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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에 리뷰 노예로 납치된 불가사리. 거액의 제작비로 복수하겠다 다짐했지만, 딴지가 던져준 주제는 온통 싸구려들.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는 ‘맛집 리뷰’를 하라고 불가사리를 설레게 했으나, 굳이 ‘돈까스’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돈까스로 유명한 성북동과 남산, 서울역그릴을 들른 불가사리는, 기사식당식 돈까스 이전의 한국식 돈까스 스타일을 찾아 인천으로 떠난다. 과연 불가사리는 성공적으로 딴지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을까?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기대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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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로부터의 협박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하루를 보내던 그 날 저녁, 불가사리는 문자를 받는다.

 

죽돌: 요즘 일은 재미있으신지요. 근육병아리가 불가사리님의 유지를 이어 음식 관련 글을 잘 쓰고 있습니다. 생각나서 문자 하나 넣습니다.

 

언뜻 보면 언제나처럼 정중하게 필진의 안부를 묻는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의 문자다. 게다가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동시에 마치 나의 선한 영향력(?)이 발휘되는 것 같은 뉘앙스의 친절한 문자. 

 

... 라고 평범한 이들은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분석과 리뷰의 불가사리다. 쉽게 속지 않는다. 분명 이 문자에는 행간이 있다... 라고 생각한 순간, 벼락처럼 한 단어가 순환계의 중심 근육 기관(예: 심장)에 꽂혔다.  

 

"유지 (遺志)"

죽은 사람이 생전(生前)에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

 

그렇다. 이것은 살해협박이다. 문자를 받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근육병아리가 있으니 이제 나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존재의 말살, 원고를 한 달 이상 쓰지 않으면 언제든 생명을 내놓으라는 뜻. ‘웃는 낯의 암살자’는 나를 언제 암살하러 올 것인가. 며칠 동안 두려움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문자를 보냈다.

 

불가사리: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는 반드시 쓰겠습니다. 제가 일하랴, 애 키우랴, 대학원 공부하랴 시간이 없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죄송합니다. 

 

죽돌: 아니, 왜 자꾸 살려달라고. 누가 들으면 제가 협박이라도 하는 줄... 그럼 이번 주에는 꼭, 꼭, 기대하겠습니다.

 

협박이 아니라고 했다가 결국은 "꼭", "꼭"을 두 번 강조할 때, 직감이 맞았음을 눈치챘다. 

 

현재 시각, 일요일 저녁 9시 30분, 나, 불가사리, 살기 위해 쓴다.

 

서울에서 찾기 힘든 경양식 돈까스

 

불가사리의 구분에 따르면, 한국식 돈까스는 크게 경양식 스타일과 한국 기사식당식 스타일로 나눌 수 있다. 경양식 스타일은 원조의 원조인 오스트리아 슈니첼, 독일 예거슈니첼 등 유럽식 커틀릿에 가까운 음식이고, 기본적으로 ‘고급’이었던 역사적 흔적이 있다.

 

  튀김옷 두께 고기 두께 빵가루 크기 곁들임
일본식 두껍다 두껍다 크다 양배추, 된장국
한국 경양식 얇다 얇다 작다 수프
한국 기사식당식 얇다 더 얇다 중간 ~ 크다 수프, 김치 등

 

그런데 문제는, 정통 한국식 돈까스라 할 수 있고, 일본의 1945년 이전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한국 경양식’ 돈까스를 생각보다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경양식 스타일’이라고 하면서도 파는 돈까스를 보면 기사식당식을 택하거나, 일식을 택하고 위에 소스만 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서울에는 정통 경양식 스타일의 돈까스집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물론 충분히 이해된다. 유행은 변하는 법이기도 하고, 과거에는 가장 만들기 쉬운 형태였던 경양식 돈까스가 지금은 쓰기 힘든 무엇인가가 되어버렸으니. 무엇보다 ‘경양식 돈까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고, 일식 돈까스의 짝퉁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가난한 한국인이 일식 돈까스를 커 보이게 만든 음식이라는 식의 글을 써댄 기자들과 작가들은 반성하라!).

 

그런 이유에서, 불가사리는 경양식 돈까스를 찾아 지역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갈 일이 있는 김에 들르는 경우이지만, 딴지에는 일부러 출장을 다니는 것이라고 말해야 기름값이라도 받을 수 있다(흐흐흐). 불가사리가 돌아다닌 곳은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 처음으로 간 곳이 그나마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 그것도 동인천이다.

 

인천 돈까스타운

 

지금 인천은 거대한 도시지만, 과거 인천은 바다에 붙어 있는 인천 중구와 그 옆 인천 동구를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 ‘인천’이라고 하면 현재 월미도에서부터 인천항, 동구청 정도까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인천의 돈까스집들은 인천 중구청에서 인천 동구청 사이, 신포시장 주변에 있다. 불과 1킬로가 되지 않는 거리 안에 10개가 넘는 돈까스집들이 밀집해 있고, 정통 경양식 돈까스를 표방하는 집이 4집이나 있다. 그 가게들의 이름은,

 

등대경양식, 씨사이드경양식, 이집트경양식, 잉글랜드왕돈까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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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곳의 가게를 돌아보며 한국 경양식 돈까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새삼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이 가게 중 세 곳만 돌아보아도 한국 경양식 돈까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등대경양식

 

처음 간 곳은 ‘등대 경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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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건물, 적어도 50년은 된 것 같은 분위기. 1968년에 열었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영업한다고 한다. 허영만의 백반기행 등 여러 방송에도 출연한 모양이다. 간판뿐 아니라 창문도 고풍스러웠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 역시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다만 조금 어수선했다. 오래된 가게라 깔끔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정리가 조금 안 된 것처럼 보였다. 안에는 지금도 타는 것 같은 자전거도 보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식당 안에 자전거 등을 두는 것이 비위생적이라 생각하는 편이지만 신발이나 타이어나 무슨 차이냐고 하면 크게 할 말은 없다.

 

들어가면 ‘식당안 테이블 5개, 일하는 사람 한 사람입니다. 작은 식당에 소란함을 피하고자 각종 블로거, 유튜버, 외부 식당 다른 돈까스 업체 관계자분들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고, 촬영도 금한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메뉴는 돈조각(돈까스)가 1.5만 원, 그날의 수프가 5천 원이었고, 하루에 돈까스 25그릇만 팔고 더는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일단 주문하려는데, 경계하는 듯한 젊은 주인이 ‘혼자 오시면 입장이 안 된다’라고 한다. 이에 ‘혼자 2인분은 안 되냐’라고 하자 ‘그렇게는 안 된다, 예약해야만 된다’라고 한다. 처음 들어올 때는 예약 필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사를 쓰려고 온 사람인 티가 좀 난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이 가게가 유튜버 ‘쯔양’의 유튜브에 나왔는데, 당시에 방송에 나왔던 주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음식에 집중하기 위해서 번잡한 방송 출연 등을 피하는 것은 좋은 자세이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다른 돈까스집의 2배가 넘는 가격도 맛만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가게인 홍대의 오코노미야키집 ‘노사이드’도 한 번 가고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맛은 나쁘지 않아서 나쁘게 보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영업할 자유가 있고, 소비자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가면 그만이다.

 

다만 60년대부터 영업해온 50년 전통의 경양식집이라는 역사와 그 캐릭터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런 영업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래된 경양식집이라면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오버하지 않고 여유로운 주인이 느긋하게 맞아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아쉬웠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있던 이름 하나가 기억났다. 신촌에 있던 ‘신돈갓’이라는 가게. 계단을 엄청나게 걸어 올라가야만 갈 수 있던 간판도 없던 가게. 무조건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고 테이블도 두 개이며 아이스크림 튀김을 비롯한 기묘한 음식들이 많았던 가게. 10여 년 전에도 돈까스 가격이 1만 5천 원 정도였으니 여기보다 한참 더 비싼 가게였다. 기묘하고 불친절하다면 불친절한 곳이었지만, 나는 그곳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이곳에서도 그런 감동을 할 수 있을까.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가게, ‘씨싸이드 경양식’으로 향했다.

 

씨싸이드 경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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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정말 시대가 박제된 것 같았다. 등대경양식은 70년대 상태 그대로 시간이 지나 이제는 낡았다는 느낌이라면, 씨싸이드에 들어가면 70년대 그 순간, 한때는 이런 인테리어와 모습들이 세련되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단히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가게는 깔끔했고 충분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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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돈까스 만 원, 정식 1만 2천원이다. 싼 가격은 아니지만 괜찮은 가격이다. 앉아서 주문하니 수프와 샐러드가 나온다. 이제 BDM(Bulgasari Don-gassu Method)로 분석해 본다.

 

1. 수프와 가니시(곁들여 나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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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를 받는 순간 알았다. 아 이 집은 진짜구나. 수프는 루를 직접 볶아 부드럽고 진한 버터 맛이 낫고 굉장히 고소했다. 이렇게 고소하려면 단순히 루로만은 안 되는데 아무래도 땅콩버터나 참깨를 넣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염도도 적당해서, 오늘 하루 적어도 4집을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프만 두 접시를 먹었다. 함께 주는 샐러드 소스도 과일을 갈아 직접 만드는 것 같았고, 여기에서도 땅콩버터의 맛이 났다. 특이했고 맛있었다.

 

곁들여 나오는 것은 샐러드 이외에 김치와 단무지가 나왔고, 베이크드 빈스, 강낭콩, 마카로니, 감자튀김이 함께 나왔다. 모두 미군 부대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들이다. 특별히 맛있을 필요가 없지만 종류가 다양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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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기의 두께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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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고 나오기까지 7분 정도가 걸렸다. 손님이 없는 시간임에도 꽤 오래 걸렸는데, 미리 초벌 튀김을 하지 않고 주문을 받고 바로 튀기는 것 같았다.

 

고기의 두께는 기사식당식보다는 두껍고 일본식보다는 얇은, 얇게 편 등심이었다. 1cm 정도 두께로 씹는 맛이 좋고 부드러웠다. 물론 육즙이나 고기 맛이 느껴지는 형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3. 튀김옷과 빵가루, 기름

가장 맘에 든 점은 튀김옷과 빵가루였다. 고기의 두께와 완벽히 어울리는 얇은 튀김옷과 아주 가는 빵가루가, 미군 부대 영향을 받은 경양식 돈까스를 아주 완벽하게 재현 또는 계승하고 있었다. 게다가 튀김에서는 기름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고기와 튀김옷, 빵가루가 어우러진 맛은 거의 황홀한 수준이었다.

 

4. 소스의 맛과 어우러짐

소스는 브라운소스에 새큼한 과일 맛을 더한 느낌이었는데, 비프스튜에 가까운 정통 경양식 스타일과는 조금 달랐다. 튀김의 맛이 아주 산뜻해서, 굳이 새콤한 소스가 필요한지는 다소 의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충분히 잘 어우러졌고, 소스를 고기 전체에 뿌리지 않아 부먹과 찍먹을 함께 먹을 수 있게 한 것도 좋았다. 튀김 자체가 아주 맛있는 경우는 소스가 묻지 않은 부분도 먹고 싶어지기 마련이라.

 

식사는 밥과 빵 중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딸기잼도 시판이 아닌 직접 만들거나 최소한 소규모로 만드는 업체에서 받아온 것 같은 맛이었다. 식사하고 나면 설탕/ 프림/ 커피 통으로 타 먹는 커피가 있었다는 점도 눈물 나게 반가웠다. 가게의 청결도, 음식의 맛, 직원들의 서비스, 음식의 모양 모든 점이 하나하나 정성스러웠고 하나하나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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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양식 돈까스의 완벽한 전범"

 

 

이집트 경양식

 

씨싸이드 경양식은 꽤 감동적이어서, 다른 가게를 갈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독자 여러분에게 최상의 리뷰를 보여드리기 위해(그리고 죽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다음 가게로 향했다. 다음 가게의 이름은 묘하게도 ‘이집트 경양식’이었다. 이집트와 경양식이 관계가 있나? 싶었지만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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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등대, 씨싸이드와 한참 다른 분위기였다. 레트로한 컨셉을 차용한 상당히 세련된 가게로 보였다. 밖에서 보이는 가게의 모습은 경양식집보다는 세련된 클럽이나 아니면 예전에 미술관에 딸린 세련된 가게처럼 보였다. 내부에도 어항이 있고 석유난로가 있었으며 벽지와 바닥이 과거 모습이었지만, 과거 자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의도된 레트로로 보였다. 메뉴는 등심돈까스 9,000원, 안심돈까스 10,000원이었는데, 애초에 안심돈까스가 있는 것 자체만 보아도 이 가게가 정통 경양식집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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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프와 가니시(곁들여 나오는 것)

수프는 그냥 오뚜기 수프 맛이었고, 빵이 나왔는데 평범하지만 스팀 토스터를 쓴 듯 보들보들하게 쪄서 나왔다. 가니시는 양배추 채와 마카로니. 일본식 돈까스와 비슷한데 경양식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으니 마카로니도 예의상 넣어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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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돈까스와 안심돈까스. 두 개 먹었다.

 

2. 고기의 두께와 맛

나온 고기 두께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등심과 안심 모두 어지간한 일본 돈까스보다 더 두꺼운 돈까스였다. 게다가 일본식 안심 돈가스와 달리 안을 충분히 익혀 나와서, 안심의 경우 질기지는 않았지만 좀 퍽퍽한, 닭가슴살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났고, 등심의 경우 등심을 구워 먹을 때처럼 고기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중간에 비계 부분도 그대로 느껴졌고 질긴 느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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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튀김옷과 빵가루, 기름

튀김옷도 대단히 하드코어했다. 튀김옷이 굉장히 두껍고, 빵가루는 이게 빵가루인지 텐카츠(우동 등에 들어가는 튀기고 남은 튀김옷)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기름도 많이 남아 있었고, 기름 냄새도 꽤 났는데 나쁜 기름 냄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름 맛과 향이 많이 났다. 고기가 워낙 두껍다 보니 대충 어울리기는 했고, 겉을 엄청나게 바삭하게 만들다 보니 바삭하게 씹는 맛 자체는 있었다.

 

4. 소스와 맛의 어우러짐

이 기묘한 맛의 정점은 소스였다. 소스는 일단 고추 냄새가 강하게 났고, 강하게 쏘는 매운맛 뒤에 단맛과 신맛이 숨어 있었다. 경양식 돈까스 소스나 우스터소스와는 사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맛이었고, 양념치킨 소스 같은 고추장스러운 소스도 아닌, 페페론치노와 마늘 맛이 나는 것 같은 특이한 맛이었다. 튀김이 워낙 두껍고 기름 맛이 많이 나다 보니 매운 소스로 느끼함을 지워 주는 것 같았다.

 

빈말로라도 취향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나쁘지는 않았고, 잘 어우러졌다. 잘 모르겠으면 매운맛을 넣고 잘 모르겠으면 모차렐라 치즈를 넣어 느끼함과 매운맛의 타격감을 함께 즐기는 현대 한국 음식이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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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라기보다 한국식 “핫 크리스피 포크”에 가깝다. ‘현대 한국 음식’의 한 전형.

 

 

잉글랜드 왕돈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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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부터 포스 넘친다

 

씨싸이드와 이집트에서 돈까스 총 세 개를 먹으니 이제 지친다. 그러나 남은 곳은 ‘잉글랜드’, 전국의 경양식집중에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 집이라 안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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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에 나온 둘리돈까스집이고, 예전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꽤 유명한 집이다. 들어가 보면 가게 규모도 지금까지 가게들을 다 합친 것만큼 크고, 가게 안에는 분수도 있으며, 음료 무한리필이 되는 디스펜서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어느 동네에나 있는 그 동네의 대장 같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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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는 돈까스 9,500원이고, 샐러드 수프 반찬 등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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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프와 가니시(곁들여 나오는 것)

수프는 루를 볶아 만든 고급스러운 맛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뚜기 수프 맛도 아닌데 어딘가 익숙한 맛이다. 수프라 초록빛인데 뽕잎인지 클로렐라인지 정체는 모르겠지만 맛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샐러드, 김치, 단무지 모두 평범하고, 반찬들과 커피, 청량음료, 아이스크림을 떠먹을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넉넉하게 했다.

 

가니시는 마카로니, 통조림 콩, 그리고 특이하게도 오이무침이 나왔다. 맛은 특별한 것은 없는데 오이무침은 처음 보아서 새로운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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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기의 두께와 맛

고기는 상당히 얇고, 기사식당 돈까스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등심 한 장 (130그람 정도)을 넓게 펴서 꽤 큰 접시 하나를 채울 정도. 일반적인 기사식당보다는 덜 얇지만 성북동 금왕돈까스과 비슷한 두께 같다. 맛은 얇게 편 만큼 부드러웠는데, 고기의 질감 등이 지나치게 없어서 저가형 냉동 돈까스와 비슷한 느낌마저 들었다. 임팩트가 없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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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튀김옷과 빵가루, 기름

튀김옷도 고기 두께와 어울릴 수준으로 아주 얇았고, 빵가루는 씨싸이드보다도 더 가늘었다. 기름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적인 균형은 맞았지만, 이런 점들이 합쳐지자 더더욱 냉동돈까스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고기가 냉동이라는 것이 아니라, 냉동 돈까스 스타일의 원본 레퍼런스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 자체로는 재미있는 맛일 수 있으나 너무 흔한 것과 비슷하다 보니 그 가치가 좀 과소평가 되는.

 

4. 소스와 맛의 어우러짐

소스는 클래식한 브라운소스였다. 신맛은 거의 나지 않았고 해시라이스 소스와 비슷할 수준으로 구수했다. 이 소스는 튀김을 가득 덮는 모양으로 나와서, 한쪽 면은 이미 소스에 푹 담겨 있었다. 기본적으로 바삭함을 살리는 튀김이 아니다 보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조금씩 더 두꺼워져서 맛의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던 씨싸이드를 먹고 나서 먹으니 임팩트가 적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과거 경양식집을 그대로 구현한 것은 맞는데, 고급 경양식 레스토랑이라기보다 동네의 평범한 경양식집을 구현하거나 계승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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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그 맛 그대로. 그러나 그만큼이나 흔하게 느껴지는 맛.

 


 

인천, 특히 동인천의 가게들을 둘러보고 어렴풋이 기억하던 경양식 돈까스의 두 가지 유형, 그리고 가장 현대식의 한국 돈까스를 먹어본 느낌이었다. 사실 그동안 돈까스집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스타일의 돈까스를 먹어보았지만, 가장 추억을 자극하는 맛이었고, 현재의 맛 그대로도 아주 맛있고 재미있어서 경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식 돈까스를 상대적으로 덜 좋아하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식 돈까스는 어느 집에서 먹나 스타일의 유의미한 차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 잘 만든 것과 못 만든 것의 구분이 아주 명확하다. 그러나 한국식 돈까스는 스타일 차이가 천차만별이라 취향을 탈 수 있는 영역도 넓고, 모든 집마다 다 다른 소스를 듬뿍 부어 나오기에 맛의 변주 영역(배리에이션)은 더 크다. 그래서 잘 만든 일본 돈까스처럼 그 자체로 100점을 줄 수 있는 요리를 찾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지간해서는 못 만들었다고 평가하기도 어렵고 나름의 재미를 준다.

 

그럼에도 한국식 경양식 돈까스는 확실한 모범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은 든다. 너무 다른 스타일,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보니 정작 원조가 무엇인지 모호해졌다고 해야 하나, 변화가 빠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한국인들이 맛을 자꾸 변화시키다 보니 과거에 남아 있던 좋은 것들도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야 하나. 이러다가 20년 30년 뒤에는 현재의 이 맛은 오히려 일본에서 누군가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겁도 나고, 모범에 가까운 돈까스를 젊은이들이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 희망도 생기고 그렇다.

 

한국 돈까스의 발전 과정에서 특이한 유형들이 생겨났고, 이 스타일은 서울에서 나름 유명한 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사의 ‘한성돈까스’, 강동의 ‘윤화돈까스’, 광화문의 ‘돈까스 백반’ 같은 곳들 말이다. 

 

하지만 정통 경양식 스타일을 제대로 좀 더 맛보고 싶은 욕심도 있기에 통영-삼천포 돈까스 기행도 떠나볼까 생각 중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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