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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동기 중에 여친이 끊이지 않는 친구가 있었다. 얼굴은 평범했고, 말도 특별히 재미있는 편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여친이 아니라 그냥 친구를 사귄다는 생각으로 일단 만난다. 자꾸 보다 보면 정이 들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를 소개받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여친도 자연스레 사귈 수 있다는 거다. 

 

때는 대학교 1학년,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던 학과다 보니 남중-남고 코스를 밟고 여자사람을 만나본 인간들 자체가 적었다. 19살 청춘들이 얼마나 여친 만들려고 몸이 달아있었겠는가. 

 

반면 그 친구는 초연했다. 혹자는 만나는 여자 사람이 모조리 별로다, 라며 폄하하며 그런 태도가 가능하지 않았겠나 평하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다. 여친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문제였다. 석가모니는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고행이 길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야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그 친구는 여친을 만드려는 노력, 의지, 집념, 도전정신이 길이 아님을 또래보다 먼저 깨달았다.

 

내려놓기는 연애 업계에서도 나름 먹히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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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부족...

 

2.

내려놓기는 포기하고 적당히 살아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내려놓기는 오히려 제대로 노력하는 방법이다. 

 

지나친 의도는 긴장을 불러오고 동작을 망치듯, 지나친 노력의 의지는 여유를 없애고 일을 망친다. 여친 만들려고 몸이 달아있는 19살 청춘의 강하다 못해 부러질 거 같은 의도가 상대는 얼마나 부담스러웠겠는가. 자연스레 보이기 위해 애쓰는게 또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을까.

 

어려운 일을 보면 긴장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싶다면 긴장을 푸는 연습을 해야 한다. 긴장을 해야 뭔가 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이런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꼿꼿이 긴장한 채로 스케이팅하는 선수를 상상할 수 있을까? 힘을 잔뜩 주고 운전대를 잡는 사람은 초보 운전자 뿐이다.

 

3.

문제는 감히 내려놓을 엄두조차 안나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첫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육아에서 한발 떨어지는 게 가능할까? 직장인이 일을 내려놓기가 쉬울까? 피끓는 청춘이 연애시도를 간단히 접을수 있나?

 

인생의 모든 걸 걸다시피하고 죽을듯 버티는 사람에게 좀 내려놓고 해보세요, 라고 충고하면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당연히 될 리가 없다.

 

내려놓을 용기를 내는 건 좋은 시작이지만,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책만 읽고 바벨을 들 수 없듯이, 마음의 훈련과정 없이 마음을 고쳐 먹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가 어렵다. 내려놓을 힘을 기르고 힘을 기르는 방법을 같이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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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기 전, 내려놓기 후>

 

4.

내려놓을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불안을 누그러 뜨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부로 규정하거나 판단하는 걸 멈춰야 한다. 자기 비판적인 판단 뿐 아니라, 칭찬하는 것조차도 멈추고 단지 내 마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가만히 관찰해야 한다.

  

자! 지금부터 용기를 내서 내려놓자고 선언하고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도 좋다. 그런데 모든 억지스러운 힘은 긴장과 거부감을 낳는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일어나듯 당연한 원리다.  자칫 내려놓기가 억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관련 글은 지난편을 참고하시라. 갑자기 분위기 석가모니 :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2(링크)

 

판단이나 판정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을 무시하고 대충 뭉개고 지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사실만 보는데 집중해야 한다. 판단이나 판정은 불안을 불러오고, 불안은 긴장을 불러온다. 긴장하게 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 긴장을 내려놓고 이완하려 해야한다. 잘못된 점을 바꾸려는 '긴장된 노력'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5.

알렉산더 테크닉에서는 공을 끝까지 보지 않는 습관을 가진 선수를 교정하는 예를 들고 있다.

 

 1. 코치가  선수에게 공을 끝까지 보라는 주문을 강하게 한다. 

 2. 선수는 공을 끝까지 보려고 (긴장된) 노력을 한다.

 3. 가장 옳다고 느껴지는 방법으로 그걸 가장 잘해 내려고 한다. 

 4.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가장 익숙한 습관대로 눈을 감고 공을 치게 된다.

 

코치가 닥달할수록, 스스로 긴장할수록 교정이 어려워진다. 학생이 정신을 똑바로 안차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신을 차리려는 의도 자체가 과한 게 문제다. 제대로 노력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잘못된 점을 바꾸려는 (긴장된) 노력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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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괴리>

 

6.

한가지 방법은 최대한 객관적인 팩트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너무나 재빠르기 때문에 팩트와 그에 따른 판단을 순식간에 한 세트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일은 완전히 엉망이었음, 이건 판단, 판정, 비난이다. 하지만 오늘 일에서 실수가 있었음, 이건 사실 인지이다. '아 나는 실수를 했다'라고 팩트만 받아들이는데 그치기는 무척 어렵다. '실수를 했으니 나는 멍청한 놈이다'라는 각종 판단과 그에 따른 감정(자괴감, 후회등)이 세트로 따라온다.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사실에 감정을 섞어서 판단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물론 사실에서 감정을 분리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팩트인식과 감정간의 간격이 매우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를 분리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먼저 불안과 두려움을 최대한 줄여야 팩트-감정 간의 약간의 틈이 생긴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조금 누그러지는 게 첫번째다. 

 

7.

두 번째는 이 약간의 틈을 이용해 사실에서 감정을 분리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해 봐야 한다. 걸웨이 선생은 간편한 방법을 개발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팩트에만 집중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테니스공이 땅에 닿으면 바운스라고 외치게 하는 것등이다. 

 

부담되는 일이 생기면 딴지게시판이 당기는 증상이 있다고 치자. 언제 그런 기분이 드는지만 정확히 기록해 본다. 할 일이 많은데 딴게에 들어가서 일을 회피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는 자책은 할 필요가 없다. 그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기록하는 느낌으로 정확히 어떨 때 그랬는지 기록만 하면 충분하다.

 

일기나 글쓰기가 수양에 도움이 되는 이유와 비슷하다.  다만 일기에 지나친 자기반성이나 칭찬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8.

자, 세줄 요약.

 

1. 내려놓기는 포기가 아니라 제대로 노력하는 방법이다.

2. 내려놓을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불안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3. 그러기 위해서는 함부로 판정/판단하지 말고, 객관적인 팩트에만 집중한다. 

 

다들 대선 후유증으로 고생이 많으실 터인데, 한 번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한 얘기가 아니라, 스포츠 과학을 넘어 경영학에도 도입된, 이미 검증된 각 분야의 대가들 이야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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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이 유리같은 호수처럼 고요할 때,

가장 위대한 노력을 할 수 있다.

-티모시 걸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