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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A/S부터.

 

꽤 많은 분들이 바이락이 어떤 운동법을 가르쳤는지 궁금해하셨다(참고 기사: 나의 삽질 연대기 2: 몽골 씨름 챔피언과 티켓 다방 사장이 함께 일하는 곳). 아마도 몽골 씨름선수의 신비한 운동법이 있겠거니…라는 기대 때문이셨을 것이다.

 

몽골이라고 하니 뭔가 특별한 법을 생각하셨던 듯하다. 생각하시는 것과 꽤 다르다. 지난 편에서 마지막에 넣었던 사진에서 안경 쓴 이들이 대부분 몽골 출신이었다. 시력 3.0 등등은 옛날이야기 혹은 지역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운동법은 개인차가 심해서 글로 이야기해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일하는 팀의 여성분은 2미터 파이프 정도는 6개씩 매고 다닌다. 그거 합계가 30kg 이상이다. 반면 인력사무소 통해서 정리하러 오는 분들의 경우, 20대 군필 남자들이 7kg짜리 거푸집 두 개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하는 거 자주 본다. 이분들에게 같은 운동 처방하는 건 말도 안 되지 않는가. 

 

궁금증만 풀어드리자면 악력 운동 중심으로 철봉과 케틀벨을 권했었다. 악력기 같은 것은 운동이 안 된다고 했다. 혹시라도 힘쓰는 운동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으시면 동네 피트니스 클럽에서 개인 PT 신청하면서 악력 운동을 좀 더 하고 싶다고 하시라. 독자님들 개별 상황에 맞는 운동법을 알려줄 터이다.

 

건설 현장은 바벨탑

 

공사 현장은 거대한 소음원이다. 현장 관리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어떻게 하면 소음을 줄일까이다. 기술 혁신이 집중되는 곳도 소음 저감 대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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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 거푸집을 떼어낼 때 발생하는 소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계란판을 갖다 붙인다. 바닥에 고무판도 깐다. 하지만 이거, 민원인들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대응용이지 실제론 별로 의미 있는 수준으로 소음을 줄이진 못한다.

 

그러나 이 소음을 어떻게서든 줄이고 보면 바벨탑의 상황이 벌어진다. 광주 화정동 아이파크 참사 이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돌았었다. 천여 명이 일하는 현장에서 한국어 사용자는 백 명이 안 된다는 이야기들. 하긴 나만 해도 부랴트 공화국과 몽골로 시작해 세네갈·나이지리아·예멘·태국·베트남에 이르기까지 꽤 돌아다녔지만, 가보지 못한 나라 출신들과 더 많이 일했던 것 같다. 심지어 수화 쓰는 청각 장애인들과도 일했다.

 

몇몇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버지 일 때문에 외국에서 컸다. 지금이야 한류 덕택에 좀 알아먹지만 스페인과 멕시코에서 살았던 70년대 말, 80년대 초만 해도 대한민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 나라에서 또래들에게

 

"일본놈과 짱개에게선 바퀴벌레 같은 냄새가 난데요"

 

라는 후렴구로 끝나는 인종차별 노래를 듣는 처지였다. 약소국 국민들이 자기 나라를 알아봐 줬을 때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안다. 받들어 모시는 분도 가끔 국가적 자존심에 흠집 생기는 일이 있으면 취침 전에 네팔 국가 트시는데 모를 수가.

 

잘 모르겠으면 바로 검색하고 그 나라 말 한두 마디라도 기억하려고 했다. 그때 가장 짠 했던 이들은 예멘인들이었다. 그즈음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다. 입이 있는 이들과 손가락이 있는 이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고 시끄럽던 시절이다. 난민 비자를 받는 확률이 2%도 안 되던 나라에서 참 볼만 했다. 바라시 팀으로 지원하러 왔던 예멘인들은 이미 안산에 정착했던 이들. 대체로 자기 나라를 사람들이 모르니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왔다’고 했었다.

 

그 부자 나라에서 왜 여기 오냐고 한참을 캐 물으니 ‘예멘’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앗쌀람 알라이쿰’이라 인사하니 눈을 크게 뜨며 놀랬다. 점심 즈음에‘ 살라트(이슬람의 기도)’ 할만한 곳을 알려줬더니 정말 고마워했다. 세네갈에서 온 날라리 이슬람이 돼지고기에 술을 즐기는 동안, 이들은 힘든 것으로 치면 건설 일용직 중에서도 최강인 거푸집 해체 일을 하면서도 라마단을 지켰다. 거푸집을 다 뜯어내고, 서포트까지 위의 위층으로 다 올려 비교적 깨끗해진 공간에서 흰색 천을 깔고 메카를 향해 절하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나라 이름도 잘 기억 못하는 약소국 출신의 서러움을 잘 아는 터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은 "잘 견디자"는 격려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인 팀원들에겐 이게 낯설었던 듯하다.

 

아니, 그즈음에 살라트하고 있는 모습을 찍어서 트위터에 올렸어도 반응은 볼만했을 것 같다. 탈레반 치하에서 살 수 없어서 한국에 온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을 다룬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은 신실한 이슬람과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극단적인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해가 떠 있는 동안 밥 굶어가면서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을 그즈음엔 광신도의 증거 정도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전직 포주, 티켓다방 사장, 보도방 사장과 사채업자에게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없는 체류자격을 가진 이들은 마구 다뤄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란 생선 잡아 오는 ‘가마우지’다. 막내였던 전직 사채업자까지 이들에게 사람이란 통수의 대상, 혹은 쥐어짜내야 하는 대상이었다. 팀장은 라마단의 규율을 지키는 것을 두고 ‘얼마나 일을 안 시키면 밥도 안 먹고 일하겠다고 생각하냐?’고 예멘인들과 함께 현장에 갔던 반장을 타박했다. 그날 그들이 날래게 일했기 때문에 빨리 끝났던 터인데 그들에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익스트림 안전 불감증을 지닌 자들

 

더불어 또 한 가지가 걸렸다.

 

이들의 전직은 물론 현직도 사회적 대접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을 생선 물어다 주는 가마우지 정도로 보는 직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갑을 모셔야 그 직업 자체를 영위할 수 있는 곳들 아닌가.

 

처음 찾아갔던 거푸집 해체팀에서 기공(기술자)이 받는 일당이 14만 원 선이었다. 다른 곳은 17만 원 이상일 때다. 팀에 속해 있던 한국인들 대부분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안되는 분들이었다. 은행거래라도 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팀장도 남의 통장만 이용했다. 

 

노동강도는 훨씬 높고 임금이 낮은데도 일하면 그건 바보다. 물론 일이 없는 겨울은 이야기가 다르다. 일거리가 계속 있다고 하면 몇만 원 적게 받더라도 일하겠다고 찾아오던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봄만 되면 떠났다.

 

남들로부터 본인 일을 인정받아본 적이 없으면 뇌는 보상체계를 만들어낸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안 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바꿔버린다(이를 인지부조화라고도 한다). 나중에 다른 바라시팀에서 일할 때 이때의 이야기를 하면 형님들의 표정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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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누가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일을 끝냈는가를 두고 경쟁했다. 노조팀 소속인 지금은 그날 작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비가 오면 대체로 철수한다. 우리, 형틀 목수들이 거푸집을 둘러싸면 철근공들이 그 안에 철근을 엮어 넣는다. 미끄러지면 하늘로 향한 철근 위로 떨어질 수 있다. 아침에 비가 좀 적게 오고 실내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몰라도 비 오거나 눈 오면 출근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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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체팀에 있었을 때는 폭우가 쏟아져도 출근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비 맞아가면서 파이프 위로 올라가 거푸집을 떼어내야 했다.

 

이 현장은 작업이 거의 끝났는데 일부 구간에 거푸집들이 남아서 그거 떼어내러 갔었다. 밖에 비가 오고 있고 발 디딜 곳이라곤 저 파이크 두 개밖에 없었는데 저기 위에 올라가서 일해야 했다. 특히 저 오른쪽 끝으론 파이프끼리 꽤 떨어져 있어서 움직이기 난감한 곳이었다. 딱 거기 거푸집 몇 개가 제거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건 시작이었을 뿐이다.

 

BT 비계라고 있다. Built-up Type Scaffolding. 조립식 가설 발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대략 이렇게 생긴 것들이 계속 위로 올라가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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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지지대를 땅에 닿게 한 상태에서 최대 2명까지만 올라갈 수 있는 장치다. 그런데 내가 처음 갔던 팀은 외부 벽에 붙어 있는 거푸집을 제거해야 할 때, 시스템 비계가 붙어 있지 않아도 그냥 일을 진행했다. 그것도 4~6명이서. 안전고리? 아마 앞편에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 팀 형님들이 가장 증오했던 것이 안전벨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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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비싼 것은 언감생심 구경도 못 한다. 기공이 일당 14만 원 받던 곳에서 안전장치에 12만 2천 원짜릴 사면 겁쟁이라고 몇 달간 놀림감이나 되었을 터이다. 

 

안전교육 = 시에스타 였던 곳

 

일상적으로 이렇게 일하다 보니 대체로 안전교육 시간은 눈 뜨고 잠자는 시간이었다. 항상 그렇게 일해서 그게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일하다가 언젠가 독일계 화공기업 창고를 만드는 현장에 갔다. 발주 회사의 파견자인 독일 분 몇 명이 우리가 안전고리도 걸 수 없는 곳에서 묘기 대행진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허겁지겁 시공사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말그대로 현장을 뒤집어 놓았다. 안전관리자는 총알처럼 뛰어 왔다. 항상 저렇게 일했던 우리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표정으로 멍청하게 있다가 안전교육장으로 끌려갔다.

 

안전교육장으로 끌려갔었지만 내가 속해 있었던 팀의 작업 행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시공사는 시스템 비계를 밟고 움직일 경우에는 파이프를 추가로 덧대 좀 더 공간 확보를 한 상태에서 일하도록 요구했다. 안전고리는 반드시 걸라고 아주머니 두 분을 붙여서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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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 위에 파이프 몇 개를 더 올리고 그걸 굵은 철사로 묶어서 발을 밟고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통로는 만들라고 했다. 하지만 팀 형님들, 이걸 파이프끼리만 묶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면 비계에 굵은 철사들이 안 묶여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시공사가 놔두라고 하니 놔두긴 했지만 안전하곤 전혀 상관없는 파이프 덩어리들일 뿐이었다.

 

안전 감시자로 온 아주머니 두 분은 종일 고리 걸라고 고함을 질러야 했다. 일하러 온 이들의 2/3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었다. 한국어를 알아 듣는 형님들은 안전벨트 자체를 증오하던 분들인데 그걸 걸었을 리가 없잖는가. 나중엔 아주머니들이 시끄럽다고 그 앞으로 거푸집을 던지는 형님도 있었다.

 

일을 이렇게 하는데 사고가 안 나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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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건축물의 외벽을 주로 둘러싸는 것이 시스템 비계다. 이 비계의 한 칸, 그러니까 가로로 주욱 이어진 놈들 사이는 보통 1.8미터 정도다. 저 한 칸엔 최대 250kg 이상을 못 올리게 되어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거푸집이 길이 1.2미터, 폭 60cm인 녀석이다. 사진 위쪽에 가로로 원형 파이프가, 세로로 각 파이프로 묶여 있는 것들. 현장에선 600 폼이라고 주로 부르는 녀석인데 저거 하나가 20kg 정도 된다. 그러니까 저 한 칸엔 12개 이상을 놓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안전 규정 같은 거 지키면서 일하면 ‘일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로 만들어진 팀이 저런 규정 같은 것을 지킬 리가 없다. 어느 날 일하다 보니 사람이 다니지 못할 정도로 거푸집을 쌓아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거푸집(현장에선 유로폼이라고 부른다)을 정리하러 올라간 용역 아저씨 한 분이 거푸집 위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지면서 추락사했다.

 

안전 규정이 빡빡한 독일 회사였다. 그때는 일감이 줄어드는 겨울이었다. 빨리 끝내봐야 다른 곳에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일하다가 사람이 죽었다. 반성하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추락사하는 장면을 목격했던 몽골 녀석 하나만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나?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다. 마나님은 당장 네팔로 돌아가자고 할 것이 뻔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가깝게 있는 이들은 입만 털 줄 아는 위인들이었다.

 

외려 "다들 그렇게 산다"며 나더러 나약하다고 타박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 정도 일도 못 하면서 왜 결혼했냐는 소리도 들어봤던 것 같다. 파이프 하나 잘못 밟으면 몇십 미터 밑으로 추락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2018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일 시작하기 직전에 마나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는 이야기였지만 마나님에게 보내는 마지막 문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다시 말한다. 내가 들어갔던 팀의 상태가 저랬다는 것을 짬이 좀 찬 상태에서 알았다면 그날 점심 이전에 그만뒀을 것이다. 저런 이들과 저런 형태로 일을 되풀이하면 위험에 무감각해진다. 결과는 결코 좋을 수가 없다. 지금 내가 일하는 형틀 목수 팀에 들어와서 총반장님에게 털린 일 대부분이 저 때 붙었던 나쁜 습관들 때문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위험한 상황에 빠트릴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또 하나 이 판에서 깨달은 게 있다. 자기가 모르는 일에 대해 입 터는 이들과 가깝게 지내는 거 아니다. 나는 이걸 늦게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