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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컬처앤스타>

1.

정태춘은 시인이다.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는 노래하기 전에 먼저 시를 쓴다.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건, 그의 정체성을 말할 때, 노래하는 사람이 우선인지, 시를 쓰는 사람이 우선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에게 있어 노래보다 시가 더 존재의 근본에 가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류는 진화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언어가 발달하자 가장 먼저 노래를 불렀다. 씨족 단위의 인류는 날이 밝으면 수렵, 채집 생활을 하면서 생존을 영위했고, 해가 지면 동굴이나 움막에 모여 서로 끌어안고 맹수나 다른 씨족의 공격을 경계하며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불을 이용해 음식을 구워 먹거나 밤에 불을 밝히고, 추울 때 난방용으로 사용하면서 인류의 진화는 급격히 빨라졌다. 밤에도 일을 할 수 있어 더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고,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생존 활동이 아닌, 쾌락과 유흥을 위한 시간도 늘어났다. 익힌 음식을 먹으면서 영양가 높고 에너지 총량이 늘어나게 되고, 음식, 도구 제작 등 손을 움직이는 동작이 더욱 정교해지고, 이런 활동은 뇌 발달을 촉진했다. 특히 무리 지어 사는 인류가 서로 의사소통할 필요가 강하게 드러나면서, '언어'는 가장 효율이 높은 수단이었다.

 

초기 유인원과 비슷한 발성을 했던 인류는 불의 발견, 수렵, 채집 생활, 불의 발견, 씨족 단위의 군집 생활, 도구 제작, 익힌 음식 섭취, 생존 활동 이외의 유흥 시간 등 구석기 시기로 들어서면서 이전과 사뭇 다른 존재로 진화한다. 이 시기에 인류는 '언어'를 시작한다.

 

2.

약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하면서 수메르 문명 시기 '길가메시 서사시'가 탄생한다.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문자이자, 문학이며, 시이고 노래다. 도시국가 우루크(이라크 남부에 있는 수메르의 도시 유적)를 지배했던 왕이자 영웅인 길가메시를 찬양한 이 서사시는 점토판에 새겨졌으며, 가장 오래된 문자다.

 

약 2천8백 년 전, 고대 그리스 문학의 시조로 알려진 '일리아드'는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역시 '서사시'다. 인류는 말을 시작하면서 '노래'를 했고, 문자를 발명하고 처음 남긴 기록이 '시'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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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

 

3.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요는 모두 노래였고, 그 노래는 곧 시였다. 문자가 없던 시기, 선조의 지혜를 기록하는 유일한 방식은 서사를 이야기로 만들고, 그 이야기를 가장 외우기 좋은 방식인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거였다. 서사는 산문보다 운율이 있는 짧은 시로 바뀌고, 시는 곧 노래가 된다. 우리가 아는 민요는 그렇게 만들어진 시이며, 문학이고, 역사다.

 

고대에 도시와 도시를 떠돌아다니던 음유시인은 노래하는 시인이었다. 동서양 모두 이름 없이 스러진 그 많은 예인들은 장터와 시장을 떠돌며 사람들 사이에서 노래했고, 그 노래는 시를 바탕에 둔 내용이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썼다. 이 시기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시를 썼고,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멜크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가운데 '희극'을 다룬 책을 둘러싼 사건임을 말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유명한 인물 대부분이 시인이었다. 당나라 때 두보, 백거이, 이백, 진나라 때 도연명 등이 유명하지만 당대 정치가, 벼슬을 한 고위 관리는 모두 시를 짓는 시인이기도 했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뛰어난 문장을 뽑는 제도였지만, 그 근본은 시를 짓는 거였고, 탁월한 시를 짓는 사람이 합격하고 벼슬을 살았다.

 

지배계급에 속하는 자들은 어려서 문자를 배우고, 글을 쓰며, 시를 짓고, 문장을 다듬는 연습이 당연한 의무였다. 이들은 어울려 놀이를 할 때도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위였고, 시와 노래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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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치의 노래, 정태춘>

 

4.

우리 말을 중국 문자로 표기하던 때에도 민중은 우리 말로 노래를 불렀고, 지식인(양반계급)들은 그 노래를 한 자로 기록했다. 마침내 우리 말을 우리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말과 글은 특정 계급의 소유물이 아닌, 민중이 자기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시인은 많으나 노래하는 시인은 드물다. 노래하는 사람은 많으나 시를 쓰는 가수는 드물다. 자기 언어로 시를 쓰고, 노래하는 예인은 더더욱 드문 시대에서 정태춘은 밤하늘의 별들 가운데서 찬란하게 빛나는 드문 별이다.

 

시를 쓰고 노래하는 예술가로 한대수가 있고, 김민기가 있고, 신중현이 있다. 우리 시대 빛나는 별이고, 저마다 개성 있고 독창적인 예술가임이 분명하지만, 정태춘은 그들과 또 다르다. 한대수와 신중현은 서양의 팝과 록을 체득하고, 그 형식을 가져와 우리(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했고, 김민기와 정태춘은 자신의 언어로 민중의 정서를 노래했다.

 

시인은 바닷가 자갈처럼 흔하지만, 민중을 노래하는 시인은 많지 않다. 민중의 삶을 시로 쓰는 시인도 적지만, 그 시를 노래하는 시인은 더욱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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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아치의 노래, 정태춘>

 

5.

어느 시대나 민중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가객이 있었다. 21세기 한국에는 신중현, 한대수, 김민기, 정태춘이 있다. 이 가객들은 전쟁 이후 혁명, 쿠데타, 민주주의 투쟁 같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민중의 목소리로 노래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어린 노동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도시빈민, 독재와 가난과 무례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정태춘은 대중가수로 경력을 시작했으나 '연예인', '대중가수'의 길이 자기가 가고픈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방송에서 오락, 흥미의 대상으로 소모되기 전에 그는 일찌감치 대중적 성공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에 집중한다. 모든 예술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80년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이 독재의 폭력을 행사할 때, 대학생은 학교에서 '의식화'가 되었으며,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 의식을 일깨웠다. 정태춘은 태어나 자란 평택(팽성) 도두리에서 드넓은 논과 큰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어머니, 형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정월 대보름, 백중, 추석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북과 꽹과리를 치며 농악을 놀았다. 평택 농악은 유명했으며 어린 정태춘은 그 모든 풍경과 장면들, 음악의 가락과 악기의 울림을 온몸으로 체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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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

 

6.

정태춘은 민족의 원형을 잃지 않은 인간이다. 산업화가 발달하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사회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 변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발전이고 진화라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는 원형은 대가족, 공동체, 마을 단위의 집단, 서로 돕고 함께 사는 원시공동체 같은 자생적, 자발적 공산사회 같은 구조이며, 그 안에서 개인은 단지 개인으로 머물지 않고, 가족과 이웃과 끈끈하고 밀도 있게 연결되어 있어 고독과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정태춘이 어려서 그런 경험을 하며 자랐고, 그 자신 농부의 자식으로, 전통 사회의 한 사람으로,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가진 공동체의 개체로 성장하고 있음을 본능으로 알았다. 정태춘은 아버지,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우리 선조의 사회적 유전자에서 노동하며 건강하고 쾌활한 민중의 정서를 물려받았고, 욕심부리지 않고 질박한 삶에 만족하며, 기쁨과 슬픔을 이웃과 함께하고, 먹을 것을 나눠 먹으며 이웃들의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하게 아는 대가족 정서를 당연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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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

 

7.

정태춘의 노래는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삶에 대한 그리움이자, 안타까움이다.

 

저 맑은 별빛 아래

한밤 깊도록 뛰놀던 골목길

그때 동무들 이제 모두 어른 되어 그곳을 떠나고

빈 동리 하늘엔 찬 바람결의 북두칠성

나의 머리 위로

그날의 향수를 쏟아부어

눈물 젖네, 눈물 젖네

-실향가 2절

 

정태춘은 고향을 떠났으나 잊지 못하고, 돌아가고 싶었으나 돌아갈 수 없는, 삶의 딜레마에 놓인다. 그는 대중가수로 출세했으나, 실패를 거듭하고 가난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삶의 방향을 모색했다. 그가 군 복무를 마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형님, 둘째 형님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고, 고향의 땅과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이제 고향은 그에게 그리움과 슬픔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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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서울독립영화제>

 

8.

음반 2집, 3집이 실패하고, 살림이 어려워지자 정태춘은 전국을 돌며 소극장 공연을 했다. 이후 김광석이 소극장 공연으로 큰 성공을 거둔 롤 모델이 정태춘이었다. 계약한 음반사에서는 순회공연을 하면 그 지역에서 음반이 매진된다고 좋아했으나 정태춘에게 돌아오는 돈은 없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정태춘은 여전히 책을 읽었고, 사회를 공부했으며, 역사를, 인간을 탐구했다. 그는 대학생도, 노동자도 아니었지만 그는 스스로 공부하는 지식인이었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철학자였다. 그는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술가가 사회과학을 공부하면 어떻게 변하는가를 정태춘은 음악으로, 노래로 보여주었다.

 

루쉰은 일본의 의과대학에서 동포들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하는 영상을 보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체 게바라는 남미 일대를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면서, 남미의 민중들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고, 경험하면서 제국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알제리의 프란츠 파농은 반제국주의 전선에서 가장 앞장선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지식인이며, 사회의 기득권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적들을 향해 정면으로 맞선 사람들이다.

 

정태춘도 당대의 역사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음반 검열하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승리했다. 그는 '광주 민주항쟁'을 노래했고,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전교조, 노동조합 투쟁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했다. 칠레의 빅토르 하라가 민중가요를 부르고 아옌데 정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당했지만, 정태춘 역시 그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침묵하지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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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Daum영화>

 

9.

정태춘은 현실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지만, 그는 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인이며, 노래하는 사람이다. 총칼보다, 화염병보다 더 강한 무기가 노래라는 걸, 이제 안다. 그의 노래는 살아남았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었다. 그의 시는 당대의 사회 모순을 드러냈으며, 그의 노래는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슬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며, 그의 목소리는 민중의 정서를 상징하는 울림이 있다.

 

역사로 이어지는 전통의 정서, 우리말의 아름다움, 민중 지향 음악, 민중을 상징하는 듯한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음악가는 지금까지 정태춘이 유일하다. 그가 활동하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어 기쁘다.

 

이 시대는 급속한 산업화로 과거의 아름다운 전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지만, 정태춘을 기억하고, 그의 노래를 부를 때 선조들의 삶과 정신으로 이어지는 정서적 혈연을 느낀다. 정태춘의 노래는 정서적 혈연의 핏줄이며 혈액이고 감성의 통로다.

 

 

 

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바,

독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 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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