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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위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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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열린책들>

 

 

제정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대규노 농민 반란

 

18세기 후반 러시아의 역사는 곧 예까쩨리나 2세의 역사였다. 그녀는 뻘짓을 일삼던 남편 뾰뜨르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폐위된 뾰뜨르 3세는 곧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을 계몽 군주라 자처한 그녀는 선정을 펼치는 듯했으나, 그녀가 도입한 대부분의 제도는 자신과 소수 귀족을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농노제는 여전했으며, 농노들의 삶은 오히려 더 참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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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까쩨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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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뜨르 3세

 

예까쩨리나 치하, 불평등이 극에 달했을 때, 까자끄(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의 초원 지역 일대에 있었던 슬라브계 군사 집단. 민족적 기원보다는 특정한 지역에서 형성된 종족) 농부이자 러시아군 출신인 예멜리안 뿌가쵸프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기적적으로 살아난 뾰뜨르 3세라 칭하며 ‘농노해방, 인두세 폐지’ 등을 내걸었다. 한때 반란 세력은 오렌부르그 요새를 함락시키고 까잔과 사라또프까지 점령하기도 했으나 끝내는 패배했다. 체포된 뿌가쵸프는 1775년 1월 모스크바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처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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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가쵸프

 

그는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자신의 반란이 성공할 것이라 믿었을까?

 

어느날 매가 까마귀에게 물었다네. ‘여보게 까마귀, 자네는 이 세상에 태어나 3백 년이나 사는데 나는 어째서 30년 밖에 못 사는가?’ 까마귀가 이렇게 대답했네. “그건요, 당신은 산 짐승의 피를 마시고 저는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기 때문이랍니다.” 매는 그렇다면 나도 한번 똑같은 걸 먹어 봐야지 하고 생각했네. 그리하여 까마귀와 매는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죽은 말을 발견하고는 말고기 위에 내려앉았지. 까마귀는 아주 맛있게 말고기를 쪼아 먹었지. 매는 한두 번 쪼아 보다가 날개를 저으며 까마귀에게 말했다네. “여보게 까마귀, 안되겠어. 3백 년 동안 썩은 고기를 먹느니 한 번이라도 산짐승의 피를 쭉 들이키는게 낫겠어. 나중 일은 내 알 바 아니지!”

 

 

귀족 뾰뜨르, 부임지로 향하다

 

내 이름은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입니다. 인자한 어머님은 저를 ‘뻬뜨루샤’라 부르지요. 지금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려 합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일은 제가 직접 겪은 것이며, 제 인생을 결정지은 일이기도 합니다.

 

운명의 그날, 나는 드문드문 언덕과 골짜기만 보이는 서글픈 황야를 달리는 마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지요. 내 옆에는 충직하지만 수다스러운 늙은 하인 ‘사벨리치’가 앉아 있습니다. 마차는 제가 군인으로 근무하게 될 시골 도시, ‘오렌부르그’로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모두는 시골 구석의 영지에 300명 정도의 농노를 가진 영주이자 뼛속까지 군인인 아버지의 명령이었습니다.

 

나의 첫 임지(任地)가 될 오렌부르그를 향해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다 보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마차는 농부들의 썰매가 지나간 자국을 따라 달리고 있었지요. 그때 갑자기 마부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날씨가 영 안 좋습니다요. 바람이 슬슬 일기 시작합니다요. 보세요. 땅에 떨어졌던 눈가루가 바람에 치솟고 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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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위의 딸(1958)’ 中

 

마부의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집을 부렸지요. 난 어서 다음 역관으로 가 푹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속도를 더 내서 계속 가자고 했지요. 갈수록 바람은 더 세차졌고 꾸물꾸물 피어오르던 조각구름은 곧 허연 비구름이 되어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주먹만 한 눈송이로 바뀌었지요. 순식간에 무서운 눈보라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바람은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무섭게 포효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어두운 하늘은 눈의 바다와 뒤범벅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내 고집으로 인해 우리는 꼼짝없이 마차에서 눈보라를 견디며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마부의 말을 듣지 않은 나를 자책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어떤 물체 하나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어느 농부였습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새치가 섞인 검은 턱수염을 기른 사내였습니다. 눈보라 치는 추운 날, 얇은 외투 하나만을 걸친 가난한 농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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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에게 보답한 귀족 뾰뜨르

 

그는 나에게 바람 속에서 연기 냄새를 맡았다며, 분명히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으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의 예지와 날카로운 감각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내하는 대로 힘겹게 따라갔습니다. 물론 의심 많은 노인네 사벨리치는 반대했지요.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곧 한 여인숙을 찾을 수 있었고, 뜨거운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깊은 잠에 빠졌지요.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습니다. 언제 눈보라가 쳤냐는 듯 태양이 쨍쨍했고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이 새하얗게 눈을 찌를 듯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를 구원해 준 가난한 농부에게 작은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벨리치에게 그가 보드까라도 한 잔 하도록 50꼬뻬이까를 주라고 했지요. 그 순간 사벨리치의 넋두리 비슷한 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돈은 전적으로 사벨리치의 소관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사벨리치와 입씨름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토끼 가죽 외투를 그 농부에게 선사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싸 주신 내 물건이었습니다. 농부는 크게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외투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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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자는 나의 선물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마차까지 나를 배웅한 뒤 허리 굽혀 절하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리! 나리의 덕행에 주님의 보답이 있으시길 빕니다. 나라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부임지 도착, 친구와 여인을 만나다

 

나는 오렌부르그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지를 뜯어본 오렌부르그의 ‘안드레이 까를로비치’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배치했습니다. 그 요새는 오렌베르그에서도 40베르스따(약 42.6 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끼르기즈 까이사쯔끼 초원에 접경한 아주 외딴 곳이지요.

 

내가 상상했던, 무시무시한 능보(稜堡)와 탑, 그리고 바리케이드가 쳐진 그런 요새는 없었습니다. 그냥 통나무 울타리가 쳐진 작은 촌락이 벨로고르스끄 요새였습니다. 그나마 마을 입구에 무쇠로 만든 낡은 대포 한 대가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대포는 딱 한 번 쏘아봤다고 했습니다. 요새의 책임자인 ‘미로노프 대위’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녀가 대포 소리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위와 대위의 부인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나는 지정받은 내 숙소로 향했습니다. 요새의 끄트머리에 있는 강변 둔덕 위의 오두막이었습니다. 내 앞에는 서글픈 광야가 펼쳐져 있었고, 오두막 앞 길가에는 닭 몇 마리가 노닐고 있었습니다. 노파 하나가 구유통을 들고 돼지를 부르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아, 이곳이 내가 청춘을 보내도록 운명지어진 곳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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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한 가지 위로는 친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중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가진 영리하고 활기에 넘치는 장교, ‘쉬바브린’입니다. 원래는 근위대에서 근무했었는데 금지된 결투를 해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즉시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미로노프 대위 부부가 주최한 식사 자리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습니다. 대위의 딸인 ‘마리야 이바노브나’, 마샤를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그때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들어왔다. 그녀는 혈색 좋은 동그스름한 얼굴에 금발 머리를 귀 뒤로 매끈하게 빗어 넘겼는데, 두 귀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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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바브린과의 결투

 

요새는 평화로웠고, 나는 장교로 승진했습니다. 신께서 보호해주시는 이 요새에는 사열도, 연병도 초소 근무도 없었지요. 물론 주로 늙은 상이군인들인 병사들은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하지도 못했습니다. 대위님의 선량한 가족들과 그의 선량한 병사들. 이 무렵, 달리 할 것도 없는 나날들 덕분에 내 문학적 소양이 싹텄습니다. 나는 아침마다 독서를 했고 틈틈이 시를 써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첫 친구, 쉬바브린에 의해 평화는 깨졌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요. 어느 날 나는 만족할만한 시 한 수를 완성했습니다. 그 시는 어느덧 조금씩 호감을 느끼게 된 마샤를 떠 올리며 쓴 시였습니다. 내 작품을 읽고 평가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쉬바브린을 찾아갔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쉬바브린은 내 시를 읽고 차갑게 비웃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했지요. 그리고 이 시가 마샤를 향한 것이냐고 묻더니 진정 마샤가 밤에 찾아오게 하고 싶다면 이따위 시 나부랭이보다는 귀고리 한 벌이 더 나을 것이라며 비웃었습니다. 나는 피가 끓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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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그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건가?” 

 

나는 가까스로 분노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악마적인 조소를 띠며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해봐서 그 아가씨의 성격과 습관을 잘 알기 때문이지.”

 

그 순간, 나는 그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습니다.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아버지는 나에게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쉬바브린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쉬바브린은 기뻐하며 승낙했습니다. 

 

마샤에게 이 결투에 대해 말했을 때, 비로소 나는 쉬바브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샤는 내가 이곳에 오기 두 달 전, 그가 자신에게 청혼했었으며 자신이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쉬바브린이 나에게 가했던 모욕은 지나친 농담이 아닌 계획적인 중상모략이었던 것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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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투가 나의 승리로 끝났다면 내 이야기가 특별할 리 없겠지요. 칼에 찔린 것은 쉬바브린이 아니고 나였습니다. 내가 기술 좋은 쉬바브린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쉬바브린의 칼날이 내 오른쪽 어깨 아래편의 가슴을 심하게 찔렀습니다. 나는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사벨리치였지요. 이 노인네가 나를 살리겠다고 한 행동이었답니다. 울화통이 터지지만 별수 있나요. 다 운명인 것을. 그리고 그 운명은 또 다른 결과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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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록 사경을 헤맸으나 끝내 죽지 않았고, 내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는 마샤가 서 있었습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천사 같은 그녀의 음성에 나는 감격했습니다.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느낌이었지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잡은 손을 빼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와 닿으며 나에게 뜨겁고 생생한 입맞춤을 선사하는 게 아닌가. 한줄기 불길이 내 몸에 확 번져 나갔다.

 

 

요새에 들이닥친 반란군

 

마샤와 나의 행복한 날들은 순식간에 끝났고, 요새의 모든 평화는 깨졌습니다. 울부짖는 가을바람 소리가 들리던 저녁, 미로노프 대위가 요새의 모든 장교들을 소집했습니다. 예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뿌가쵸프’라는 황제 참칭자가 까쟈끄들을 데리고 다시 반란을 일으켰는데, 벌써 여러 채의 요새들을 집어삼키고 요새 근처까지 진군했다는 것입니다. 미로노프 대위는 오렌부르그의 장군이 보내온 친전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 친전에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요새의 모든 사람들이 뿌가쵸프에 관해 지껄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까자끄인들 사이에 평소와는 다른 동요의 기미가 확실하게 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사람들을 선동하는 문서를 지닌 바쉬끼르(지역 이름) 출신 노인 한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전에 1차 반란에 가담한 죄로 처벌받은 적이 있던 노인네였습니다. 그는 나이는 일흔 살도 넘어 보였고 얼굴에는 코도 귀도 없었습니다. 오직 째진 눈만이 불꽃 튀고 있었습니다. 그 바쉬끼르 출신 노인은 사령관이 묻는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의 범죄 부인이 그의 무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여제 폐하께서 야만적인 고문을 금지하셨으나 그것은 그냥 칙령일 뿐이었습니다. 전혀 효력이 없었지요. 지금이라면,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 살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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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하신 대위께서 고문을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따라 두 명의 병사가 채찍질을 위해 바쉬끼르 노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쉬끼르 노인은 아이들한테 잡힌 작은 짐승처럼 사방을 둘러보더니 희미하게 애원하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습니다. 그 입 안에는 혀 대신에 작은 나무토막 한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고문은 중단되었습니다.

 

시간이 깜짝할 새 반란군은 금세 요새를 포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마샤가 오렌부르그로 탈출하기도 전에 말이지요. 

 

 

요새의 함락과 배신자 쉬바브린

 

말을 탄 스무 명가량의 반란군이 요새 앞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대위는 그들을 향해 대포를 조준하라고 명령하고 직접 도화선에 불을 붙였습니다. 포탄은 피시식 소리를 내며 그들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반란군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때 새로운 기마대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왔고 요새 앞 초원은 순식간에 무장한 사내들로 뒤덮였습니다. 뿌가쵸프는 백마를 타고 군도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수비대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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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폭도들이 우리를 덮치며 요새 안으로 밀어닥쳤다. 북소리는 잠잠해졌고 수비대는 무기를 버렸다. 나는 떠밀려서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났다.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곧 무서운 코미디가 진행되었습니다. 뿌가쵸프는 자신이 뾰뜨르 황제라며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늙은 대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곧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엽게도 대위의 부인마저 장검에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참혹한 처형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너무도 놀라 말도 나오지 않을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뿌가쵸프의 대장들 사이에 서 있는 쉬바브린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까자끄 식 까프딴을 입고 머리를 둥그렇게 깎은 채 서 있었습니다. 그가 뿌가쵸프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살거리자 뿌가쵸프의 명령에 의해 내 목에도 올가미가 씌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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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가쵸프의 정체와 선의

 

그때였습니다. 충성스러운 노인 사벨리치가 뿌가쵸프의 발 아래 넙죽 엎드려 내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노인네의 애원 탓인지 뿌가쵸프는 내 목의 올가미를 벗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키스할 것을 나에게 명령했습니다. 나는 사벨리치의 애원을 외면하고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이미 귀족으로서 명예로운 죽음을 결심했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뿌가쵸프가 빙긋 웃으며 키스를 거부한 나를 오히려 풀어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뿌가쵸프와 그가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화를 면하게 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기이한 상황의 교착(交錯)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농부이자 부랑자에게 주었던 토끼 가죽 외투가 교수대의 올가미에서 나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오렌부르그로 들어가 다시 뿌가쵸프의 부하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나에 대한 뿌가쵸프의 선의는 계속되었습니다. 배신한 쉬바브린은 벨로고르스끄 요새의 사령관이 되었고 그는 요새에 남겨진, 고아가 된 가여운 마샤를 협박했습니다.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신분을 폭로하여 처형되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나는 뿌가쵸프의 선의를 믿고 도박을 감행했습니다. 도박은 성공했습니다. 뿌가쵸프는 자신의 진영으로 들어와 모든 사정을 털어놓은 나에게 마샤를 내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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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와 내가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자신이 점령한 모든 지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까지 써 주었습니다. 나와 마샤는 음울한 악의가 서려 있는 쉬바브린의 얼굴을 뒤로 하고 요새를 떠났습니다.

 

“자네가 사준 술 한 잔과 토끼 가죽 외투 생각이 나서 말이야. 어떤가, 나는 자네 동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흉악한 놈은 아닌가 보이.”

 

이것이 뿌가쵸프가 직접 말한, 나에게 선의를 베푼 이유였습니다. 나는 나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악당이자 폭군인 이 끔찍한 사내와 이별하며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감정에는 연민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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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가쵸프와 재회하다

 

이제 내가 들려주고자 했던 이야기가 끝나 갑니다. 뿌가쵸프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비록 사악하고 비겁한 귀족 쉬바브린의 마지막 발악에 의해 내가 뿌가쵸프의 첩자로 몰려 짧은 시간 감옥살이를 했으나, 그건 전혀 중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질 낮은 자존심과 가치 없는 질투심 따위는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니까요. 세상 어디에나 그런 인간은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인간들의 인생과 말로는 오물통에 버리면 끝인 것입니다.

 

마샤가 쓴 편지를 본 예까쩨리나 폐하에 의해 나는 사면되었습니다. 사면된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뿌가쵸프는 군중 틈에 섞여 있는 그를 알아보고는 1분 후면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시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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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뿌가쵸프를 다시 만난 곳은 그의 처형장이었습니다. 뿌가쵸프는 죽었고, 나는 마샤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나의 이야기, 불행과 행운, 그리고 온갖 모험과 악몽이 모두 섞인 이야기, 끝내는 생각지 못했던 반전까지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작은 선의에 크게 보답한, 끝까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킨 한 악당 두목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나비 효과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알 수 있다면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큰 부자가 될 수 있고, 미래 어느 시기에선가 나에게 해가 될 결과를 가져올 지금의 행동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궁금해하며, 또는 불안해하며 오늘 하루를 삽니다. 어떨 땐 행운이 오기를 기대하며 또 어떨 땐 불행이 나를 피해가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오늘이 모여 내일이 되는 것이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내일을 모릅니다. 야속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가히 불확실성의 인생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확실한 것 하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내일과 1년 후 그리고 10년 후에도 태양은 뜬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불확실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확실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 싹이 나올 것이고 팥을 심으면 팥 싹이 나오는 것처럼, 자연의 법칙만큼은 비록 미래일지라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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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제작자 이제석 대표의 작품

 

이 말이야말로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인생 역시 자연의 한 부분이라면 이 자연의 법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불확실성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법칙을 인생에 대입해 봅니다. 오늘 내가 사소한 행동들, 며칠만 지나도 잊어버릴 그런 행동들이 싹이 나고 자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커다란 나무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가히 인생의 ‘나비효과’라 하겠습니다.

 

지금 불고 있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돌풍도 우리가 찾지 못할 뿐이지 지구 반대편 나비의 날갯짓이라는 원인이 있듯이, 우리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는 미래도 결국은 지금의 작은 행동들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일들, 그것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으로 생각이 마무리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들 앞에서 가만히 과거를 성찰하여 원인이 된 과거의 어떤 일을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지금 내가 한 행동들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대략이나마 짐작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뾰뜨르는 신분제 러시아에서 귀족이었습니다. 그를 눈보라로부터 구해준 뿌가쵸프는 농노였습니다. 그러나 뾰뜨르는 이 신분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지켰습니다. 이런 그의 행동은 미래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보답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의 나비효과라는 불확실성이 내 앞에서 확실성으로 모습을 바꾸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확실성이란 내 미래에 나타날 행운이란 이름의 반작용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너에게서 나온 것은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간다.” 

 

-맹자-

 

오늘 하루도 대부분 힘들게 보냈을 것입니다. 기운 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힘든 와중에도, 사는 게 힘들었어도 우리가 지킨 도리들, 우리가 베푼 선한 행동들이 미래 어느 날인가 나를 미소 짓게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행위들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자들의 웃음은 미래에 통곡의 고통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의지 없는 명분론이 아니라 뿌린 대로 거둔다는 명백한 자연의 법칙입니다. 지치지 말고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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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

 

대위의 딸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칭해지는 푸시킨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는 38세에 그를 괴롭히던 연적과의 결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진보적 시인이자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낭만적 삶을 산 그였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누구나 알고 있을 그의 시구절 하나를 인용하며 스물세 번째 인생 탐구를 마무리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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