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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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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대선이 끝난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김어준 총수처럼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아서인가, 그릇이 크지 않아서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우울하다. 포기하든가 받아들이든가, 뭐든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나로선 그게 영 잘 안된다. 매사에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나에겐 정말 위로가 필요했다. 괜찮다고, 지금은 속상하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누구든 나를 다독여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날 대체 누가 그럴 수 있었을까. 각자가 느낀 감정의 크기가 너무 커 타인을 다독일만한 마음의 여유, 누구에게도 없었을 것이다.

 

밤을 새다시피 개표방송에 몰두했던 나는, 아침 식탁에 앉은 아이들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도망치듯 회사로 나와 책상에 앉아 하루를 흘려보냈다.

 

큰일을 하려면, 감정의 기복 따위에 영향받으면 안 된다. 묵묵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메마르고 드라이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아부지는 내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 했다. 사내 자식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고작 내면의 감정 기복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얼른 평상시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다른 때보다 더한 우울감

 

이 우울감이 이렇게 오래가는 이유가 뭘까. 이 우울감의 본질은 뭐고,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선거에서 졌다는 것,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기고 지는 것이야 늘 있는 일 아니었던가. 열 받고 안타깝고 애석하고 속상하고... 뭐라 말이 안 나온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선거든 야바위든, 100미터 달리기든, 언제 시원하게 이겨본 적 있었던가(아, 질병 보유 갯수로는 강한 편일지도...).

 

1987년, 고등학생이었던 난, 사람들이 피 흘리며 쟁취한 대통령 직접선거의 과실을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정당하게’ 노태우가 가져가는 꼴을 보았다. 뭐, 이런 일이 있나, 어린 마음에 무쟈게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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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싫어...! 하니까,

응. 반사~ 하는 것 같은 기분의 노태우

 

1992년 대학생이었던 난, 정권 교체를 바라는 온 국민의 열망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논리로 여당과 합당해 버리는 제1야당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꼼수가 성공하여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도 똑똑히 목격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거리로 뛰어나가 봤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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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하니까,

응. 대도무문 반사~ 하는 것 같은 기분의 김영삼

 

2012년 사회인이었던 난, 노무현 대통령을 눈물로 떠나보내고 나서도 기어이 그를 조롱하던 손을 들어주던 대선도 보았다. 당시 거리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반 이상이 그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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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선

거의 무지개 반사급 충격이었던 결과...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고 했던가? 알고 보니 그 말은 우리에게 하는 얘기였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도, 억울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일도, 한번 결정되면 끝인 거다. 징징거리지 말고 닥치고 받아들이라는 얘기다. 그것이 모두가 약속한 가장 근본적인 룰이고 현실이니까. 

 

그러다가 다시 선거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달라져야 한다고 핏대를 올렸다. 뭔가 달라질 것도 같았다. 그리고 다시 벽에 부딪친 바쁜 벌꿀이 되어야 했다. 

 

이번에도 여태껏 숱하게 겪어온 여러 번의 선거처럼 화나고 답답하고 속상한 선거 결과를 받았을 뿐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숱하게 봐왔던 장면이 다시 반복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우울함이 오래 지속되는 것 같다. 이전에는 며칠 지나면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일도 하고, 뉴스를 보며 욕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을 살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직도 뉴스를 보지 않고 (아니, 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지내고 있다. 그저 커뮤니티 같은 곳을 통해 간간이 세상 소식을 접할 뿐이다.

 

 

납득되지 않았던 여론조사와 결과 

 

예전과 달리 오래 지속되는 이 우울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결과를 무작정 낙관했던 ‘근거 없는 자신감’에 대한 반작용일까. 

 

이번 선거는 다들 예측할 수 없는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여론조사 결과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탄식할 때도, 나는 믿지 않았다. 더 나아가, 비웃었다. 지지율의 등락을 말하기 이전에 그 지지율의 근거인 여론조사 자체를 아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여론조사를 반박할 어떤 과학적 근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조사된 것 같은 여론조사 결과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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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해가 안 간다... 

 

진짜 여론이 여론 조사에 반영되지 않거나 사람들이 아직 각 후보에 대해 잘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이 안다면 이런 결과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납득이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여론조사 결과와 분석에도 뚜껑을 열어보면 진짜 결과는 분명 전혀 다를 것이라 혼자 확신했다. 그게 상식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근거도 없는 낙관에 일말의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컨텐츠를 다루는 계층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성향에 따라 영상, 오디오, 텍스트 소비 계층이 의외로 겹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치열한 접전이 될 줄 알았다면,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선거를 앞두고 50대 아저씨가 느끼는 이번 대선에 대해 한 편 써보면 어떻겠냐 권했을 때, 나 따위가 뭘... 하지 말고 짧은 글이라도 한 줄 보탤 걸, 그랬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까 하는 후회가 이제서야 소심한 가슴에 남는다. 글 꽤나 읽는 사람들에겐 페이스북 같은 데서 딴지일보가 잘 퍼지니, 그러면 우리가 갈지 못한 다른 '밭'에서 50대에게 한 표라도 더 끌고오지 않았을까... 나 따위라도 좀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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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시즌의 딴지일보 SNS 

 

그날 혼자 책상에 앉아 다리를 연신 흔들며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그 순간에도, 난,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당연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정의라는 것,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이제는 통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한 맺힌 우리 역사를 공감하고 지금이라도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놀라고 당황한 나에게 무엇보다도 이 상황을 이해하게 도와줄 해설이 필요했다. 그날 그 순간, 받아들여야만 할 결과 말고는 내가 얻을 수 있는 해설은 없었다. 다들 나처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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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우울감의 정체

 

제일 힘들었던 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우리는 여덟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선거를 거듭하며 이슈가 점점 다양해지고 또 복잡해져 간다. 수많은 목소리와 요구가 쏟아지고 그것을 조율하며 세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과 같은 사회의 틀에 초점을 두었던 선거 구호는 이제 ‘사람이 먼저다’, ‘나를 위해’와 같이 개인의 삶으로 그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민주화’라는 담론은 대다수 사람이 동의하고 합의할 수 있는 큰 틀의 이야기였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다. 

 

다만 한 가지, ‘지역갈등’이라는 이슈는 아직 사람들의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뿌리를 알 수 없는 동쪽과 서쪽의 격렬한 대립과 갈등은 언제나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두 망국적 지역갈등을 해소하자고 호소했지만, 말뿐인 듯했다. 지역 갈등은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오히려 철밥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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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전일보> 링크

 

지역갈등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제 새로운 이슈와 갈등이 그 위를 덮쳐 우리 사회를 가른다. 남성과 여성은 대립하고,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는 서로를 무시하고 미워한다. 계층의 갈등은 너무도 깊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서로 보완하고 협력해야 할 처지인 사람들은 마치 좁은 닭장에 갇힌 닭들처럼 서로를 부정하고 쪼아댄다. 

 

왜 그럴까. 이 근본 없는 미움은 어디에서부터 생긴 것일까. 

 

결국 다들 힘들기 때문이다. 삶은 고단하고, 살아가기엔 너무 작은 자원, 너무 적은 기회만 주어지기에, 심지어 그 눈곱만한 기회와 자원도, 나에겐 남들보다 훨씬 더 조금 돌아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별에 따라, 소득에 따라, 혹은 세대에 따라 불공정하다고 느껴왔던 자원과 기회, 나아가 과실의 배분에 대한 불만들이 이제서야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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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서울신문(링크)

 

 

어쩌면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소망했던 민주화를 어렵게 이만큼이나마 이루었기에,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와 또 다른 그늘을 살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큰 틀에서 보면 개개인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공정한 자원의 배분을 논하는 건전한 진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음엔 틀림없다.

 

하지만 누가 내게 사회가 앞으로 나아간 만큼 개인의 삶이 더 행복해졌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난 예전보다 외로워졌다.

 

나만 그럴까? 어느새 우리는 아주 빠르고 자연스럽게 타인과 나의 다른 점을 찾아내게 되었고 그것을 불편해하고 아주 쉽게 등 돌리고 외면하며 배척해버리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별, 직급, 소득, 나이, 성향 등 반목할 거리는 수없이 많다. 

 

편 가르고 미워하기는 쉽다. 자신이 겪은 혹은 (자신이 겪지도 않고) 전해 들었던 작은 경험을 일반화해서 미워하기는 쉽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니까. 온전히 그들의 존재 탓이니까. 그러니 그 집단 전체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미움을 증폭시킨다. 미움이 커질수록 나의 책임은 가벼워지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행동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미움은 전염성이 강하고 확장속도가 빠르다. 미움이 증폭된 이들이 다수가 될 확률이 훨씬 크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미움과 증오는 커지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움츠러들고 지레 겁을 먹는다.

 

선거의 결과보다 더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결과를 만들어낸 미움과 반목이다.

 

미움의 굴레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 부정적 에너지의 총합이 이런 결과를 낳았고, 아직 해소되지 않은 그 에너지가 앞으로도 한동안 우리 사회를 이리저리 휩쓸고 상처 낼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이 갈등으로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일까? 선거가 끝나고 20일이 넘도록 헤어나지 못하는 우울감의 정체는 그것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얻은 희망 

 

엊그제 출근을 하며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사무실을 함께 쓰는 형님을 마주쳤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그 날따라 그 얼굴이 거기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그 순간, 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보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고, 눈 맞추던 아이들의 눈망울과 습관처럼 쓰다듬던 고양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차에 올라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의 거리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매일 보고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말이다. 

 

선거가 끝났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더 많고, 내 마음처럼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고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적어도 나는 그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 하고 생각을 나누고 공감하며 서로 의지할 수 있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반대로 언제든 선거를 통해 아주 적법한 절차로 이 사람들과 이 일상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등골이 서늘하다. 이번엔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거다. 아직까지는.

 

요 며칠, 조금씩 우울감이 옅어져 가는 듯하다. 아직도 뉴스를 보지 않지만, 아니 보지 못 하지만, 먹고 싶은 것이 생겼다. 다른 생각도 하게 되니 기분이 조금 더 가벼워진다. 특히나 같은 생각을 가진, 아니,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가 들려오니, 또 히죽거리며 희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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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끝나고 바로 올라왔던 

딴지일보 만평

 

그들은 나와는 머나먼 세대의 차이가 있고, 성별도 다른 이들이 많다. 나의 생활반경에서는 접촉이라는 건 아예 없었던 외계인과 동급으로 먼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에 태어난 모든 세대 중에 제일 영리하고 똑똑하며, 성격도 쿨하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거침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겁고 진지하다 못해 근엄하기까지 했던 정치를,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정치를, 그들은 거침없이 흔들어 보고 뜯고 맛보며 재미있게 가지고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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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열심히 응원할게. 니들 고맙쟈나... 

 

우울감에 늘어져 있던 나에게 그들이 꺄르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구호를 외쳤지만, 그들은 환호한다.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겁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정치도 재미있는 놀이이기에 기꺼이 참여하고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낸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중고등학교 시절 써둔 시를 보여줬다. 중2병 같아 부끄럽긴 해도, 그 시가 좋더라며 수줍게 웃었다. 왜냐하면 마지막 구절은 늘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단다.

 

그래. 그거다. 희망만 있다면 웃을 수 있다.

 

앞으로 실수도 많이 할 거다. 처음엔 환호하다가도 역시나 젊은 애들이 정치에 대해 뭘 알겠냐고 욕하는 사람도 생길 거다. 그때 같이 돌 던지지 말고, 지금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같이 돌 맞으면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게, 우리 세대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새로운 세대, 그대들이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선물이다.

 

다시 한 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