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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짬중사의 부탁 

 

16톤 분량의 부대 식료품 하역이 끝나고 부식창고 철문을 닫고 나면 근무지는 한창 소강상태였다. 평소 친근하게 필자를 대해주던 아무개 중사가 딱딱한 얼굴로 다가왔다.

 

"ㅇㅇ이, 마무리 잘했냐?"

 

"필승, 왜 그러십니까 중사님?"

 

쾌활한 말투와 다르게 아무개 중사는 어딘가 어색해보였다.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달싹이고는 필자의 눈치를 조금씩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부대 상급자라고 갑자기 막 부탁하고 그러는거 좀 아닌 거 아는데, 요새 일도 잘 안 풀리고 진짜 너무 답답해서 그러거든."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개 중사는 부대 내에서 유명한 '짬중사'였다. 분명 그 시기가 부대 진급심사 기간이긴 했다. 병사들과는 나름 스스럼없이 지냈기에 우리 사이에선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윗사람들 의중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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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중사 간단요약

출처-<링크>

 

"그...갑자기 막 준비도 안됐는데 이러면 곤란한거 다 알고..., 다 아는데 부탁 좀 할게. 지금 너라도 할 줄은 알 거 아냐.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그랬잖아. 어? 이런 거 평생 해 본 적도 없는데...야, 알지, 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거. 원래 이런 거 하면 안 되는데 아오..."

 

근데 아까부터 자꾸 뭘 부탁한다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진급심사 기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필자는 행정업무 겸직을 하는 부대 내 유일한 병사였기 때문이다. 진급심사 결과라든지, 심사 기준이라든지, 이런 것들 묻는 건가? 아니면 확인할 방법은 없냐고 물으려는건가? 그래서 말하기 꺼려하는건가?

 

필자는 자세를 고쳐 앉고 단호한 얼굴을 취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업무 특성 상 간부들 군 데이터베이스 계정을 그들의 입회하에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그 사이 중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의자를 바싹 당기고,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듯 눈을 찌푸리고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무개 중사에 박자에 맞추어 대답을 준비했다. 단호하게 NO라고 외치리라.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아무개 중사는 천천히 입을 뗐다.

 

2. 그 철학이 아닙니다만 

 

"나 태어난 날 ㅇ월 ㅇ일이고, 어...뭐더라...아 태어난 시간은 그 때가...소...시간? 이라고 그러는거 같더라. 초록창에서 이거 두 개만 알려주면 된다던데, 맞냐? 여튼 고맙다, 응?"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첫 번째 '잘 못 들었습니다'보다 훨씬 크고 뒤틀린 소리가 필자 입에서 튀어나왔다.

 

"잘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x소리십니까'라는 말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다가 목소리가 커져 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아무개 중사는 기분이 몹시 상한 듯, 한층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야, ㅇㅇㅇ이. 유세 떠냐? 내가 그래서 부탁 좀 한다고 했잖아, 맛난 거 또 나중에 사준다고. 요새 일도 너무 안 풀리고 힘들다고 이 새끼야. 사주 잠깐 봐주는 게 그렇게 아니꼬워?"

 

아. 그 순간 필자는 우리 둘 사이에 크나큰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다. 실소가 터져 나오려고 했다.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넘기는 척하며 입을 가리자 웃음이 아주 살짝 새어 나왔다.

 

말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여전히 단호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개 중사에 기분을 더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끊어내야 했다.

 

"저 사주 볼 줄 모릅니다. 철학과에서 그런 거 안 배웁니다."

 

"뭐???"

 

무슨 x소리냐는 말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고 있는 아무개 중사의 얼굴이 기억난다.

 

3. 익숙한 단어 철학. 익숙지 않은 철학

 

아무개 중사하고의 사이는 그 이후로도 소원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원만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공짜로 봐주기 싫어서 끝까지 잡아뗐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나중에 알아보고 자기가 실수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이후에도 가끔 당직이나 근무지에서 마주치면, 잠깐 손금이라도 봐달라고 했던 것을 미루어보아 전자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은 것 같다.

 

학부에 입학해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철학을 13년째 공부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하나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면, 철학은 배우는 사람과 배우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생경한 학문이라는 점이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렇게 만났던 사람들 중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철학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는 필자가 전공했던 철학의 모습과는 다소 달랐기에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필자는 이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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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이미지가 있을 만하다

출처-<링크>

 

4. 철학관과 철학과

 

"철학과는 요새 뭐 배워? 사주볼 줄 알아?"

 

철학 좀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특히 연령대가 조금 높은 분들을 만나면 거의 무조건이다.

 

그 이유는 역술인들이 운영하는 가게 상호에 자주 '철학관'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유교 문화 전통에 따른 독특한 현상이라고 예상된다.

 

옛날 조선시대 양반들의 필독서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다. 그중 삼경에 해당하는 시경, 서경, 역경(주역) 중 역경(이하 주역)의 내용 일부를 활용하여 민간에서 개인 삶의 희로애락과 운을 점쳐 보는 사주 문화가 생겨났다.

 

그런데 유학은 엄연히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므로 유학 서적인 주역의 내용을 활용하는 사주 전문가들은 '철학'이라는 간판을 내세울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다. 이것이 굳어져 우리나라에서 철학은 곧 사주풀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터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도대체 뭘 하는 학문인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대신 필자는 한 가지 예시로 이를 대체하고 싶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는 바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일 것이다. 그는 뛰어난 정치철학자 중의 한 명이며 매우 유명한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원제: Justice)'를 저술했다. 그는 책에서 '올바른' 인간 사회라면 그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이 어떠한 가치를 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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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공정하다는 착각>의 저자 마이클 샌델

출처-<유튜브 영상 캡쳐>

 

이를 토대로 간단하게 말하면 철학은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판단하는, 즉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별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그 무엇은 정치·사회·윤리·언어 심지어는 수학·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가끔 철학엔 정답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많다. 딱 잘라 대답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옳은 것·참인 것·정답인 것에 가장 집착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철학과 학생들이 가장 먼저 듣는 수업이 뭔지 아는가? 바로 논리학이다. 철저한 논리 규칙을 토대로 문제를 풀면 해당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할 수 있다. 논리학 조교로 일할 때는 내가 꼭 수학 조교가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 대해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군다나 특정한 개인 삶의 성공 여부와 운, 희로애락에 대해 미리 점쳐보는 행위를 참·거짓의 기준으로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역술가의 말이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주풀이가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면, 사주와 철학은 다소 거리가 멀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철학은 곧 사주라는 인식은 매우 끈질기고 뿌리 깊다. 여러 가지 '웃픈' 일화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전에 선배 중 한 명은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신다고.

 

고등학교 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놓고 사주팔자나 봐주면서 살 거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선배는, 자신은 서양철학을 공부할 거라 사주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선배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럼 너는 타로카드인가 뭔가 하는 그걸 배우는 거냐?"

 

이 크나큰 오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자신이 없던 선배는 멍하니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선배의 아버지는 어두운 얼굴로 '비싼 돈 내고 대학 보내놨더니 손장난이나 하게 생겼다'고 말씀하시더니 방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5. 철학과 나와서 먹고살 수 있어?

 

가끔 철학 공부를 한다고 말하면 혀를 끌끌 차면서 인생이 아주 한가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배경에는 아마 철학 공부해서 대체 뭐 해 먹고살 거냐는 한탄스러움이 묻어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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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하버드 역사학·문학 전공) 출신의 경험담

출처-<링크>

 

물론 이에 대해 논하려면, '밥 벌어 먹고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하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철학 공부를 한 사람들 중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을 본 기억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부자가 될 가능성은 좀 적을지 몰라도 말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과연 먹고살 수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이에 관한 필자의 답이 있다. 질문은 오래되었다. 답은 2022년 세상의 변화를 담았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해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