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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의 어그로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년 전인 2021년 6월 30일 전 세계 여성 운동가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국제 앰네스티의 사무총장 아네스 칼라마르(Agnès Callamard)의 발언을 들어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을 거다.

 

"터키 여성 인권을 10년 후퇴시키는 끔찍한 선례이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로 터키의 '이스탄불 협약' 탈퇴가 그것이다. 이스탄불 협약이 뭔지 궁금해할 거 같은데, 정식 명칭은

 

"여성 폭력과 가정폭력 예방 및 퇴치를 위한 유럽 평의회 협약(Council of Europe Convention on Combating Violence Against Women and Girls and Domestic Violence, Istanbul Convention)"

 

이다. 딱 봐도 알겠지만, 여성 인권과 관계된 협약이다. 애초 이 협약이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유럽 내에 만연한 여성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권 기준'을 만들자는 거였다. 최소한의 인권 기준이란 게 별 게 아니다.

 

"여성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자!"

"입법, 교육을 포함해 사회적 인식 자체를 성평등 장려 쪽으로 변화시키자!"

 

라는 거였다. 이게 무려 10년 전인 2011년 5월에 서명됐고, 2014년 8월 유럽 평의회 회원국 47개국 중 45개국이 터키 이스탄불에 모여서,

 

"자, 이제 우리 모두 서명했으니까 앞으로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해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해!"

 

라고 호기롭게 외치며 유럽 내에 여성 인권 증진을 위한 '법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지금 우리에겐 상식으로 자리 잡은,

 

"동의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다."

 

란 개념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이스탄불 협약 덕분이다. 이스탄불 협약 이후 스웨덴을 비롯해 그리스·크로아티아·덴마크 등이 동의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스토킹·성희롱·강제 낙태·여성 할례를 금지했다(할례는 여성의 음핵이나 음핵 포피를 제거하는 걸 뜻한다. 국가에 따라 소음순 모두를 제거하는 때도 있다. 소말리아를 포함해 30여 개국에서 시행 중이다. 2013년 UN 발표에 따르면 9초에 1명, 매일 9천 8백 명이 할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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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협약 탈퇴 소식에 거리로 나온 터키 여성들

출처-<국제엠네스티한국지부>

 

상식적으로,

 

"야, 이거 좋은 협약인 거 같은데?"

 

란 말이 나온다. 그런데 2021년 3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스탄불 협약 탈퇴 의사를 밝힌 것이다.

 

"우리는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할 거야."

 

이 한마디에 유럽 여성계가 발끈했다.

 

"너희 EU 가입하겠다면서, 여자를 이렇게 무시해도 돼? 너네도 여성할례하고 여자들 두들겨 패려는 거지?"

 

게이 축제도 금지한 에르도안 

 

에르도안은 왜 갑자기 이스탄불 협약을 탈퇴한 걸까? 정말로 여자를 때리기 위해서일까? 징조는 몇 년 전부터 있었다(터키 쿠데타 미수 사건 직후부터 징조가 있었다). 바로 터키에서 동성애자 축제. 즉 '게이 프라이드(Gay Pride)' 축제를 불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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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프라이드 행진에 나온

LGBTI 당사자와 앨라이(ally, 지지자)들

출처-<국제엠네스티한국지부>

 

이슬람 국가에서 게이 축제는 어떤 의미일까? 터키의 세속주의를 상징하는 빅 이벤트가 바로 이 게이 프라이드 축제다. 동성애자들이 이스탄불 거리에서 행진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작은 2014년 에르도안이 대통령에 취임한 다음부터다. 2015년 행사가 취소됐고 2016년 터키 쿠데타 다음부터는 아예 불허됐다. 명분은 간단했다.

 

"쿠르드족과 IS의 테러가 우려된다."

"라마단과 겹친다."

 

이슬람권 최대의 게이 축제가 무산되기 시작한 거다. 터키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다. 국민은 이슬람을 믿는데, 정부는 강력한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게 터키의 권력 형태였다.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만 볼 건 아니다. 이스탄불을 포함한 대도시는 거의 '서방'이라고 할 만큼 개화(?!) 됐다. 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종교를 기반으로 생활한다(이스탄불 같은 곳에서는 음주가 일상일 정도로 세속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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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터키 영토 3%가 유럽에 97%는 아시아에 있다)

출처-<GREEN BLOG>

 

이런 상황에서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됐다. 세속주의를 배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권 최대의 게이 축제가 6년 연속으로 금지당한 상황에서 터키 국민들과 경찰들의 충돌이 공공연하게 있었다. 그리고 에르도안은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했다.

 

"아니, 뭐 여자들 인권이야 중요하지... 그런데, 이스탄불 협약은 여자뿐만 아니라 게이나 레즈비언 같은 성소수자들 조항도 있거든?"

 

이스탄불 협약에는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규정이 있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로부터 폭력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터키 내 가족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나선 거였다. 에르도안의 조치에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나 관료들은 쌍수 들고 환영했다.

 

"동성애가 퍼지는 걸 막았다!"

 

당장 터키 여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국제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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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FP 연합뉴스>

 

당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부터가 날 선 비판을 토해냈다.

 

"우리는 성에 기반한 폭력이란 망령 아래에서 매일 같이 신음하는 여성들을 보아왔다 ··· (중략) ··· 우리 모두는 여성이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 (중략) ··· 우리는 협약에 서명한 첫 번째 국가인 터키에서의 여성 살해 증가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가정 폭력 사건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도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앞으로 여성 폭력을 보호하는 것이 EU 집행위의 '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여자라면 국가원수도 사람 취급 안 하는 터키

 

이 대목에서 터키의 외교적 '막장 짓'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 당시 터키가 얼마나 막 나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은 2021년 4월 초 이스탄불 협약 탈퇴 선언 직후 벌어졌다.

 

터키와 EU 정상 간의 회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 샤를 미셸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3명이 참석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의장은 '국가원수급'으로 의전 받는다. EU의 얼굴이지 않은가? 그럼 상임의장은? 상임의장은 집행위원회 의장과 동격의 대우를 받는다. 즉, 터키와 EU 정상 간의 회담에 참석한 3명은 모두 국가원수급이며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이때 준비된 게 딱 두 자리였다.

 

한 자리는 에르도안이 앉았다. 남은 한자리는 샤를 미셸 상임의장 몫이었다. 그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서 있었다(나중에 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집행위원장은 헛기침도 하고, 여러 신호를 보내며,

 

"야, 나 집행위원장이야! 왜 나한테 의자를 안 주는 거야?"

 

라고 터키 측에 '신중하게' 신호를 보냈지만, 에르도안과 터키 외교부는 끝까지 의자를 내놓지 않았다. 한마디로,

 

"넌 사람 취급 안 한다."

 

라는 거였다. 우르줄라는 이 회담에서 끝까지 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후 유럽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긴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양복에 넥타이를 맸더라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이전 회의 사진에서는 의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라며 불편한 속내를 가감 없이 내비쳤다. 외교 의전상 터키가 잘못한 게 맞다. 아니, 이건 의도하고... 아니, 작정하고 엿을 먹인 거였다. 우르줄라가 '이스탄불 협약' 탈퇴를 두고 터키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 그리고 그녀가 여자라는 것에 주목하고 의도적으로... 엿을 먹인 거다. 당시 이 사건을 '소파 게이트'라 부를 정도로 EU 내에선 뜨거웠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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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유럽의회 유튜브 영상 캡처>

 

상식적인 국가라면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행동이다(상대가 아무리 우습게 보여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국가원수급' 인사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는 짓을 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알 거다). 더구나 상대는 EU 최종 보스다. EU에 가입하겠다고 뻔질나게 신청서를 넣었던 게 터키다. 이런 짓하는 이유가 뭘까? 아니, EU에만 그러면 이해하겠는데 미국을 상대로도 막장 짓(!?)을 스스럼없이 하는 게 터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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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이 과거 회담을 가질 때는 모두가 별도의 의자에 앉았다.

출처-<여성신문/유럽의회 사진 갈무리>

 

 

막장 짓에 강대국도 가리지 않는 배포(?!)

 

2018년 터키는 미국의 앤드루 브런슨(Andrew Brunson) 목사를 체포했다. 터키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브런슨 목사를 두고 터키 정부는

 

"저 색희 저거 테러 단체랑 짝짜꿍해서 우리 엿 먹였어!"

 

란 혐의로 즉각 체포했다. 이때가 2016년이다(터키 쿠데타가 몇 년에 있었는지 이제 다 알 거다. 터키 쿠데타에 관한 기사는 다음을 참고하시라 : [완전분석]터키의 쿠데타 방정식: 단지 선악으로 판단할 수 없다). 터키 정부는 앤드루 브런슨이 페토(FETO : 펫훌라흐 귈렌 테러 조직의 약자로 쿠데타의 배후 세력이라고 터키 정부가 선언한 조직이다)와 협력했고, 나아가 쿠르드족 반군 단체인 PKK(이것도 일전에 설명했을 거다)와도 연계했다며 잡아 가둔 거다. 미국은 당연히 분노했다. 곧바로 석방을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미국은 응분의 대가를 치를 거라 협박했다.

 

"오케이 너희 막 나간다 이거지? 좋아! 우리 그럼 경제 제재할 거다!"

 

미국이 경제제재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터키 법원은 앤드루 목사에게 5년을 선고했다(나중에 3년 1개월로 감형됐다). 그러다가 2018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미국과 터키 간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바로 이 앤드루 브런슨 목사 사건이었다. 당시 트럼프도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에르도안과 접촉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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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슨 목사는 1993년 터키에 입국, 

2010년부터 작은 교회를 운영하던 중 2016년 10월 투옥됐다

출처-<링크>

 

소파 게이트와 앤드루 브런슨 목사 사건. 이 사건의 핵심은 이렇다. 

 

"터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미국과 EU 앞에서도 강짜를 놓을 수 있는 '깡'과 '믿는 구석'이 터키에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터키의 '믿는 구석'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려 더 도드라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