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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고유한 특성이 있는 한국의 소비자와 그 특성에 대응하는 한국의 연구원들, 그리고 고객과 연구원 사이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 9편으로, 첫 3편은 소비자(고객), 두 번째 3편은 연구원, 마지막 3편은 고객과 연구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자본주의의 줄타기를 하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애초에 국뽕이란 걸 그리 선호하지도 믿지도 않지만 최근 해외에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식이 결국에는 긍정적인 피드백(Feedback)으로 변하는 몇 차례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합니다 

 

필자는 회사에 다닌 기간 중 약 절반은 기업의 R&D 센터에서 개발기획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 업무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기술을 잘 모르는 엔지니어”가 아닐까 합니다. 기술을 모르는 엔지니어라는 것이 좀 이상하고 안 맞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엔지니어, 기술을 잘 아는 엔지니어일수록 해당 기술에만 몰입하는 경향이 있고 조직적으로 그런 걸 강제하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기술기획 업무는 해당 기술의 전문성보다는 그 기술의 선행/후행 기술과의 관계라던가 주변 기술의 트렌드, 기술의 사업성, 기술의 혁신성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R&D 센터 내에서 가장 비전문적이고 주변 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직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품에 적용된 기술을 마케팅 쪽에 설명할 때도 엔지니어의 데이터 기반 단어가 아니라 마케팅에 친숙한 시장 단어를 이용하여 설명한다거나, 엔지니어는 싫어라 하는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각종 회계 업무의 이야기를 회계팀과 이야기합니다. 연구소 생활하던 풍월이 있어 엔지니어와 무슨 뜻인지 모를 데이터를 보고 한두 시간 이야기할 정도의 지식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 내 연구소의 위치라던가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문제, 시장의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업무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일을 하다 보니 오늘 하려는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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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을 읽지 않는 한국인은 세상을 바꾼다  

 

약 5년 전, 해외 연구과제로 알게 된 네덜란드 엔지니어와 대화하던 중 나온 이야기였습니다. 필립스에서 필자와 유사한 일을 하던 엔지니어였는데 그 친구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은 매우 특이하다”였습니다. 말의 핵심은 한국 사람들은 매뉴얼을 안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매뉴얼에는 제품 사용에 대한 가이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지키지 않고 사용한다고 합니다. 제품개발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자사 제품의 기술적 사양(spec.)을 매뉴얼에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 놓습니다. 그래야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들이 제품을 제대로 사용할 터이지요. 당시에 그 엔지니어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 성격이 급해서 그래”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 엔지니어의 의견은 한국인의 그런 급한 성격으로 인해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게 중요한 주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말은 그렇게 매뉴얼을 보지 않고 사용하는 고객으로 인해 자사 제품의 새로운 영감이나 완성도를 얻게 된다는 것이었지요. 

 

실례(實例)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의 몇몇 고객에게서 자사 제품에 대한 똑같은 컴플레인이 왔답니다. 그것도 제품 출시 후 거의 비슷한 시점에 말이죠. 처음에는 자사 제품의 결함인 줄 알았는데 세밀하게 살펴보니 자사 제품의 결함이 아니고, 그 고객들 모두 매뉴얼을 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매뉴얼에는 4시간 이상 연속 사용금지라고 적어 두었는데 한국 고객 모두 4시간 이상, 5시간 이상 사용한다는 것이 공통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고객들에 대한 욕을 하고 말았는데, 약 6개월 뒤 연구소에 전달된 기술 사양 개선 사항에 연속 8시간 사용 보장이란 부분이 포함되더랍니다. 연구소 입장에서는 특정 기기를 4시간 사용하는 것과 8시간 사용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내부 부품의 내구성과 기술 사양이 완전히 달라지는 사항이라 심각한 설계 변경이 필요한 큰 업무입니다.

 

그 때문에 극렬히 반대했는데 전사적 지시사항이니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제품의 사양이 변경되고 나서 해당 기기는 시장에서 점유율이 상승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는 그 후 몇 차례 더 있었습니다. 손잡이 부분에 있는 스위치가 끄고 켜는 데 불편하다, 전선의 경직도가 강해 복잡한 작업장에서는 다른 작업에 방해가 된다, 액세서리가 어느 부분에 부착이 되어야 작업할 때 편하다 등등.. 정말 컴플레인의 수와 강도가 다른 국가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자사 제품의 완성도가 더해져 시장 1위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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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 엔지니어의 의견에 따르면 한국 고객들은 단순한 제품의 컴플레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실제 현장의 목소리를 제시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 고객의 컴플레인으로 인해 제품 개발 단계 막바지의 제품을 중간부터 다시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구소의 제품 개발프로세스 상에서 개발단계 막바지에 제품을 중간부터 수정하고 다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CEO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항인데 그렇게 해서 신제품을 개발한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그래야 시장에서 잘 팔려서 말이지요..

 

한국은 엔지니어도 좀 이상하다?  

 

위의 사례는 단순히 해외 제조업에 있는 연구원이 한국 고객으로 인해 얻게 된 기술적인 팁(Tip)과 제품 완성도에 대한 영감입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어느 마케터가 비슷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관점에서는 ‘매뉴얼 없이 제품을 사용해야 제대로 된 제품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이는 가전과 같은 일상적 공산품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산업용 계측기기라던가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지극히 섬세한 제품은 좀 다르다고 봤습니다. 당연히 최상의 결과물이 나오려면 매뉴얼에 적힌 대로 해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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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의 산업용·전문가용 제품 구매자는 이미 그 최상의 결과물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기기를 이용하여 성과물을 만들어내는 단계가 5단계가 있다고 하면 한국 고객들은 이미 2~ 3단계를 건너뛰어서 최상의 성과물을 내는 데 매우 익숙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매뉴얼에는 1단계부터 5단계까지 해야 최상의 성과물을 낸다고 적어놔도 한국의 고객들은 이미 기기를 사용하는 시점에 1단계와 3단계 어디쯤은 건너뛰어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결과물이 예상한 수치가 달라도 그 수치를 경험적으로 보완할 만한 경험적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런 분야는 금형과 사출 쪽에 많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특정 재료(Resin)를 가열하여 녹이는데 매뉴얼에 따라 지켜야하는 순서를 지키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며 그게 또 나름 산업에서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실제 이런 방식으로 제조하시는 분들을 모셔다가 세미나 하는 해외 제조업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매뉴얼을 수정하지요. 아니, 제품을 수정/설계 변경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엔지니어의 의견을 자신들의 제품에 적용하여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뼈아픈 한국 노동 현실이 녹아 있지만 아무튼 한국 고객들이,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대단히 이상한(?)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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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비디오빌리지(링크)>

 

K-고객에게 단련된 한국 산업의 맷집

 

이런 제품의 경쟁력이 해외 제조업체에만 해당할까요? 한국 고객이 해외 제품에만 이런 컴플레인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한국 제품에는 더 많이, 더 강한 컴플레인을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아요? 국내 모 제품 A/S 센터에서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내가 이 제품을 얼마 주고 샀는데…”로 시작하는 소비자가 겪은 불편과 불만 토로이지요.

 

그리고 그 A/S 과정에서 소비자의 승전보를 자랑스럽게 “후기”라는 이름으로 게시판에 올리지요. 그걸 비난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제품의 완성도는 한국 제조업이 가지는 일종의 특혜(?)일 터이니 말입니다. 연구원들이야 죽어나든 말든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가 운영되건 말건 그 혜택들은 한국사회의 시민들이 받게 됩니다. 동시에 그렇게 해서 발전한 산물들은 각 산업에 온전히 뿌리내립니다. 일반 공산품 영역에서 한국 부품이 갖는 경쟁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최근 10년간 그 경쟁력이 중국의 낮은 가격에 밀려 많이 쇠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차례로 한국과 중국 제품을 모두 사용한 기업들이 한차례 중국 제품에 관한 컴플레인의 홍수를 맛본 뒤에 한국 부품의 우수성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제품의 완성도와 내구성의 근본은 제품에 포함된 부품에서 시작하지요. 부품의 안정성과 내구성이 담보되어야만 제품의 안정성과 내구성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부품의 안정성과 내구성은 1~2년 사이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산업 가치 사슬(value chain) 내에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업을 해야만 완성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중소기업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노고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부럽게 바라봤던 독일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2015년 이후 한국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기업의 이익 독점만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산업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후 글에서 좀 더 다루어 보겠습니다.

 

<계속>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