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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책을 내게 된 빵꾼입니다.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옮겨가려고 발악하는 중이죠. 새로운 책은 복지라는 틀로 조선을 바라본 이야기입니다. 기사로나마 살짝 소개합니다.

 

시곗바늘을 1392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는 즉위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성계 즉위식.jpg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챙기는 일은 왕의 정치로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히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줘야 할 것이다.”

 

환과고독은 독신 남성, 독신 여성, 유기아, 독거노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가장 취약한 사회계층으로 꼽혔던 사람들이죠. 이는 곧 ‘복지’를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 중 하나로 삼겠다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환과고독, 그들 각각의 상황에 맞는 정책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요? 현대의 복지 정책 분야처럼 아동복지, 노인복지, 여성 복지, 장애인 복지, 그리고 특수 계급이었던 노비 복지까지 다섯 개 영역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디벼봅니다.

 

 

 

 

장애인 복지

 

조선에 살던 사람들에게 장애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장애인이 일말의 사회적 차별도 받지 않고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조선 사회에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있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거나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도 강했습니다. 사료에서는 환과고독과 함께 잔질, 폐질, 독질(질병이 있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논의가 자주 발견됩니다. 장애인이 적절한 보호를 받으며 살아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도 도입되죠. 

 

장애인.jpg

 

1. 직접 지원책

 

우선 급한 것은 직접 지원책이었습니다. 재난 발생 시에는 재난지원금을, 생계가 곤란해졌을 때는 생계지원금을 지급했죠. 주거 지원 정책도 있었습니다. 주거지가 없는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을 구호하기 위해 명통시(明通寺)를 설치하고, 청각장애인이나 신체장애인을 위해 활인원(活人院)을 운영했죠. 이러한 기관들에 공적 기금을 투입하여 지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부 기관은 연속성 있게 유지되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장애인을 위한 보다 직접적인 복지 정책은 군역 면제였습니다. 이 역시 법률로 정한 정책입니다.

 

-중증환자, 간질환자, 시각장애인, 손가락 두 개를 잃은 장애인, 지적 장애인, 난쟁이, 꼽추 등은 모두 군역을 면제한다.

 

-장애를 겪는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는 아들 중 1명을 역에서 면제한다. 장애를 겪는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는 모든 아들을 역에서 면제한다. (1485년 시행, 1786년 개정)

 

『대전통편(大典通編)』 「면역(免役)」

 

군 복무가 괴로운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조선에서는 비록 직접 군에 복무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세금은 모두가 내야 했죠. 이러한 부담을 덜어주는 군역 면제는 상당한 특혜였는데, 장애인에 대한 면역 혜택을 법률로 정함으로써 국가가 이들을 어느 정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또한 장애인에게는 보호자 내지는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여, 비록 제한적이지만 이들을 모시는 자녀들에게도 군역을 면제해주었죠.

 

2. 특성화 직업

 

무엇보다 의미 있는 정책은, 일부 장애인의 사회 진출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일종의 ‘특성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먼저 점치는 일, 이른바 ‘점복업(占卜業)’에 종사했죠. 시각장애인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순수하고 신묘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 멸망 후에도 짙게 남았는데요. 1960~1970년대까지도 시각장애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점을 봐주는 풍습이 남아 있었습니다.

 

점을 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제한적이나마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습니다. 명과학(命課學)이라는 분과를 통해 풍수지리와 역학(易學) 전문가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했는데, 이는 시각장애인이 주로 진출하는 전문직이기도 했습니다. 제도상으로는 종6품까지 오를 수 있는, 꽤 괜찮은 직렬이었죠.

 

독경업(讀經業)에도 종사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조정이 설치한 기관, 명통시 소속의 장애인들은 경문(經文)이나 축문(祝文)을 외우는 ‘스페셜리스트’들이었습니다. 민간에서는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 닥쳤을 때 이들을 불러 경문을 외우게 하고 대금을 지불하는 풍습이 있었지요. 

 

판수독경.jpg

조선 말 풍속 화가 김준근의 '판수 독경하는 모양'.

그림에서 시각장애인이 독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왕가에서도 기우제를 지낼 때 명통시의 시각장애인들을 초빙하고 포상을 지급했습니다. 일부 시각장애인은 조선의 국립교향악단 장악원(掌樂院)에 들어가 연주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세종 시기에는 시각장애인 연주자만 18명을 뽑았지요.

 

3. 일반적인 관직 진출의 기회도 열려있었다

 

또한 조선에서는 장애인이 특수한 직렬이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직무를 수행할 능력만으로 선발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꼽추였던 허조(許稠, 1369~1440), 뇌전증으로 고생했던 권균(權鈞, 1464~1526), 왜소증에 히키코모리였던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지체 장애인 심희수(沈喜壽, 1548~1622), 척추 장애로 고생한 김재로(金在魯, 1682~1759) 등은 고위 공무원으로서 공무를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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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기틀을 다진 명정승 허조. 그는 꼽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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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명재상 중 한 명인 오리 이원익. 

그는 왜소증으로 키가 작아 ‘키작은 재상’이라고도 불렸다.

 

고위 공무원이 아닌 장애인 관료는 더 많습니다. 언어장애가 있던 양성지(梁誠之, 1415~1482), 다리를 저는 지체 장애인 황대중(黃大中, 1551~1597), 청각장애가 있던 이덕수(李德壽, 1673~1744),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람(李覽, ?~?)과 원욱(元彧, ?~?), 네 손가락이 붙어 있던 지체 장애인 권절(權節, 1422~1494) 등은 정승 이하의 관료였습니다. 조선에서 장애인은 국무총리와 장·차관급 인사, 9급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존재했습니다.

 

물론 장애인 인권면에서 부족했던 건 사실입니다.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자신의 일기에서 “나라가 생긴 이래 장애인을 장원으로 뽑았던 적이 없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라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뒤집어보면, 장애인의 급제길이 완전히 막혀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꽉 막힌 사회라고만 생각했던 조선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열려 있던 사회였습니다.

 

 

노비 복지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베개를 베고 잠드는 순간까지 죽어라 일했던 노비. 노비에 대한 처우는 당연 매우 열악했습니다.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 집에서 해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이처럼 노비의 삶의 질은 복지 시스템이 아니라, 어떤 주인을 만나냐에 따라 결정되었죠. 국가는 이들을 위한 복지 시스템을 고민하지 않았고, 양반 계급의 이해타산과 직결되는 문제만 고민했습니다. 

 

공식적인 휴가도 연중 단 하루, 음력 2월 1일뿐이었습니다. 이날은 노동을 쉬며 배불리 먹고 취할 수 있었지만, 이외에는 노비들에게 ‘공식적인 휴가’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노비가 개인적으로 요청하여 주인의 허락을 받거나, 주인이 아량을 베푸는 경우가 아니라면요.

 

1. 노비 복지에 가장 신경 쓴 왕 : 세종

 

한 차례 노비를 위한 복지 정책을 논의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역시 ‘세종 시기’입니다. 관례적으로 여성 노비의 출산휴가는 7일이었는데요. 세종은 여기에 과감히 100일을 덧붙여 총 107일의 휴가를 줍니다.

 

1426년 4월 17일 - 『세종실록(世宗實錄)』

 

“전국 관청에 소속된 여성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 동안 휴가를 주는 규정을 만들도록 하라.”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가 먼저 제안하지도 않았는데, 세종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노비 출산휴가에 대한 법령을 보완하라고 지시하죠.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430년 10월 19일 - 『세종실록(世宗實錄)』

 

“옛날부터 관청의 노비가 아이를 낳을 때는, 출산 후에 반드시 7일간 휴가를 줬다. 아이를 홀로 방치했다가 아이가 해를 입을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이미 100일간의 휴가를 도입한 바 있다. 그러나 출산이 임박한 시기까지 복무하였다가 집에 돌아가는 도중에 아이를 낳는 사례들이 있다. 그러니 출산 1개월 전부터 휴가를 주는 것이 어떤가. 관련 법 제정을 고민하라.”

 

세종은 출산휴가가 도입되었음에도 격무에 시달려 유산하거나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출산하는 사례를 보고, 산전 휴가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적당한 보완 법령을 만들라고 지시하죠.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우리의 킹세종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1434년 4월 26일 - 『세종실록(世宗實錄)』

 

“앞서 전국 관아에 소속된 여성 노비에게 출산 전후 휴가를 주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계속 일을 시키는 바람에 산모의 산후조리를 도울 수 없다. 이는 부부가 서로 도와야 한다는 윤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산모가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례도 있다. 지금부터 여성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에게도 산후 30일의 휴가를 주도록 하라.”

 

세종대왕.jpg

 

후덜덜 후덜덜. 남성 출산휴가는 우리 시대에도 뜨거운 이슈입니다. 아이를 양육할 의지가 있어도 직장 눈치를 보느라 출산휴가를 쓰지 못하는 남성들이 수두룩하죠. 이러한 비공식적인 제재는 ‘독박육아’라는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세종은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 방치되어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산모들의 사례를 보고받습니다. 그래서 남성 노비에게도 산후 30일간 휴가를 주도록 하죠. 이 법령이 가장 파격적인 조치로 보이죠?

 

세 법령은 4년 터울로 발효되었습니다. 첫 번째 법령을 제정한 뒤, 그 법령의 시행 효과와 부족한 점을 꾸준히 확인하여 보완해나갔다는 것입니다. 이 법령을 논의한 다른 사료는 보이지 않는데요. 이는 곧 이러한 법령들이 오직 세종의 의지로 관철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이토록 출산휴가 제도를 밀어붙였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적인 공감입니다. 세종은 노비에 대한 처벌을 규제하면서 “노비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다. 그런데 어찌 제멋대로 체벌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단 말인가!”라고 호통한 바 있습니다. 그처럼 세종은 비록 천한 신분일지언정 노비 역시도 사람임을 인정하는 왕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효율적인 재생산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공노비든 사노비든, 노비의 재생산은 곧 부의 재생산과 관련됩니다. 양반 집안에서도 아이와 산모의 사망률이 매우 높은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적절한 조처를 하지 못해 아이와 산모가 죽는다면 큰 손해라고 할 수 있죠. 세종은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정책의 효과를 세심하게 관찰했고, 이것이 노비뿐 아니라 국가와 민간의 재생산과도 관련 있음을 통찰했던 것 같습니다.

 

2. 세종의 노비 복지 개혁, 후대에도 지속됐을까 

 

그렇다면 이 조항은 후대의 법조문에서도 살아남았을까요? 약간 절충하여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남았습니다.

 

-전국 관청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여성 노비에게는 출산 전 1개월, 출산 후 50일의 휴가를 준다. 또한 그 남편에게는 출산 후 15일의 휴가를 준다. (1786년 제정)

 

『대전통편(大典通編)』 「공천(公賤)」

 

세종이 이야기했던 바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조선 후기의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공노비 산모에게 산전 1개월과 산후 50일, 남편에게는 산후 15일의 휴가를 준다는 조항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까지도 이 법령이 살아 있었다는 의미겠죠. 실제 시행 여부를 확인할 기록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지켜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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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함경남도 문천군 관노비 모습. 

 

그러나 이 법령은 사노비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재산의 재생산과 직결되는 만큼, 양반은 노비의 산후조리를 힘써 배려했습니다. 산모가 따뜻한 방에서 출산할 수 있게 했으며, 출산 후에 아이와 산모 모두에게 직접 약을 지어줬다는 기록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턱없이 부족하지만, 19세기 일기에선 출산한 여성 노비가 15일간의 휴가를 받았다는 기록도 여럿 발견됩니다.

 

그러나 산전 휴가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默齋日記)』에서는, 만삭의 몸으로 무리하게 노동하다가 유산하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사례가 종종 발견됩니다. 

 

세종이 출산 전 휴가제도를 도입하게 된 배경과 같은 사례죠. 심지어 만삭의 몸으로 심한 체벌을 받고 그 충격으로 양수가 터져 조산을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남편을 위한 출산휴가는 당연히 찾아볼 수도 없고요.

 

조선의 법전에서 노비와 관계되는 조항은 주로 범죄와 소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범죄를 저질렀을 시 노비로 만드는 처벌 조항, 노비의 소유권과 관계된 판결 조항 및 판례들을 굉장히 꼼꼼하고 상세하게 정리해놓았죠. 조선의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문제는 노비의 삶의 질이 아니었습니다. 체제 유지 수단으로서의 노비 통제 방법과 부의 재생산과 관련된 노비 소유 문제였죠.

 

그렇지만 세종의 선견지명만큼은 분명히 울림을 줍니다. 매우 제한적인 법 조항이었고 실제로 폭넓게 적용되지도 않았지만,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도 세종은 지속적으로 정책을 보완해나갔죠. 

 

킹세종2.PNG

 

출산휴가가 기업의 생산성을 저해한다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한 지금, 출산휴가가 곧 권고사직과 동의어로 쓰이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남편의 출산휴가는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 정도가 아니면 아직도 받을 길이 요원하죠. 이토록 복지 제도가 세밀해진 시대에도, 여전히 500년 전 임금의 말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모두의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조선은 취약계층을 위해 꽤 애썼던 사회였다

 

실록에 기록된 환과고독 지원 정책의 집행 사례는 약 80여 건입니다. 시대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시스템이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던 조선 초기에는 일시적인 진휼(굶주리거나 질병에 걸린 자, 혹은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자 등을 구제함)에 그쳤습니다. 관계 법령이 정비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복지 체계가 지방 관청 또는 복지 관련 담당 부처로 이관되고 정비되었죠. 그러나 이들에게 지원금을 일상적으로, 꾸준히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구휼이나 환곡, 면세 정책이 집행될 때마다 최우선 순위로 선정하여 혜택을 주는 쪽으로 집행됩니다. 직접 지원 정책은 여전히 일시적인 정치 이벤트였으며, 그마저도 주로 서울 사람들만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은 휼전(恤典)이라 하는, 재난지원금이나 사망위로금을 최우선 순위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재지변으로 집을 잃거나 사망한 사람들, 또는 호랑이나 표범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지원금이 상당히 많이 집행되었는데, 환과고독은 피해 조사가 이루어지고 지원 계획이 수립될 때마다 최우선 지급 대상자가 되었죠. 따라서, 휼전 지급 사례까지를 포함하면, 실제로는 80여 건보다 훨씬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조선사회.PNG

 

이렇듯 비록 덜 체계적이었다 하더라도, 취약 계층에게 사회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충분했고, 그것이 실제 정책에서도 꾸준히 반영되었다는 것이 조선의 복지 정책이 가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사각지대’가 많긴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역 면제 혜택을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들을 위한 지원 정책이 꽤 실효가 있었다는 뜻이겠죠. 

 

무녀나 승려처럼 아주 특수한 신분의 사람만 제외하고 거의 모두를 공동체 안으로 끌어당겨 함께하고자 했던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환과고독을 위한 지원 정책은 조선 사람들이 그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공동체 강요와 획일화라는 부작용 때문에 ‘꼰대’처럼 묘사되어왔지만, 타자화와 혐오가 만연해지고 공동체의 기능이 상실되어가는 요즘에는 도리어 그들이 ‘꼰대’가 아니라 ‘선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조선 복지 정책의 엑기스는 환곡과 진휼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다루지 못하지만,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에서는 진휼과 환곡이 백성의 삶을 어떻게 바꿨는지 그 빛과 그림자를 정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못다 한 이야기는 책으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

 

 

 

참고문헌

 

(1) 박현주·정여주, 「조선시대 구빈정책 분석 - 챔버스의 분석틀을 이용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정책’을 중심으로 -」 (2016), pp. 9-11

(2) 손구하, 「조선시대 시각장애인의 구휼과 직업에 관한 고찰」 (2019), pp. 875-878

(3) 정지영, 「조선시대 ‘독녀(獨女)’의 범주」 (2016), pp. 14-21

(4) 정창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학동네, 2005

(5) 조성린, 『우리나라 복지 발달사』, 조은출판사, 2014

(6) 최원규, 「조선후기 아동구휼에 관한 일 연구 – 정조시 <자휼전칙>을 중심으로 -」 (1988), p. 10.

(7) 홍순석·서은선, 「복지융복합 연구를 위한 인문학의 활용방안 - 세종시대 효행정책과 노인복지 정책을 중심으로 -」 (2018), p. 969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1.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2.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에 이어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은 조선의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며 그 정책들이 백성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사회 단면을 만들었는지를 야무지게 담아놓은 책입니다.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아내고자 시도했습니다.  

 

매번 책 소개를 드리기가 죄송하고 쑥스러워 이번에는 책 발간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딴지 편집부에서 귀신같이 알고 책 관련 원고를 써오라고 협박을 하더군요. 싸움엔 소질이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 최약 계층 지원 정책」 챕터의 이야기 일부를 소개해드리며,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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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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