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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오지라퍼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또는 척)’하는 모습은 사회심리학적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이 분석하곤 합니다. 내면의 자존감이 떨어지니 그걸 감추려고 ~체 한다는 말인데 그것도 일리가 있지요. 

 

한편 ~체 하는 사람들처럼 허세인 듯 보이나 실제로 대상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알면서 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오지랖이 넓다' 또는 ‘오지라퍼’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으나 때로는 ‘오지라퍼’도 한국인 고유의 역량일 수도 있습니다. 대화하는 상대방의 지적 권위에 대하여 나도 그만큼 지적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지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럴 때는 소위 진상 고객 레벨과는 좀 다른 깊이 있는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그런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시장에서 손꼽히는 회사로 성장한 어느 회사 연구소의 일화로 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R&D 엔지니어보다 더 전문가인 소비자

 

제품 개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의 업무는 세부적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애초에 개발 프로세스(Process)라고 하는 연구소의 업무 규범 자체가 개별 업무별 성과와 결과를 측정하려고 만들어졌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특정 회로를 설계하는 연구원은 그 회로의 설계도만을 며칠 내에 그려야 하는 태스크(task)가 주어지게 됩니다. 정해진 일정 내에 설계하지 못한다면 다른 후행 태스크에 영향을 주게 되고 전체 프로세스가 밀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자신의 태스크가 지연되는 걸 무엇보다 주의해야 하지요. 

 

그런데 항상 모든 일이 그렇듯 넘어야 할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를 태스크 내에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 문제가 자신과 주변 연구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라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전기제품의 필연적 난제인 열(Thermal)에 대한 문제가 그러합니다. 특정 제품에서 발생하는 열은 제품의 내구도와 연속 사용에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열이 규정 온도 이상으로 발생하면 연구원들은 그 열을 잡기 위하여 협업을 하곤 합니다. 회로 설계에서 발생하는 부품을 재배치 한다거나 저항값을 낮춘다거나, 또는 기구 설계에서는 방열판을 부착한다든가, 외부 노출을 한다든가 하는 식의 협업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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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과정의 한 유형

 

이런 작업을 많이 겪은 엔지니어는 설계 단계에서 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예상을 미리 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일정에 쫓겨 그냥 진행하다 보면 나중에 그렇게 예상했던 문제가 실제 발생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경험 많은 엔지니어가 하는 우려 섞인 지적과 같은 그것을, 어느 날 고객이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필자가 아는 한 엔지니어는 현장(field)에서 나온 고객 컴플레인을 담당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연구소 내에서 맡은 태스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CS(customer satisfaction;고객 만족 또는 customer service;고객 서비스)팀에서 연락이 오더랍니다. 어느 고객의 컴플레인인데 CS팀에서는 고객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여 대응을 못하던 차에 고객이 직접 연구소 담당자로 바꿔달라고 해서 연결해 줬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객의 컴플레인을 처리하는 것이 CS팀 업무일 터인데 그 일이 연구소 연구원에게 전달되는 경우는 원칙적으로 없어야 하겠지요. 나중에 CS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고객이 하는 말이 소위 진상 고객과는 분명히 다르며 연구원들이 들어야 할만한 내용인 듯하더랍니다. 

 

여차저차 그 고객과 연결이 된 연구원은 고객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그 고객의 지적 사항은 내부 팀장의 우려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이지요. 엔지니어는 좀 신기해서 충분히 다 듣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조심스레 물어봤답니다. 그 고객은 10년 차 자영업자라고 하더군요. 10년 차 자영업자신데 도대체 이런 부분의 이야기를 어떻게 아시느냐라고 재차 물었더니 그 고객은 이런 유의 제품에 관심이 많다고 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엔지니어는 등에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나름 학부를 졸업하고 이 바닥 업무 6년 차에 접어드는데 내가 예측하지 못한 기술적 문제를 이 사람은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내가 엔지니어가 맞나?’ 

 

라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일반적 연구소 내부의 문제점을 내포합니다. 연구소에서 비용 절감과 속도를 유지하려고 시행하는 개발 프로세스란 것이 수행하는 연구원의 합리적 생각과 창의적 업무 수행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공학을 전공한 사람 혹은 합리적인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는 태스크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 예상을 할 수 있을 터이지요.

 

그런데 규범적 프로세스가 가로막고, 전임자도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통상 없었다는 이유들을 들어 관성적으로 업무를 하게 됩니다. 위 사례 같은 경우 연구원은, 수행하는 태스크 혹은 개발 프로세스의 문제점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없었고 제품 개발이 끝난 후 이런 일이 생겼던 것이지요. 

 

연구소 현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한국의 극성(?)스러운 고객으로 인해 제품들은 개선되고 있는 점이지요. 모 글로벌 제조업체는 한국에 R&D 센터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서 소비자의 전문적 리뷰(review)들이 매우 활발하게 수집되는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경기도 남부에 많은 글로벌 기업들의 R&D 센터가 설립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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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반도체 장비 회사 램리서치

경기 용인시 연구개발 센터 조감도

출처 - <링크>

 

극한 직업 = 한국 소비자를 둔 엔지니어

 

지금이야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서 이젠 한국이라고 하면 K-Pop, 오징어게임 같은 이야기로 말을 걸어오기도 합니다만, 불과 8년 전에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잘 몰랐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서 한국을 안다고 하는 엔지니어를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그 친구는 전동공구 분야에서 유명한 다국적 기업에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러더군요. 

 

"너도 이 장비를 10시간 연속 사용해 봤냐"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었더니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다른 친구가 대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친구가 이 장비를 설계부터 양산까지 다 진행한 친구인데 한국인 고객 1명이 이 제품의 결함을 찾아서 자기가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친구가 한국이란 나라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중에 저녁 먹으면서 이 친구가 위 일화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했는데 듣고 놀랐습니다. 이 친구가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표하며 기술 사양(spec.)을 여유 있게 설정한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10시간 보장하면 설계 당시부터 12시간 혹은 13시간 정도를 설정하고 설계를 한다고 합니다(사실 이건 한국 엔지니어들도 대부분 그렇지요). 그래야 나중에 신뢰성 테스트를 할 때 쉽게 통과하니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보장한 시간보다 여유 있게 설정된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국 고객이 그걸 여지없이 깨버렸다고 하더군요. 속으로는 ‘설계 오류일 거다’ 하고 고소해하고 있는데 이어진 그 친구 말이 좀 기가 막혔습니다. 

 

전동공구뿐만 아니라 모든 제조품들이 그렇습니다만, 12시간 또는 13시간을 목표로 설계를 한다고 해도 개중에는 10시간 언저리까지만 구동이 되는 제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품질이 균질하다고 해도 그중에는 극히 품질이 떨어지는 일부 제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위 뽑기운(?)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10시간 언저리로 지속되던 제품을 한국인이 구매했던 것입니다. 이 엔지니어가 실제로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이러한 상황을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 전동공구는 사람이 10시간 이상 사용하면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10시간 이상 연속 사용하면 2~3일간 전동공구를 들고 있던 손은 이상 감각을 느낀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무리 매뉴얼에서 10시간 보장한다고 써놨지만 10시간을 채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비에 이러한 결함을 발견하고 나서 한국으로부터 꽤 많은 컴플레인이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 접수되는 걸 확인했었답니다. 급기야 나중에는 매뉴얼에 가급적 ‘보장(guarantee)’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능(available)’이라고 표기했다고 하더군요. 이게 별일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제품 사양을 나타내는 문구 하나하나는 추후 소비자 분쟁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기업들은 이런 부분을 매우 신경 써서 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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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관한 일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차세대 제품을 생산하면서 문구를 조정해 가며 출시를 앞두고 있던 즈음 한국의 경쟁사에서 신제품을 출시했답니다. 그 안에 기재된 매뉴얼을 보니 모조리 ‘보장’이란 단어를 써서 표기했더랍니다. 정말 그런지 벤치 마킹 차원에서 구매해서 사용해 봤더니 정말 10시간을 넘겨 15시간까지 사용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후속 기사에서 산업구조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 이스라엘 엔지니어는 무척 신기하고 어이없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한국인이 제품을 사용하는 패턴이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꼭 좋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압축적인 업무 일정·긴 노동시간과 연관이 있을 터이지요.

 

이것과 유사한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디아블로3가 출시되었을 때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디아블로3를 출시할 때 제작사 측 의견으로 최종 퀘스트(quest)를 깨는데 걸리는 시간이 약 6개월 정도라고 발표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작사 예측과 달리 한국 유저가 6시간만에 모든 퀘스트를 깼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지요. 제작사는 한국 유저들이 고작 6시간만에 모두 깨버리니 아연실색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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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이 현장(field)에서 사용되는 데 있어 그 제품의 단점·허점을 찾아나가는 사람들이 국내에 꽤 많이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느낀 몇 가지 사례로 알 수 있었습니다. 

 

블랙컨슈머 < 한국인 ≤ 화이트컨슈머

 

소위 블랙컨슈머(악성 민원을 고의적, 상습적으로 제기하는 소비자)나 체리피커(업체에서 제공하는 부가 서비스만 사용하고 실제 매출에는 기여하지 않는 사람. 예를 들어 카드사의 각종 할인 제도나 포인트 제도는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실제로 카드로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 사람)와 같이 기업 비즈니스 과정에서 손해를 끼치는 고객을 분류하는 마케팅 용어들을  한국에서는 유독 구별하여 적용하는 게 곤란합니다. 한국에서는 제품을 사용하면서 생긴 불만 사항을 가지고 손해를 입었다고 해서 미국과 유럽처럼 대대적인 손해배상을 요청하는 고객이 많지 않은 게 한 이유이지요.

 

위에 언급한 전동공구를 사용하는데 매뉴얼에서 보장한 10시간 작동을 지키지 못했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지극히 드문 것이 한국 고객의 특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마케팅 담당자들은 서구의 블랙컨슈머 개념을 한국에서는 적용하기가 힘들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지요. 한국 고객들은 블랙컨슈머라기보다는 우리 제품에 대한 우호적 리뷰어라는 것이 대세입니다. 미국처럼 제품 매뉴얼의 특정 부분을 짚고서 ‘이 부분이 충족 안 되니 얼마 얼마를 배상해라’라는 식의 블랙컨슈머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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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링크>

 

2015년도 이후에 글로벌 기업들의 마케팅 정책에서 블랙컨슈머에 대한 이야기보다 화이트 컨슈머에게 더 많은 혜택과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 긍정적 마케팅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실제 최근 5년 동안 블랙컨슈머에 대한 시장 이슈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 터입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이죠.

 

아..한국은 블랙컨슈머보다 ‘진상’이란 말로 대체를 해서 그렇죠? 그런데 실제로 ‘진상’ 고객은 서비스 업계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것이 제조업계  정설입니다. 서비스 업계 진상 고객은 흔히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지만 특정 제품을 사용하는데 이 제품을 사용하면서 생긴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 배상하라는 고객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들리긴 하지만 해외처럼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요(진상을 부리는 고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으로부터 호갱 대우를 받기도 하지요. 이 이야기는 유의미하지만 또 다른 주제이니 차후에 써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의 경제 시스템에서 소비자가 갖고 있는 권리에 대해서 전체적인 시각이나 마인드가 서구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한국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권리 대부분이 고장 난 제품을 무상 수리해 주거나 교체 해달라는 정도의 요구사항입니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무상수리나 교체가 된 고객은 그 제품에 대해서 더 많은 애정과 허점을 발견하여 본사에 건의하는 화이트 컨슈머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을 꿀 빨 수 있는 소비 시장으로 생각하다 최근에는 매우 중요한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답니다. 심지어 이런 징후는 그 잘난(?) 애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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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근 소비 문화 중 하나 '돈쭐'

출처 - <MBC 뉴스>

 

축적의 시간이 형성한 K-

 

한국에 있는 소비자의 특성에 기반한 이야기를 2편의 글에 적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살아온 삶 속에서 과연 우리가 특별한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그리 많지 않으나 다른 외부의 시각에서 보니 한국인이 많이 다르긴 하더군요. 아마도 이 다름이 오늘 글을 작성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코로나 방역의 우수성과 함께 문화 콘텐츠의 우수성을 체감하는 최근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덕분에 해외 엔지니어랑 이야기할 때 "너네는 이런 거 못하지?"라고 놀리거나 "한국인은 정말 특이해!"라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K-Drama, K-Pop뿐만 아니라, 한국식 자본주의(K-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K-시리즈들은 앞으로 5년 동안 쉽게 망가질 것들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날의 K-시리즈들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라 수십 년의 오랜시간 축적된 산물이기 때문이지요. 

 

K-고객은 K-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일부이지요. 고객을 화두로 한 이야기뿐 아니라 연구원과  회사를 화두로 한 이야기까지 한국의 자본주의에 관하여 계속 글을 이어나가보겠습니다.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