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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등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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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를 처음 접한 내 마음은 이랬다. 등신. 등신들이구나. 등신들이 이 나라의 의사결정을 하고 있구나. 등신들이 집권했구나. 에이지 오브 등신이구나.

 

아 잠깐. 성질 급한 검사의 고소장 타이핑 소리가 벌써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으니 미리 오해를 바로잡고 가자.

 

모두의 기대와 달리 등신(等神)의 한자 等은 '무리 등'으로 무리, 등급, 같다는 뜻이다. 神은 잘 알다시피 '신'이다. 욕으로 흔히 쓰는 ㅂ신(病身)의 신이 몸 신자인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등신의 본디 뜻은 '신과 같다'는 것이니 욕이 아니라 칭찬이다.

 

이 아름다운 단어가 혼탁한 후세들에 의해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뿌리와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이 단어를 본디의 의미, 즉 신과 같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밝힌다.

 

따라서 앞서 말한 '등신들이 집권했구나'라는 문장은 '신과 같이 위대한 분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는 의미이니, 검사들은 쓰고 있던 공소장을 비행기 모양으로 곱게 접어 창문 밖으로 훨훨 날려버리시라.

 

아무튼, 등신이 나라를 경영해, 전 공무원은 '근조 없는 검은 리본'을 달라는 공문을 내렸고, 공무원인 나는 그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등신의 지시가 현장에 어떻게 다가왔는지 내가 보고 경험한 썰을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이런 애도는 처음이다 

 

일단 타임라인을 정리하자.

 

10월 29일. 10.29 참사 발생

10월 30일. 윤석열, 11.5일까지 국가애도기간 지정

10월 30일. 행안부,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 착용' 공문 발송

11월 1일. 경향신문 최초 보도 ''근조' 글씨 없는 검은 리본 달아라? ···공무원들, 리본 뒤집어달며 "이런 일 처음"

11월 1일. 인사혁신처 해명, 반박. '검은색 리본이면 규격과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음'

 

굵직한 이슈만 정리한 것인데, 대략, 글씨 없는 리본 달라고 했다가 대차게 욕먹고 아무거나 달아도 된다고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이다.

 

해프닝이다. 밖에서 구경하기엔 그냥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이다. 문제는 내가 그 조직 안에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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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관에도 역시 저 문제의 공문이 당도했다.

 

- 10월 30일. 행안부,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 착용' 공문 발송

- 10월 31일. 내가 속한 기관에서 담당 공문 접수

- 11월 1일. 업무분장에 따라 담당자에게 공문 배분됨

 

30일이 일요일이라 그런지, 내가 있는 곳이 워낙 말단이라 그런지 우리는 31일에 해당 공문을 접수했다. 공문이 기관에 도착한다고 바로 전 직원 모니터에 뜨는 게 아니다. 기관이 받은 수십 수백 개의 공문을 담당자가 확인하고, 업무분장에 맞게 공문을 지정하는 과정을 거처야 한다.

 

도착 즉시 처리했으면 좋았겠으나, 이미 그에게는 먼저 도착한 수십 개의 공문과 잡다구리한 일과 민원이 산적했다. 그가 쌓인 공문을 해치우고 업무분장에 따라 근조 담당자(물론 그런 업무분장은 없다. 하는 일 중 가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는 것일 뿐)에게 공문이 배분된 것은 11월 1일(화).

 

- 11월 1일. 경향신문 최초 보도 ''근조' 글씨 없는 검은 리본 달아라? ···공무원들, 리본 뒤집어 달며 "이런 일 처음"'

- 11월 1일.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찾아서

- 11월 1일. 근조 리본, 택배로 주문

- 11월 1일. 인사혁신처 해명, 반박. '검은색 리본이면 규격과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음'

 

담당자도, 직원들도, 고위급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공무원이 무언가. 언제나 하던 대로 하는 게 최고라 생각하는 사람들 아닌가. 심지어 체육대회를 할 때도 야유회를 갈 때도 "작년도 계획대로 합시다"는 말이 나오는 조직이 공무원 조직이다.

 

그런데 전례 없이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달라니. 언론에서 때리고 사람들이 욕하지만, 일단 시키니까 시킨 대로 해야지... 라고 생각한 담당자는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찾아 헤맨다.

 

주변 문방구와 온라인 마트를 뒤져도 글씨 없는 검은 리본은 찾을 수 없다. 검은 천이나 종이를 사서 리본을 만들 수도 없고. 결국 그는 일단 구할 수 있는 글씨 있는 근조 리본을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리본 개당 300원 x 전 직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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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근조 리본 택배 도착

 

택배로 주문한 근조 리본이 도착하고, 담당자는 전 직원에게 근조 리본을 나눠준다. 리본을 받은 사람도 나눠 주는 사람도 어리둥절하다.

 

"근조 없는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근조 있으면 안 돼요?"

"뒤집어서 해야 하나요?"

 

"그렇다고 하는데, 아니라는 말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일단 받고 패용하세요."

 

국가애도기간인 30일(일요일)부터 5일(토요일)까지 전 공무원은 '글씨 없는 검은 리본'을 착용하라는 공문이 내려왔으나, 우리 기관이 공문을 받고, 담당자가 리본을 구입해서, 택배 받아 내가 리본을 착용한 것은 3일(목요일). 목요일과 금요일 이틀 리본을 단 셈이다.

 

정부 해명은 말인가 방구인가

 

그렇게 우리는 이틀간 리본을 달았다. 근조 글자 그대로 단 사람도, 근조 리본을 거꾸로 단 사람도 있었고, 굳이 근조 글자에 네임펜으로 검게 칠해 단 사람도 있었다. 글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해명 보도가 나간 후였지만, 그것까지 꼼꼼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른 기관도 우리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예 리본이 없어 구입한 곳도 있었고, 근조 리본은 있었지만 글씨 없는 리본이 없어, 글씨 없는 것을 애써 찾아 구입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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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타파>

 

리본을 달고 있는 우리도 그걸 보는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굳이 구태여 애써 '근조 없는' 리본이어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냥 공문이 왔고, 공문에 따른 것이니. 하여 그 무시무시한 공문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보낸 것인지 찾아보았다.

 

일선 공무원들에게 전달된 공문은 행정안전부 명의로 발송되었는데, <경향신문>의 취재에 따르면, 행안부는 이 공문을 인사혁신처에서 받은 지침을 전달한 것이다.

 

이에 총리실 산하 조직인 인사혁신처는

 

"통일성 있게 하나의 표준을 안내해야 하니까 그랬다. 다른 이유는 없다."

 

고 이유를 밝혔는데, 우리 동네 삼식이도 비웃을 해명이다. 공무원은 규정에 근거해 움직이고, 규정이 없으면 관습에 따라 결정한다. 그런데 '글씨 없는'이라는 전례 없는 지침을 내린다? 그러려면 특별한, 그것도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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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우리 동네 삼식이도 아는 상식이니 누구도 그 해명을 믿을 수 없었고, 논란은 들불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급기야 이 문제는 국회에 오르고 말았다.

 

권칠승 의원: '근조' 글자가 없는 검은 리본을 달라고 지침을 내리셨던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총리실 지시로 행안부에서 공문을 배포했지 않습니까?

 

국무총리 한덕수: 제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하겠습니다만 그때 근조를 달기로는 결정을 했는데 그것을 인쇄를 하거나 또 각 기관들이 혼동을 일으키거나 하니까 우선은 좀 자율적으로 하되 글자가 없는 것도 좋다 아마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제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해서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덕수 총리 특유의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겠지만, 일단 말은 길게 해보겠다는 스킬이 잘 엿보이는 대목이다. 눈앞에서 상사가 까이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는지, 특유의 생존본능이 발동한 것인지 인사혁신처장이 자청하여 대신 답변을 시작한다.

 

인사혁신처장 김승호: 브리핑을 하면서 글자 없는 리본을 패용을 했고 제가 8시에 중대본에 가 보니까 참석자와 배석자 수십 명이 있었는데 다 글자 없는 리본을 패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에 따라서 한 것이고요. 그 이유는 제가 듣기에는……

 

권칠승 의원: 그러면 이유가 회의에 가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전부 글자 없는 리본을 패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건가요?

 

인사혁신처장 김승호 : 그 당시에는 제가 듣기에는……

 

권칠승 의원: 아니,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장황한 사설 말고요.

 

인사혁신처장 김승호: 초기 부상자들이 많았고 또 현장에서 목격한 시민들의 심리적 충격 같은 것을 고려해서 아마 그렇게 했던 것으로 저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권칠승 의원: 인사처장님이 답변하실 내용을 모르시네요.

- 2022년 11월 8일, 국회 예결위

 

추측. 추측이다. 지침을 내린 인사혁신처장 역시 이유는 모른다는 결론인데, 본인은 중대본 높은 분들이 다 글씨 없는 걸 하고 있어서 그렇게 지침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 역시 한덕수 총리보다 조금 세련되지 못할 뿐, 말하는 나도, 듣는 너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의 다름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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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조 리본에 관해,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결론

 

요약하자면, 리본을 단 말단 공노비들도, 이를 지켜본 시민들도, 언론도, 지침을 내린 인사처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제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누군가 특별 지시를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데, 지시한 사람이 누군지, 무슨 이유로 지시를 내렸는지 알 수 없다. 나 역시 이 미스터리의 답은 모르겠고, 내가 근무한 현장과 온라인, 찌라시에 떠도는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a. 사건 초기에 사망자 외에 부상자가 있었고, 모든 피해자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근조를 보이지 않게 했다

 

b. 근조 글자가 보이면 추모 분위기가 강해질 수 있으므로, 참사 대신 사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글씨를 뺐다

 

c. 노란 리본과 '잊지 않겠습니다' 문구가 세월호의 상징으로 선명하게 인식되었으므로 처음부터 규격을 통일해 10.29 참사의 상징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여기까지가 그나마 논리적인 이유들인데, 어느 것도 명쾌하다는 느낌이 없다. 이런 이성적인 이유로 설명이 안 되면 논의는 비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마련. 아니나 다를까, 무속 버전의 해석도 등장했다.

 

d. 근조(謹弔)의 조(弔) 자와 윤석열의 윤(尹) 자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혹은 바람에 날리면 조(弔)가 윤(尹)으로 보이기 때문에 불길하다.

 

e.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복잡·대단한 무속적인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abcde 중 어느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판단할지 모르겠다...는 것은 한덕수 총리를 비롯한 이번 정권 수뇌부들의 희망일 테고, 사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로 모아져 있겠지만, 본인은 공노비이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해할 수 없는 등신적 존재

 

역시.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으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서론과 같은 표현으로 말하자면, 등신 같은 일이다(분명히 등신의 '뜻은 신과 같다'고 말했습니다x2).

 

따지고 보면 신은 원래 그렇다. 신은 원래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경배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은 불가해한 것에서 나오는 것이고 종교의 근본에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니.

 

누군가는 이 논란을 두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이런 촌극을 빚었다며, 낭비한 예산이 얼마고 행정력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근조 리본을 뒤집어 달았던 말단 공노비로서, 경외심을 느꼈다. 등신을 마주한 경외심. 등신을 향한 믿음 소망 사랑. 등신 앞에 선 단독자.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굳은 마음으로 그저 믿고 따르기로 했다. 부족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들을 경배하기로 했다.

 

해서 두 손을 모으고 신앙을 가득 담아, 나직하게 외쳐보련다.

 

윤석열 정권, 참으로 등신이다. 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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