등 그릴의 적자는 더욱 심각했고, 고비용 구조와 높은 인건비를 극복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서울역을 비롯한 역사들에 백화점, 패스트푸드점 등이 들어왔는데,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 패스트푸드에 밀려 적자가 심각해졌다. 이에 93년, 서울역 그릴은 70년간 지켜 왔던 2층 자리를 포기하고 3층으로 옮겼고, 주로 연회장 등의 역할을 하다 IMF와 함께 97년경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70년 만에 없어진 ‘그릴’이 다시 등장한 것은 약 14년 후인 2011년의 일이다. 서울역 신역사를 지으면서 서울역 구 역사는 ‘문화역서울 284’로 일종의 박물관이 되었다. 그리고 한화그룹으로 이름을 바꾼 한국화약(정확히는 ‘한화 역사 주식회사’이다)은 서울역 신역사의 관리를 맡게 되는데, 신역사의 양식당 이름으로 ‘그릴’이라는 이름을 되살린다.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게 된 것이지만 지배인, 주방장 등 어떤 공통점이나 연결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맛의 연결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해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2011년부터 10여 년 간 운영하던 ‘그릴’은 코로나 불황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1년 11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중단한다. 1925년부터 이어져 오던 그릴은 실제로는 플라자호텔로 영업권이 넘어갔던 1983년 명맥이 끊겼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1997년이 마지막이라 볼 수도 있어서, ‘93년 만에 폐업’이라는 말은 조금 쑥스럽다. 그럼에도, 설령 이름뿐만이라 하더라도 100년 가까이 이름이 이어져 온 전통의 가게가 폐업한다는 것은 어딘가 쓸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변화가 빠르고 변화에 민감한 점 때문에 이만큼 발전한 것이 한국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번번이 배신당하는 경험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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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직후 ‘그릴’의 사진

 

서울역 그릴 돈까스 리뷰

 

불가사리가 아내, 아이들을 데리고 ‘그릴’을 찾은 것은 아직은 폐업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던,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폐업이 거의 예정된 것으로 보였던 11월 20일 저녁이었다. 폐업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찾았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때 가지 않았다면 참으로 아쉬울 뻔했다. 과거 ‘그릴’이 돈까스 전문점도 아니었고, 과거 ‘그릴’의 맛과 큰 연관이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정통일 것만 같은 기분으로 ‘그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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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 앞에는 예전에 자주 보던 초로 만든 음식 모형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어릴 때 저런 모형을 참 좋아했던 것 같은데, 불가사리의 아이도 초 모형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내부의 모습은 큰 샹들리에가 있고 전통적인 느낌을 주려 노력한 것 같지만, 위치 자체가 신역사 한복판 다른 의류점들 주변에 있다 보니 그리 전통적인 느낌이 들진 않았다. 다만 창으로 보이는 서울역 주변의 야경은 꽤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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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 내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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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 메뉴

 

메뉴에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것은 스테이크였고, 5만 원 내외의 가격이었다. 돈까스 등은 서브 메뉴처럼 보였다. 그리고 야채수프와 스파게티, 볶음밥 등 메뉴의 절반 이상이 주문되지 않았다. 또 메뉴에는 주문 가능하다고 쓰여 있는 스테이크 주문을 하니 스테이크는 되지 않는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폐업을 앞두어서 메뉴를 정리했던 것 같다. 분위기는 어딘가 어수선했고, 얼마 되지 않는 손님들은 시끄러웠으며, 공간 자체가 흡음이 잘 안 되고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직원들은 주문에 열심인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데려온 상황을 잘 대처해주지 못해서 답답하기도 했다.

 

어쨌든 불가사리는 돈까스, 아내는 정식, 아이들은 볶음밥을 주문했다. 돈까스의 맛은 어떨까? BDM(Bulgasari Don-ggassu Method)을 이용하여 맛을 분석해 보았다.

 

1. 수프와 가니시(곁들여 나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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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는 제대로 된 맛이다. 늘 먹던 오뚜기와는 아무런 연관 없는, 추억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맛. 밀가루 루(ROUX)를 버터에 볶아 육수와 우유를 넣어 만든 수프다. 다만 감칠맛을 위한 치킨스톡 등의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우유 맛이 많이 났다. 그래서 전통적인 느낌이다. 가니시는 전통의 ‘가니시 깎기’로 깎은 당근, 옥수수, 콩, 으깬 감자 등이었다. 역시 정성 어린 느낌으로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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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의 돈까스

 

2. 고기의 두께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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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두께는 꽤 두꺼운 편이었다. 기사 식당식의 두 배 이상 되는 두께로, 경양식 스타일보다도 두꺼웠다. 고기가 나쁜 것은 아닌 듯 냄새도 나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었다. 묘하게 균형이 잡힌 느낌.

 

3. 튀김옷과 빵가루,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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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옷과 빵가루 부분에서 조금 실망했는데, 맛이 없다기보다 과거 스타일과는 거의 무관한, 2000년대 이후의 한국식 돈까스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튀김옷과 빵가루 모두 두터웠고, 빵가루는 일본식 빵코를 써서 큼직했고 바삭했다. 잘 튀긴 일본식 돈까스 같았다. 다만 워낙 저녁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폐업 때문인지 기름 냄새는 꽤 많이 나서 살짝 거슬렸다.

 

4. 소스의 맛과 어우러짐

 

소스는 약간 전형적인, 고소한 냄새가 나는 브라운소스였고 단맛과 신맛은 많이 나지 않아서 고소한 느낌을 주었다. 예전 식으로 양송이버섯 등이 들어있었는데 맛에는 큰 영향이 없었지만 반가운 느낌이었다. 기름 냄새가 꽤 나고 튀김옷도 두꺼워서 이런 소스와 함께라면 느끼하기 십상인데, 묘하게 균형이 맞는 느낌이라 클래스는 있다고 느꼈다.

 

총평: 수준급 돈까스, 다만 전통과는 연관이 없는, 2000년대 이후의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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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아내는 비프스테이크, 꼬치, 새우 프라이 등이 나오는 ‘정식’을 시켰는데 이 맛이 더 과거에 먹어본 듯한 맛이었다. 예전에 결혼식에서 먹어본 스테이크와도 비슷했다. 미디엄 정도로 구웠으나 질기지 않고 부드러웠고, 뭔가 추억의 향이 났는데 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록 꽤 시끄럽고 어수선한 경험이었고, 과거의 전통과는 거의 무관한 듯한 돈까스를 맛보게 되어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전통이 주는 힘이 있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딴지에서 돈을 내준 것이기 때문이냐 묻는다면 그 말이 맞다.

 

어쨌든 이제는 이름조차 이어받는 이가 없게 된, 100년 된 가게의 마지막은 쓸쓸했다. 하지만 이 공간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면 그리 쓸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사랑과 이별, 역사와 사건들, 이 공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헤어졌던 사람들,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매 순간 역사가 되었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어딘가에서 ‘서울역 그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이 가게의 마지막을 함께했었다고 이야기해 줄 생각을 했다.

 

"서울역 그릴, 갔던 거 기억나? 아마 안 나겠지. 너는 아무 것도 모르고 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아빠 돈까스 절반을 빼앗아 먹었어. 이 사진에 있는, 우리가 갔던 날 며칠 후에 여기는 문을 닫았단다. 이제는 없어진 곳이지만, 한때는 많은 사람의 꿈과 선망의 대상이었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들의 역사를 썼지.

 

시작이 있으면 끝은 반드시 있고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도 있는 거야. 하지만 기억한다면 그 순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단다. 아빠는 이 날을 지금도 기억하고, 언젠가 너와 헤어질 날까지도 기억할 거야. 아빠와 너도 늘 함께인 것 같지만 잠시일 뿐이고, 언젠가 헤어질 거야. 그렇기에 잠시 함께 있을 수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즐겨야 해. 그리고 이별 후에는 꼭 기억해주렴. 그게 아빠가 아는, 산다는 것의 거의 유일한 의미이고 행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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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그릴, 편히 쉬세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나요.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다음 편은 진짜 옛날 돈까스를 찾아 인천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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